인권하루소식

인권운동사랑방이 선정한 2001 인권 10대뉴스(1)


<인권하루소식>은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을 맞아 올해의 주요 뉴스 중에서 ‘2001년 인권10대뉴스’를 선정했습니다.[편집자주]


국가인권위원회, 부실한 출범 큰 소망

11월 26일, 만 3년여의 논란 끝에 ‘국가인권위원회’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국가가 국민의 인권보장이라는 자신의 책무를 효과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마련한 ‘내부의 반성장치’인 국가인권위에는 출범부터 굳은 자물쇠가 채워졌다. 법무부, 국방부, 보건복지부 등이 해당 보호시설을 인권위의 조사대상에서 제외하고 조사갈 때는 사전에 통지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으며, 행정자치부는 인원규모를 1백27명 선으로 하고 인권활동가들의 직원채용시 특례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국가인권위가 제출한 시행령과 직제령이 제정되지 못하였다. ‘역사적인’ 출범이란 말이 무색하게 사무처도 없이 간판을 내걸던 날, 인권위원들이 직접 진정접수에 나섰고 목마른 국민들의 우물 파는 줄은 길고도 길었다.

3년 내내 법무부의 책동에 시달리던 국가인권위법안은 ‘누더기’가 됐다는 혹평 속에 4월 30일 국회를 통과했다. 뒤이어 인권위원 밀실인선과 은밀하고 배타적으로 추진된 국가인권위 설립준비기획단의 운영 행태 등이 비판대에 올랐다. 인권위를 적대시하는 관료집단의 저항과 국가인권위 준비 주체들의 비민주성은 “폭넓은 의견을 수렴하여 시민사회의 축복 속에 국가인권위가 출범하기 바란다”는 인권단체들의 바람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가 하루빨리 정상궤도에 올라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기구로 순항하는 것은 일부 관료집단을 제외한 모든 국민의 여전한 소망이다.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싶다”

올 한해, 장애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 원하는 때에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며 사회의 높은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설날 연휴 기간 중 지하철 오이도 역에서 장애인 리프트가 고장을 일으켜 70대 장애인 노부부가 사망과 중상이라는 비극을 당했다. 허술한 장애인 시설 관리 체계가 부른 사고였다. 이 소식을 접한 노들장애인야학 등 장애인 단체들은 지하철 장애인 리프트 문제를 제기하며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난 ‘장애인의 묶인 발’의 실태는 충격이었다. 한 달에 한번도 외출하지 못하는 장애인이 전체 장애인중 16.6%에 달하고, 70.5%가 한 달에 5번도 외출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올 4월, 20여 개 장애인․사회단체들은 ‘장애인이동권연대’의 결성에 나섰고, 장애인들은 휠체어를 탄 채 1호선 철로에 뛰어들고, 지하철 연착을 부르는 승차투쟁을 하고, 버스를 점거하는 등 그들의 몸짓은 강경하고 처절했다. 이에 따라 사회의 관심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7월부터 시작한 ‘장애인이동권 확보를 위한 서명운동’에 12월 4일 현재까지 15만3천여 명이 서명을 했다. ‘시혜가 아닌 권리를 달라’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장애인의 ‘우리 사회 속으로의 승차’를 요구하는 투쟁이다.


대우차 노동자에 대한 4․10 경찰테러

4월 10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앞 도로에서 무장한 전투경찰 병력이 대우차 해고노동자들을 집단폭행, 노동자 수십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법원의 ‘노조사무실 출입허가’ 결정에 따라 노조사무실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법원의 결정을 무시한 채 노동자들의 이동을 막았고, 이에 항의하던 노동자들이 맨몸으로 연좌시위에 들어가자, 곤봉과 방패를 휘두르며 노동자들을 집단 구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2월 16일 대우차 노동자 1750명에 대한 정리해고 이후 두 달 가까이 지속되었던 ‘부평사태’의 연장선에서 발생했다. 정부는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한 노동자들을 2월 19일 강제 해산시킨 데 이어, 4월 중순까지 수만 명의 경찰병력을 부평 일대에 주둔시켜, 이른바 ‘유사계엄’ 상태를 만들었다. 노동자들의 집회는 원천금지되었고, 초기 4주 동안 무려 671명이 연행되는 등, 무작위 연행과 불법구금이 판쳤다. 공장 내에 상주한 경찰병력은 일상적인 노조활동마저 철저히 감시했다. 이러한 사태가 급기야 4월 10일의 경찰테러로 폭발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4월말 광주에서는 캐리어 하청노조 소속 노동자가 전투경찰들에게 끌려가 집단 폭행을 당했고, 5월 울산 효성노조 파업현장에는 ‘흉기’를 소지한 용역깡패들이 대거 등장했으며, 6월 여의도에서는 경찰이 레미콘 노동자들의 차량을 도끼와 망치로 때려부수는 등, 노동자투쟁을 진압하기 위한 ‘물리적 테러’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유엔, 한국의 사회권 종합 진단

우리나라의 사회권 상황이 국제인권의 무대에서도 깊은 우려를 샀다.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사회권 상황에 대한 2차 정부 보고서를 심의한 후 지난 5월 11일 강도 높은 권고를 발표했다. 95년 1차 보고서 심사 후 6년만에 이뤄진 이번 권고는 IMF 체제 이후 사회권 상황에 대한 유엔 차원의 종합적인 평가로서 의미가 있다.사회권위원회는 정부가 경제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고용상태의 악화, 소득불평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21개 항목의 주요 우려사항을 열거했다. △열악한 공교육 시스템으로 인한 저소득층의 사교육비 부담 증가 △노조에 대인권운동사랑방이 선정한 과도한 공권력의 남용 △비정규노동자의 상황 △교원과 공무원의 노동기본권 제한 △국민기초생활보장제의 급여의 적절성 문제 △취약계층의 보건의료 이용 문제 등이 그 내용이다. 또한 사회권위원회는 정부가 제1차 이행보고서 심의 이후 채택된 권고들을 거의 이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사회권 조약을 비준한 우리 정부는 사회권위원회의 권고를 이행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인권․사회단체들은 유엔의 권고 채택 직후, 대통령과 정부 각 부처에 ‘권고 이행계획’을 수립하고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사회권위원회의 권고가 많은 언론에서 다루어지자 정부는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관계부처 간 협의를 통해 유엔의 최종평가서 내용을 검토하고 권고사항의 이행조치를 조만간 마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 후 현재까지 구체적인 이행조치는 눈에 띄지 않고 있다.


운동사회 반성폭력 논의 활발

운동사회 내 성폭력 피해자들이 입을 열어 반성폭력 운동에 시동을 걸었다.

운동사회 내 반성폭력 운동의 촉매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은 ‘운동사회 내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다. 여성활동가들로 구성된 100인위원회는 지난 해 말 성폭력 사례 1차 공개를 한 데 이어 올해 2월 2차로 KBS 노조 전 부위원장의 성폭력 사건을 공개했다. 사건의 공개와 함께 100인위원회는 가해자 실명공개와 피해자 중심주의란 자신들의 활동원칙이 가해자의 인권을 무시한다는 비난에 부딪쳤다. 급기야 100인위원회는 가해자로 지목된 소설가 박 모 씨와 KBS 노조 전 부위원장에 의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과 법원은 100인위원회의 활동이 공익적 목적을 지녔다는 점을 인정해 불기소 처분 내지는 명예훼손청구를 기각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100인위원회의 손을 들어줬다. 운동사회 내에서도 가해자 실명공개는 운동의 대의와 단결을 앞세워 성폭력사건을 축소하기에 바쁜 운동 풍토 속에서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목소리가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결국 이러한 움직임은 서서히 피해자들의 고통에 눈뜨면서 운동사회 내에서 성폭력 사건을 조직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17년 만의 진실, 박영두 고문치사 사건

진실은 손바닥으로 가려지지 않았다. 84년 의문사한 박영두 씨의 사인이 17년 만에 무덤 저 끝에서 세상으로 걸어나온 것.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6월 25일, 1984년 청송 제 1보호감호소에서 의문사한 박 씨가 감호소 내 인권탄압에 항의하다 교도관들의 폭행으로 숨진 것이라 밝히고, 민주화운동과의 관련성을 인정했다. 5공 당시 발생한 의문사가 처음으로 민주화운동 관련 타살로 인정된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전두환에 대해 언급한 것이 빌미가 돼 80년에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후 84년 소내 처우개선을 요구하다 고문 속에 죽어간 박 씨의 죽음은 지난 세월 우리사회의 참담했던 인권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게다가 사인을 조직적으로 은폐해 온 것으로 드러난 관련자들은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은 “박 씨는 극악무도한 죄인에 불과하며 피해자는 우리”라는 망언을 일삼으며 여전히 공직사회에 몸담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지난 97년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김준배(당시 한총련 투쟁국장)씨의 사인도 실체를 드러냈다. 경찰의 구타 사실이 밝혀졌으며, 경찰이 김 씨의 후배를 매수, ‘프락치’ 활동을 사주했다는 사실은 충격을 안겨줬다.

422일에 걸친 유가족들의 처절한 농성 속에 출범한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올 한해 83건에 대한 진정 및 직권조사를 시행하는 등 선전해왔지만 난항은 거듭되고 있다. 검찰 등 권력기관의 비협조 속에 조사시한이 내년 2월까지로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위원회의 한계에 대한 반발로 민간조사관들이 대거 사표를 제출하기도 했다. 살아남은 자의 한숨과 넋들의 통곡은 계속되고 있다.


국가보안법의 호령, ‘네 마음을 보여봐!’

2000년 말 정부가 ‘(국보법 개폐 등 개혁입법의)연내 처리가 어렵다’며 뒤로 나자빠지자, 그해 12월 28일부터 인권활동가들은 명동성당에서 연말 연시 노숙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국보법은 1월 1일 송구영신 집회에 참여했던 전직 한총련 대의원을 체포하는 일로 2001년의 포문을 열어 그 ‘건재’함을 과시했다. 국보법 위반으로 4년여 수배생활 끝에 구속된 한총련 아들이 ‘말기암’ 진단을 받은 아버지와 유치장 상봉을 하고, 신랑이 구속되어 신랑 없는 ‘눈물의 결혼식’이 열리는 등 국보법의 횡포는 연중 계속되었다.

그중 국보법의 본질을 가장 유감 없이 드러낸 사건은 8월 24일 강정구 교수의 구속이었다. 강 교수는 평양축전 방북단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 만경대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는 글을 남긴 것과 ‘주체사상 토론회’를 통해 자신이 직접 제작한 주체사상 관련자료를 배포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강 교수의 구속이후 수사의 초점은 강 교수의 ‘본심이 무엇인가’를 파헤치는데 집중되었다. ‘만경대 발언이 국가안보에 명백하고 현존한 위협을 끼쳤는지’의 여부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아무 의미 없이 썼겠느냐’는 추측을 전제로, ‘증거를 찾겠다’며 압수수색을 벌이고, 오래 전의 일인 ‘서울대 주체사상 토론회’까지 들춰내 그의 본심을 추적한 것이다. 국보법이 노리는 것은 행위가 아니요, ‘내심’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북한을 방문해 “존경하는 김정일 장군님”이라 한 재벌은 처벌받지 않아도 강 교수는 처벌할 수 있는 법이 국보법이었다. 강 교수는 10월 11일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공판은 계속되며 그의 ‘내심’을 열어 보일 것을 강요하고 있다.


인터넷에 ‘검열’ 깃발 꽂히다

인터넷 검열체계를 구축하려는 정부의 구상이 마침내 제도적 틀을 갖추며 현실의 문제로 등장했다. 지난해 개정된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이 올 7월부터 발효된 데 이어, 11월 1일 정보통신부 장관의 고시마저 발효됨으로써, ‘유해매체표시제’와 ‘차단소프트웨어’를 양날개로 한 인터넷상의 검열체계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준비를 마쳤다.

새로이 시행된 인터넷 검열체계의 핵심은 ‘전자적 표시’제. ‘불온’ 혹은 ‘청소년 유해’판정을 받은 사이트는 스스로 ‘유해함’을 전자적 방식으로 표시해야만 하며, 이러한 ‘전자적 표시’가 ‘차단소프트웨어’와 결합됨으로써 인터넷 차단기제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유해매체판정의 잣대가 국가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는 점과 유해매체여부와 상관없는 사이트까지도 차단이 가능해진다는 점.

11월 9일 동성애사이트 엑스죤의 폐쇄는 그 첫 케이스로 등장했다. 막연히 ‘음란하다’는 판정을 받았던 엑스죤은 정보통신윤리위원회로부터 ‘유해마크 표시’와 ‘형사처벌’ 중의택일을 강요받던 끝에 ‘자진폐쇄’의 방법으로 항의를 표시했다.

인터넷 검열 현실화에 대한 사회단체들의 항의행동도 거셌다. 7월 통신질서확립법이 발효되자, 국내외 500여 홈페이지가 초유의 사이트 파업을 단행한데 이어, 10월 22일부터 명동성당에서는 사회단체들의 60일 릴레이 단식농성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또한 새사회연대 이창수 대표는 11월 27일부터 현재까지 정보통신부 앞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을 전개하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권 공론화

매년 5백여 명에 이르는 청년들이 양심의 자유를 실천하기 위해 ‘군복무’가 아닌 ‘감옥살이’를 선택하고 있다. 올해 초 ‘여호와(의) 증인’의 집총 거부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한국사회에서는 최초로 ‘양심적 병역거부’가 공론화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물꼬를 튼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은 인권․평화운동과 만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4월 천정배 의원은 양심의 자유와 소수자 보호 원칙을 앞세우며 양심적 병역거부권의 입법 추진 안을 밝혔다. 그러나 반공과 군사문화에 길들여진 사회에서 이들의 활동은 즉각 반격을 받았다. 보수적인 기독교단은 성명서를 통해 여호와(의) 증인의 양심적인 병역거부가 이단 종파의 주장이라며 법안 발의에 제동을 걸었다. 이어 경찰 사이버범죄수사대도 징병거부와 군대거부 자체가 반사회적 행위라고 규정했고,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사이트 폐쇄를 운영자에게 요청했다.

이는 ‘양심적인 병역거부’를 ‘사상․양심․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인권으로 인정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흐름과 반한다. 올해 10월 방문한 국제앰네스티 조사단은 1천 6백여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양심수라며 석방을 요구했으며, 9월 14일 ‘여호와의 증인’ 변호인단은 양심에 따른 집총 거부가 헌법에 위반되는지 가려달라는 신청서를 육군고등군사법원에 제출했다.

하지만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란 여전히 국방부에겐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것. 법무부 또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이 가야할 길은 멀다.


인간성을 향한 투쟁 - 레미콘 노동자…

“인간답게 살고 싶다. 노동조합을 인정하라.” 70년대 얘긴가 싶은 요구를 내걸고 레미콘 노동자(전국건설운송노조)들은 싸웠다. 오랜 투쟁을 벌였지만, 그들의 현실은 지금도 여전히 70년대에 머물러있다.

레미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한 것은 4월 10일. 사업주들이 레미콘 노동자들은 “근로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라며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부당해고와 폭력를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사업주의 부당노동행위는 그치지 않았고, 파업농성마저도 구사대와 용역깡패를 동원해 짓밟았다. 특히 레미콘 연합회 회장이자 유진기업 대표이사인 유재필이 그 선봉에 섰다.

정부는 이러한 사업주의 불법행위를 묵인할 뿐이었다. 대신 노동자에게 돌아온 것은 구속 11명, 불구속 60여명, 즉결 40여명. 이뿐 아니라 여의도공원에서 ‘노숙투쟁’을 하던 노동자들은 2000여명의 경찰이 휘두르는 해머와 도끼의 공포를 경험해야 했다.

150일 넘게 지속된 파업은 안타깝게도 타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오랜 파업으로 생계유지가 어려워 노조를 인정해달라는 최소한의 요구마저 보류한 채 일터로 돌아간 노동자들에게 사용자들은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노조파괴 공작을 펼쳤다. 노동자들의 집단단식, 변호사․지식인 및 사회단체들의 농성, 한 노동자의 죽음도 공권력과 사업주의 질긴 유착을 끊어낼 순 없었던 것이다. 레미콘 노동자들은 부당한 대우를 당하면서 불안정한 일자리에 자신을 의지해야 하는 수많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일부다. 바로 오늘도 한국통신계약직, 캐리어 사내하청, 인사이트 코리아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달픈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