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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보안관찰자라는 ‘붉은 낙인’

[기획] 차별금지법안 뜯어보기 (14) 보안관찰법

지난 10월 2일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했다. 성별, 장애 등을 이유로 고용 등 다양한 차별영역에서 벌어지는 차별행위를 금지하면서 피해자 구제 절차를 담고 있는 이 법안은 최초의 종합적인 차별금지법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다양한 소수자들의 경험을 온전하게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과 함께 성적지향 등 다수의 차별사유를 제외함으로써 차별금지법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 또한 존재해 우려를 더하고 있다. <인권오름>은 그동안 반차별 운동을 해온 활동가들의 연속기고를 통해 정부의 차별금지법안이 과연 다양한 ‘소수자들’의 차별 현실을 바꾸고 반차별 의식을 확산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 점검한다. <편집인주>


이 노래를 기억하는가.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방울들/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디로 데려갈까/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무엇이 이 숲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많은 이들의 귀에 익은 이 노래의 제목은 <아름다운 것들>이다. 70년대, 방의경은 작고 여린 것들에 대한 연민을 담아 맑고 낮은 목소리로 노래했다. 이것조차 못마땅했던 독재 권력은 그의 음반을 판매금지 시켰고, 결국 그는 미국으로 떠났다. 숨 막히는 어둠의 시절, 가녀린 숨결처럼 이어지던 이 슬픈 노래의 2절은 이렇다.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는/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음 어디로 가야 할까/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무엇이 이 숲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나는 차별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이 노래가 생각난다.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이슬방울’이나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작은 새’ 같은 존재들에게 빗줄기가 몰아치고 바람은 거세게 불어 닥친다. 작고 힘없는 존재를 크고 강한 존재들이 짓밟는다. 그렇다. 차별은 결국 힘, 권력의 문제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에 걸친 권력의 문제이며,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일체의 폭력 문제이다.

‘재범의 위험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이른바 피보안관찰자이다. 법무부는 지난 9월 보안관찰심의위원회를 열어 나에 대한 검찰의 보안관찰처분 청구를 받아들여 이렇게 결정했다. 나에게 날아온 결정통고서에는 어떤 이유도 적시돼 있지 않다. 검찰의 청구가 ‘이유 있다’는 이유 외에는. 이로써 나는 2003년 4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년 9개월 간 복역하고 출소한 이래, 보안관찰처분 대상자 신분으로 있다가 비로소 피보안관찰자로 재낙인 찍혔다. 그 낙인에는 ‘재범의 위험성’이 있는 ‘사상이 불온한 자’라 새겨져 있다. 죽을 때까지 그 붉은 낙인은 지워지지 않는다.

보안관찰법은 주로 국가보안법상의 범죄 등을 행한 국사범 또는 사상범에 대하여 “재범의 위험성을 예방하고 건전한 사회복귀를 촉진하기 위하여” 보안관찰처분을 부과하기 위한 법이다. 이 법은 일제의 ‘조선인사상범보호관찰령’ 에 뿌리를 둔 사회안전법이 1987년 폐지되면서 하위지침으로 대체 제정되었다. 보안관찰의 내용은 각종 신고, 지도, 조치의 준수이고 대상자 및 피처분자가 신고를 이행하지 않거나 조치에 불응한 때에는 형벌을 과한다.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아도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나를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도 법이라 부를 수 있는가.

법은 이미 나에게 출소 전부터 대상자 신분으로서의 신고의무를 부과했고, 그동안의 ‘관찰’을 통해 ‘재범의 위험성’이 있다고 결정했다. 피보안처분자로서의 나는 이제 지난 3월 간의 주요활동 사항, 통신·회합한 다른 보안관찰처분대상자의 인적사항과 일시, 장소 및 내용, 3월 간에 행한 여행에 관한 사항, 관찰경찰서장이 보안관찰과 관련하여 신고하도록 지시한 사항 따위를 신고해야 한다. 출소 후 나는 4년 8개월 동안 보이지 않는 족쇄를 차고,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야만 한단다. 이유는? 법이 그렇게 돼 있으므로.

저강도 길들이기

이미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나 같은 사람에게 가해지는 이 가혹한 법의 목적은 무엇일까. 나는 이를 ‘저강도 길들이기’라 규정한 바 있다.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과 감금, 박탈이 고강도 길들이기라면, 저강도 길들이기는 간접적인 공권력의 행사를 통해 정신적·심리적 굴복을 유도한다. 한마디로 국가가 정해 놓은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상이나 신념체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 안 듣는 자의 ‘대가리를 숙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일상적이고 소소한 감시와 처벌의 위협. 그것은 이마 위로 쉬지 않고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 같은 것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몇 대목을 옮겨보자.

나는 출소 후 두 차례 이사를 했다. 이는 보안관찰법상 관할 경찰서와 검찰이 세 번 바뀌었다는 뜻이다. 서울 송파구 잠실에 살 때는 송파경찰서,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했을 때는 일산 경찰서, 지금 살고 있는 서울 은평구 신사동의 서부경찰서 순으로 바뀌었다. 이사를 할 때마다 나에게는 거주 이전 신고와 함께 변동사항 신고를 따로 해야 한다. 나는 알 수가 없다. 동사무소에 이미 이전 신고를 했는데 왜 또 경찰서를 찾아가 “저 이사 왔어요”하고 신고해야 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더 알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일산시 서구 대화동에 살 때였다. 내가 살고 있는 다가구주택 단지 경비원이 들려준 얘기인데, 하루는 일산서 소속 경찰이 찾아와서 나의 차량 종류와 번호를 물었고, 관리사무소에 들러 (나를 알지도 못하는 직원에게) 나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는 것이다. 또 한 번은 집으로 전화를 걸어 내 아들에게 나의 휴대전화 번호를 물었다. 정말 나의 차량 종류와 번호, 휴대전화 번호가 그렇게 궁금했을까. 그토록 알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자신들의 권한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왜 그리 번거롭게 하는 것일까.

지난해에는 대형운전면허를 취득할 일이 생겼는데 마침 일산경찰서 담당 형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취득 여부를 물었더니 기소중지 상태라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조사를 받고 처벌을 받아야 응시 자격이 생긴다고 해 고민 끝에 조사에 응하지 않고 시험을 봐서 결국 합격했다. 그때 마침 지갑마저 잃어버린 상태라 면허증이 발급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체포영장을 발부했다가 시효 만료로 소멸된 상태였다. 남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이런 일에도 나는 몇 주, 몇 달씩 고민하며 긴장해야 한다.

최근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내 아내는 은평구 신사동에서 빵집을 경영하고 있는데 어느 날 서부경찰서 형사가 불쑥 찾아와서는 “김경환씨 잘 있냐, 요새 뭐하냐”고 물었다. 당황한 아내가 “영업하는 가게에 와서 지금 뭐하는 거냐”고 항의하자 “그냥 궁금해서 와 봤다”며 물러갔다. 이 얘기를 전하면서 아내는 눈물을 글썽거렸는데, 이미 4년의 감옥살이로 지치고 피폐해진 집안에 한바탕 풍파가 몰아쳤다. 국가는 나의 ‘건전한 사회 복귀’를 촉진한다면서 왜 이런 일을 지치지도 않고 되풀이 하는 것일까.

나는 출소 이래 지금까지 보안관찰법이 요구하는 어떤 것도 거부해 왔다. 백번을 고쳐 생각해도 그 법이 부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내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비협조하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눈에는 ‘개기는 것’으로 비치는 듯하다. 경찰, 검찰, 법무부는 끈질기게 나에게 전화를 걸고, 등기우편물을 보내고, 출석을 요구한다. 마치 자신들의 존재를 잊지 말라는 듯이. 어떤 말로 대신하더라도 그들은 나에게 “까불면 다쳐!”라고 위협하고 있다. 내 개인에 대한 범죄의 예방이 목적이 아니라 “개기면 너희들도 이렇게 당하는 거야!”라는 광범위한 사상 통제적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의 요구는 아주 간단하다. 제발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내가 죄를 지을지 안 지을지는 하느님도 모른다. 하느님도 모르는 일을 국가는 어떻게 안다는 것일까. 그들은 내가 보안관찰법상의 신고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으므로 재범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면 내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하면 그때 처벌하면 되는 것이다. 헌법이 부여한 기본권의 제한이나 일상적인 감시와 처벌의 권한마저 국민이 국가에 부여한 것은 아니다.

차별금지법안과 보안관찰법

최근 차별금지법이 한국사회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성별과 연령, 장애와 성적 지향 등에 따른 차별은 분명 부당하다. 그렇다면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한 처벌이 끝났는데도 그 전력을 빌미로 ‘재범 위험성’을 추정하고 일상적인 감시와 괴롭힘이라는 반복적인 처벌을 감행하는 제도도 분명 도마 위에 올라야 한다. 지난 12월 12일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차별금지법안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예방”한다면서 국가에게 “이 법에 반하는 기존의 법령, 조례와 규칙, 각종 제도 및 정책을 조사·연구하여 이 법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시정”(제9조)할 의무를 부여했다. 그런데 금지되는 차별사유에서 ‘범죄 및 보호처분의 전력’은 법무부 입법예고에는 포함되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최종 통과될 때는 삭제되었다. 정부는 무엇이 두려운가?

나는 국가보안법이 북한을 적대시하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점에서 악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만 번 양보해서 한반도의 특수성 때문에 존립할 수 있다고 이해는 한다고 치자. 그러면 그 새끼법인 보안관찰법의 존립 근거는 무엇인가. 국가 안보나 사회 안전과는 아무런 연관도 실효도 없다. 이미 더 강도 높고 정교한 법들이 존재하지 않는가. 민주주의 진영의 어떤 나라도 사상과 양심을 처벌한 후, 이를 근거로 다시 처벌하는 나라는 없다. 일제의 잔재이자 냉전의 유물인 보안관찰법,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침해하는 반인권법인 이 법은 근대문명과 민주주의의 수치로 기록될 것이다. 소수자들의 연대와 비협조, 끈질긴 저항을 통해 반드시 이 ‘법 아닌 법’을 폐지해야 할 것이다.
덧붙임

◎ 김경환 님은 월간 <말> 기자로 일하던 중 이른바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으로 복역했으며 출소 후 보안관찰제의 폐지를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