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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 차별당하고 있는 거니?”

[기획] 차별금지법안 뜯어보기 (2) 청소년

지난 10월 2일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했다. 성별, 장애 등을 이유로 고용 등 다양한 차별영역에서 벌어지는 차별행위를 금지하면서 피해자 구제 절차를 담고 있는 이 법안은 최초의 종합적인 차별금지법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다양한 소수자들의 경험을 온전하게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과 함께 성적지향 등 다수의 차별사유를 제외함으로써 차별금지법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 또한 존재해 우려를 더하고 있다. <인권오름>은 그동안 반차별 운동을 해온 활동가들의 연속기고를 통해 정부의 차별금지법안이 과연 다양한 ‘소수자들’의 차별 현실을 바꾸고 반차별 의식을 확산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 점검한다. <편집인주>


차별금지법안과 청소년인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려다보니, 처음으로 든 생각은 과연 차별금지법안을 청소년인권 문제와 연결시켜서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이었다. 차별금지법안에 ‘나이’라는 차별사유가 들어간 것은 분명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과연 이 법안을 만든 사람들이 이 ‘나이’라는 말을 넣을 때 청소년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얼마나 고민했는지는 의심스럽다. 혹시 단지 채용시험 때 연령제한이라거나 뭐 그런 것들만 생각하고 그 단어를 넣은 건 아니었을까. ‘(어린이+)청소년’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차별들에 대해서는 과연 얼마만한 고려가 있었을까.

어느 학교 교실의 급훈 사진. 이런 말을 들어도 그냥 참아야 하는 집단, 그것이 청소년이다.

▲ 어느 학교 교실의 급훈 사진. 이런 말을 들어도 그냥 참아야 하는 집단, 그것이 청소년이다.



이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들이 받는 여러 차별적 대우를 당연시하고 있는 그 자체가 가장 큰 차별인 건지도 모른다. 심지어 차별을 당하는 당사자들인 청소년들 중 상당수도, 뻔히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대우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내가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면서 만나본 청소년들은, 모임에 와서 토론을 하다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말하곤 한다. 이게 굉장히 일상적인 건데 기분은 나쁘다고. 근데 이게 차별이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그런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같은 것에 대해서 누구는 차별이라고 하고 누구는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차별이라고 느끼는 청소년도 종종 긴가민가해서 그걸 누군가가 확인해주길 바란다. “나, 지금 차별당하고 있는 거니? 그런 거니?”

차별의 일상

‘미성년자’(아직 성인이 아닌 사람)를 분리하고 규정하는 것 자체에 차별의 소지가 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청소년들의 일상은 차별투성이다. '미성숙'하다고 규정당하면서 그 신화 속에서 여러 권리를 다 제한당하고 있는 것이다.

군대와 같은 특수하게 반인권적인 경우까지도 포함해서 사회의 그 누구에 대해서도 허용되어 있지 않은 인권침해인 ‘체벌’이 유독 가정과 학교, 학원 등에서 청소년에 대해서만 허용되어 있다. 조금씩 완화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가해지는 두발규제는 학교 밖의 청소년들도 자신을 자유롭게 꾸미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사회적 압력을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영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소지품 수색이나 압수가 학교에서는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다. 청소년들의 정보는 네이스(NEIS, 교육행정정보시스템)를 통해서 부모나 가족들이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학교 운영에 대한 학생들의 참여는 극히 제한되어 있어서 교장이나 일부 교사들의 온정에 의존해야 한다. 학교의 잘못된 규칙과 방식에 항의하고 이를 바꾸려고 한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부당한 징계나 불이익 등도 모두 차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선거권/피선거권 자체의 연령제한이 차별인지 아닌지는 한 발 양보해서 논외로 하더라도, 단지 선거권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정당가입도 불법이고 선거운동도 불법이다. 얼마 전에는, 선관위가 ‘미성년자’는 선거권이 없으니까 선거 관련해서 UCC를 올리는 게 불법이라고 선포하기까지 했다. 학칙에서조차 정치적 활동을 하는 것을 징계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어쩌면 선거권/피선거권이 연령에 따라 정해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서는 대의제에 중심을 둔 정치제도 자체가 차별을 낳는지도 모른다. 사법적으로도 청소년들이 뭔가를 해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호자의 동의를 얻게 되어 있는 것 등도 청소년들이 사회경제적으로 보호자에게 종속되어 있는 현실과 함께 차별의 소지가 있다.

11월 3일 ‘학생의 날’에 청소년 인권활동가들이 명동에서 진행한

▲ 11월 3일 ‘학생의 날’에 청소년 인권활동가들이 명동에서 진행한 "살아있다고 사기 치지 마!" 행사. 청소년은 판단력이 없으니까, 생각 없이 관에 들어가서 좀비 노릇이나 하라는 사회. 그러나 청소년은 과연 '미성숙'할까?



그뿐인가. 나이 서열화가 일상적인 사회에서 나이가 적은 어린이·청소년들은 공적인 자리에서나 초면인 사람에게조차 하대를 듣는다(물론 이는 어린이·청소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일할 때도 가끔은 “미성년자니까”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더 안 좋은 노동 조건을 요구받기도 한다. 청소년들을 ‘선도’하고 ‘보호’한다는 말로 피시(PC)방, 찜질방 기타 등등 여러 장소의 출입을 차별적으로 제한하고 있으며 영상물이나 책 등 다양한 매체에의 접근도 나이를 근거로 가로막고 있다.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금융거래나 여러 가지 계약 체결 등에서도 ‘보호자 동의서’를 받아오라며 제약이 따르는 것도 차별로 작용한다. 최근에는 공립 도서관에서 청소년들의 이용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도 하는데, 국회 도서관 등에서는 이미 예전부터 청소년들의 이용이 제한되어 왔다.

‘미성숙’은 없다

청소년들이 '미성숙'하기 때문에 권리를 제한받아야 한다는 것은, '미성숙'이 권리 제한의 사유가 되기도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성숙'과 '미성숙'을 규정하는 게 일방적이란 점에서도 부당하다. 인간은 삶 전반에 걸쳐 계속 변화한다. 변화에 ‘성장’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우열을 따져볼 수 있는 건 특정한 기준에 의해서만 가능한데, 생물학적 판단이 아니라 가치판단의 측면에서 그 기준을 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성장기에는 뇌가 얼마만큼 ‘발달’했고 호르몬이 어떻고 떠들 수는 있지만, 어떤 상태가 더 ‘완전’하거나 더 ‘올바른’ 것인지 사회적인 가치판단은 딱 잘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하면 인간은 언제든 불완전하고, 다르게 말하면 어느 순간에든 ‘나’는 ‘지금 여기의 나 자신’으로서 완전하다. 비청소년이라고 해서 더 올바른 판단을 내리거나 더 나은 결정을 내린다고 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은 사회·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약자이며 경험이 부족해서 판단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청소년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사회·경제적 약자인 것은 대부분 지금의 사회 구조가 청소년들을 그렇게 조건지운 것이다. 예를 들어, 청소년들의 노동을 제한하고 생활에 필요한 최저 비용을 보장해주지 않는 사회 구조는 청소년들을 경제적 약자로 만든다. 청소년들을 사회에서 따로 떨어뜨려 놓고 여러 가지 경험을 쌓을 기회를 박탈하는 조건에서 청소년들에게는 사회적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는 것도 난센스다. 심리학자인 로버트 엡슈타인 박사는 ‘10대’들이 판단력이나 책임감이 부족한 듯이 보이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회가 그들을 어른들과 격리시켜 행동을 통제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재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소위 ‘청소년유해환경’이란 것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유해’한 환경이 있다면 그 환경을 없애는 것이 사람들을 통제하고 규제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향이 아닌가? 청소년들에게만 ‘유해’하고 비청소년들에게는 별로 ‘유해’하지 않은 것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청소년들에게 해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개 ‘모든 인간’에게 해로운 것이다. 어린이·청소년이라고 해서 비청소년과 본질적으로 다르진 않다. 보호받을 권리는 모든 인간에게 있지만, ‘보호’를 명목으로 기본적인 자유와 자율성, 권리를 제한한다면 그것은 권리로서의 보호가 아니라 일방적인 억압일 뿐이다.

청소년 유해환경, 청소년출입금지 구역…, 온갖 무시무시한 이름들. 언제까지 뒷문으로만 다녀야 할까? 언제까지 밤 10시만 되면 피시방에서 쫓겨나야 할까?

▲ 청소년 유해환경, 청소년출입금지 구역…, 온갖 무시무시한 이름들. 언제까지 뒷문으로만 다녀야 할까? 언제까지 밤 10시만 되면 피시방에서 쫓겨나야 할까?



하지만 이런 비판이나 주장들은, 주류적인 통념 앞에서 너무나 힘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소년들은 ‘미성숙’하고, 판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교육’과 ‘선도’와 ‘보호’를 위해서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차별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차별금지법안은 시작일 뿐

그렇기에 차별금지법안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우선은 걱정이 앞선다. 예를 들어, 입법예고된 차별금지법안을 보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이 법에 반하는 기존의 법령, 조례와 규칙, 각종 제도 및 정책을 조사·연구하여 이 법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시정하여야 함”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과연 이 법이 시행되고 나서 교육상 불가피한 경우에는 체벌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초중등교육법시행령이 없어질지는 의문이다. 청소년보호법이나 영상물에 등급을 매기는 제도 같은 게 폐지되거나 전면 개정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얼마 안 있으면 현행 청소년보호법을 비롯한 청소년 ‘선도’ 정책이 갖고 있는 차별적 요소라거나 학교에서의 인권침해 등에 대해서, “특정 직무나 사업 수행의 성질상 불가피한 경우”라고 유권해석이 떨어질 것만 같다. 정치적 활동에 대한 제한이나 민법적인, 사법적인 제한 등도, 청소년들은 아직 ‘미성숙’하기 때문에 모두 ‘합리적’이라고 할 것 같다. 나는 이런 식으로 청소년에 대한 많은 차별들이 합리적인 차별로 생각되고 정부나 법원 등을 통해서 더욱 더 정당화되지는 않을까 두렵다.

그런 점에서,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차별금지법안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차별금지법안 입법예고는, 차별의 종식보다는 그 법안에서 말하는 ‘차별’이 무엇이고 이를 ‘금지’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 내용을 놓고 주고받게 될 공방을 예감케 한다. 여성들이, 장애인들이,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이 사회에서 불평등하게 차별받고 있다는 것을 인지시키고 이를 바꾸기 위해서 투쟁했던 그 긴긴 역사를, 본격적으로 등장한 지는 얼마 안 된 청소년인권운동은 이제야 시작하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발전적이고 적극적인 운동으로

차별금지법안의 제정은 청소년인권에 대해 고민하고 운동하는 입장에서는 하나의 시작일 뿐이다. 차별금지법안이 실질적으로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들을 없애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는, 법안의 문구나 개념에 대한 발전적이고 적극적인 해석과 적용이 필요하다. 적어도 현재의 사회통념과 개념을 따른다면 차별금지법안은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는 데는 별다른 성과를 내기 어렵다.

차별금지법안이 차별에 대한 이 사회의 감수성을 향상시키고 차별금지에 대한 의식을 확산시키는 것을 하나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차별금지의 영역과 개념을 확장하려고 시도해야 할 것이다. 법안의 입법·해석·적용을 적극적이고 발전적인 것으로 만들고 사회통념과 구조 자체를 바꾸어나가는 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차별금지법안의 제정은, 청소년인권운동가들이 더욱 법안에 의존하지 않는 적극적이고 발전적인 운동을 해나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덧붙임

◎ 윤종=공현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