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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문헌읽기] 인권과 검사 (니콜라스 코디리, 2001)

얼마 전 취임한 검찰총장(한상대)의 취임사가 화제가 됐다. “종북좌익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한다”며 ‘전쟁’, ‘응징’, ‘제거’, ‘싸움’ 등 군대 전투 교본에 쓰일 법한 단어를 엄청 써댔기 때문이다. 병역면제, 위장전입, 탈세, 부동산 투기 등 현 정부 공직자들의 필수스펙을 갖췄다는 것 따위에는 더 이상 눈길도 가지 않았다. 그런 것들에 대한 분노보다는 공포가 먼저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의 취임사는 나를 20여 년 전의 검사 책상 앞으로 다시 불러갔다.

대학 4학년 때였다. 보안과 소속 경찰들이 대학가 복사집 휴지통을 뒤져 찾아낸 ‘위험’한 폐지를 증거물로, 복사집 앞에서 경찰차도 아닌 택시로 대기하고 있다가 나를 낚아챘다. 소위 위험한 폐지 속에 담긴 생각들이 북한의 주장과 같다는 혐의였다. 그 폐지에는 학교 주변의 지나친 상업화와 외래화(소위 미국화)에 대한 걱정 등을 친구들과 토론하여 적은 글이 담겨있었다.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연행사실은 전혀 통고되지 않았다. 한 신문에서 북한을 추종한 대학생이 잡혔다고 1면 하단에서 보도했다. 신문 보도를 보고서야 지인들은 내 연행사실을 알았다. 경찰의 심문에 따졌다. 내가 진달래꽃이 예쁘다고 말하는데 북한에서도 진달래꽃이 예쁘다고 하면 북한을 추종하는 거냐고.

삼일 후에 불구속으로 풀려났으나 사건 종결을 위해 검사 앞으로 불려가야 했다. 반말을 찍찍 던지며 허튼짓 하지 말라고 호통 치던 그의 책상 유리에는 전국 공안검사 조직도가 반듯이 끼어있었다. 검사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그 조직도를 계속 노려봤다. 저 조직도에 있는 엄청난 수의 공무원들이 매일 나에게 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고 있다는 것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검사 책상 옆 벽에는 공안수배자 사진이 담긴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거기 담긴 여러 대학교 학생회장들의 얼굴들이 나를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군사독재 시절에나 통했을 공포 취임사가 20여 년이 지난 지금, 문민을 지나 소위 CEO(씨이오) 대통령이 있는 사회에서 왜 필요한 것일까?

인권운동을 하는 나에게 몇 년 전 은행에서 경찰이 내 신상정보를 요구해 가져갔다는 연락이 왔다. 찾아서 따져보니 국정원 어느 분실에서 와서 가져갔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공개적인 인권활동을 하는 나에 대해 수사할 일이 없었다. 수사를 하려면 명확한 혐의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고소, 고발을 했으나 검찰에선 받아들이지 않았고 재판에서도 나에게 왜 내사를 받았는지를 증명하라 했다. 그런 일로 검찰청에서 우편물이 오가던 때인지라 소위 검찰청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검찰청입니다’란 말에 메시지를 확인하려면 9번을 누르라는 지시를 따랐다가 거금의 전화요금이 떨어졌다. 보이스피싱 피해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으나 아무런 결과 통보도 받지 못했다. 그런 명백한 범죄에 대해 할 일도 많을 텐데 왜 법조문에도 나와 있지 않을 ‘종북좌익’이라는 범죄를 굳이 만들어 ‘전쟁’까지 하려드는 것인지, 권위를 위해 숫자를 늘리지 않아 엄청난 과로 속에서 일하는 직군이라는데 법조문에 없는 범죄까지 만들어 굳이 일을 더 많이 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일전에 검사 스폰서 사건이 터졌을 때, ‘검사의 역할에 관한 유엔 가이드라인’을 소개한 일이 있다. 오늘은, 유엔 가이드라인보다는 동급의 스펙을 갖춘 같은 검사들의 얘기라면 좀 통할까 하여 호주 검찰청장을 지내고 1999년부터 2005년까지 국제검사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Prosecutors)의 대표를 했던 ‘검사’의 얘기를 끌어왔다. 제목이 ‘인권과 검사’이다.

이글에서 넬슨 만델라의 자서전을 인용한 부분은 내게 이렇게 읽혔다.

“정부를 비판하는 시민은 ‘종북좌익세력’, 정부와 다른 의견을 가진 시민은 ‘종북좌익세력’, 아이들에게 보편적 급식을 주장하는 사람은 ‘종복좌익세력’, 4대강 사업을 반대하고 수해대책을 비판하는 사람은 ‘종북좌익세력’, 대량신상정보유출에 주민번호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은 ‘종북좌익세력’, 희망버스를 타는 사람은 ‘종북좌익세력’, 재벌을 비판하고 노동자 옹호하는 사람은 ‘종북좌익세력’이다.
자유로운 생각은 범죄,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범죄, 일인시위도 범죄, 두 명 이상 모여도 범죄, 불경한 트위터 계정을 갖는 것도 범죄, 직업이 없는 것은 범죄, 비정규직인 것은 범죄, 일하다 해고되는 것은 범죄, 가난한데 아픈 것은 범죄, 가난한데 대학 다니는 것은 범죄, 반값 등록금 요구하는 것은 범죄”

남아공 법무장관의 글은 또 이렇게 읽혔다.

“검사들은 빈부격차와 양극화 심화 체제의 일환이다. 검사들은 사회와 기본적 인권의 보호자들이 아니라 종북좌익세력의 딱지를 붙여 정부비판을 단속하는 체제의 사수자이다. 공정은 사법 제도에서 금기가 됐고 기득권층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 장애물로 간주된다. 그래서 국제인권법이 불법화한 법적 관행들이 규범이 됐고 많은 시민들을 협박하고 처벌하는 근거규범이 됐다.”

‘공포 취임사’가 아니라 인권옹호를 다짐하는 취임사를 보고 들을 수 있는 날을 기대하는 것도 ‘종북좌익세력’의 꿈인가.

인권과 검사(니콜라스 코디리, 2001)

“형법은 그 나라 최상의 변호사들을 매혹해야 한다. 어떤 법 분야도 그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형법은 공정한 재판과 법의 지배가 전국의 법정에서 매일 시험받는 곳이다. 그리고 나쁜 짓을 저지른 자의 공포가 기본적 인권에 대한 존중과 만나는 곳이다.”(커비 제이, 호주 고등법원)

호주 연방 검찰청의 20차 연례 회의에서 2000년 6월 호주 법무장관 모리스 로젠버그는 말했다. “검사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어렵다. 그 의무는 견고한 전문적 판단과 법률적 유능함, 상당량의 실생활 경험과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일할 능력을 요구한다. 모두가 이런 일을 할 수는 없다. 더욱이 모든 사건에서 정답을 보장할 비결은 전혀 없다. 많은 사건에서 누가 합리적인 사람인지는 다를 수 있다. 확실성과 절대적 진실을 기대하는 검사는 일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검사 재량의 행사는 정확한 과학이 아니다. 문제가 많고 복잡할수록 실수할 여지가 커지기 마련이다.”

로젠버그는 또한 신중하고 공정하게 행동할 검사의 의무와 공익이 요구하는 바를 고려할 것을 언급했다. … 적어도 지난 50년 동안 검사들에게 점차적으로 요구된 바는 검사의 어려운 의무의 행사를 형사 사법 절차와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인권보호와 준수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은 그것을 요구한다. 1966년의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은 그것을 상세화하고 있다. 국제검사협회의 기준은 그것에 즉각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고 강제하고 있다. 1993년 세계인권대회의 비엔나 선언과 행동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이 주목했다.

“법 집행과 검찰기관 그리고 특히 독립적인 법관과 법률 전문직을 포함한 사법운영은 국제인권규범에 담긴 기준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인권의 완전하고 비차별적인 실현에 필수적이며 민주적 절차와 지속가능한 발전에 필수불가결하다.”


다음의 명제들은 또 다른 다양한 성명에서 나온 것들이다.
1. 형사법을 이행하는 검사들은 아주 공정하게 해야 한다. 형사적 기소 과정의 궁극적 목적은 공정한 재판이며 사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피고인에게 공정한 것이다. 공정함은 정확하게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 법률 체계 전반에서 성취돼야 하는 것이다.
2. 검사들은 형법제도에서의 위치와 역할 때문에 인권을 보호하는 데 특히 강력한 위치에 있다. 보통법 체제에서는 경찰에 대한 감독 역할이 거의 없지만, 검사들은 불법적 또는 부적절하게 획득한 증거 사용을 다루는 태도에서나 보강 수사에 대한 경찰 조언에서 재판 과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대륙법 체제에서는 검사들이 행사하는 준사법적 권한으로 피의자(그리고 관련자 누구나)의 권리가 충분히 보호될 수 있도록 보장할 수 있도록 착수 때부터 수사를 감독할 수 있다.

… 2000년 국제검사협회가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서 연례회의를 가졌다. 남아공은 인권을 이해하는 나라이다. 아주 오랫동안 시민 대다수에게 권리를 박탈해온 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탈취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고통 받은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넬슨 만델라는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에서 구 남아공에 대해 썼다.

“아프리카 아동은 ‘아프리카인 전용’ 병원에서 태어나 ‘아프리카인 전용’ 버스로 집에 가고 ‘아프리카인 전용’ 지역에서 살고, 설령 학교에 갈 수 있다면 ‘아프리카인 전용’ 학교에 다닌다. 그 아이가 자라면 ‘아프리카인 전용’ 직업을 가질 수 있고, ‘아프리카인 전용’ 마을에서 집을 빌리고, ‘아프리카인 전용’ 기차를 타며 낮이건 밤이건 언제고 멈춰 세워지고 신분카드를 제시할 것을 명령받는다. 그게 없으면 체포되고 감옥에 던져질 수 있다.
‘백인 전용’ 문으로 드나드는 것은 범죄, 백인 전용 버스를 타는 것은 범죄, 백인 전용 식수대를 사용하는 것은 범죄, 백인 전용 해변에 들어가는 것은 범죄, 밤 11시 이후 거리에 있는 것은 범죄, 신분증명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범죄, 신분증명서에 틀린 서명을 한 것은 범죄, 실업자인 것은 범죄, 잘못된 곳에 고용된 것은 범죄, 특정 장소에 사는 것은 범죄, 살 곳이 없는 것도 범죄였다.”

남아공의 법무장관인 마두나 박사는 우리의 회의를 위해 이렇게 썼다.

“법원 또한 억압의 장치로 사용됐다. 검사들은 백인의 특권과 세뇌를 유지하는 사법 체제의 일환이었다. 검사들은 사회와 기본적 인권의 보호자들이 아니라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차별정책) 체제의 사수자였다. 공정한 재판의 이상들, 침묵할 권리, 법률적 변호, 피고인이 적절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문서들은 사법 제도에서 금기가 됐고 백인의 특권을 유지하는데 장애물로 간주됐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불법화된 법적 관행들이 재판의 규범이 됐고 많은 피고인들이 유죄가 되고 심지어 사형당하는 근거규범이 됐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 남아공은 잘못될 수 있는 것의 극단적 사례이며, 여기에 다른 나라들과 미래의 모든 곳에 대한 교훈이 있다. 그때 그런 식으로 인권을 바라봤던 검사들과 다른 공무원들은 틀림없이 지금은 자신들의 인권이 충분히 존중되고 법의 지배에 따라 다뤄지기를 원할 것이다. …

틀림없이 검사직을 수행하는 데 인권을 방해물로 생각하는 검사들이 여전히 있다. … 아무리 편리할지라도 “이기려는” 검사의 의도는 직간접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을 벌일 수 있다.
- 제한 없이 범죄를 수사하거나 수사를 지도한다. 어디나 갈 수 있고 무엇이건 수색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죄다 감시 장치와 전화 도청으로 감시하고 듣고 누구나 심문하고 구금하고 재산을 압수한다.
- 마음대로 용의자를 구금하고 보석(또는 조건부 석방)을 거부한다.
- 제한 없이 용의자를 심문하고 대답을 요구한다.
- 법률 자문에 대한 용의자의 접근을 방해한다.
- 사회질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밑을 파고 파괴한다. 소위 “문제 야기자”들을 표적삼고 제거하려 한다. …
- 진행여부를 결정함에 있어 정치적 압력에 굴종한다. …
- 피고인에 대하여 재판에 앞서 해로운 선전을 유포하도록 언론을 선동한다. …
- 피고인의 묵비에서 유죄를 추정한다. …

이런 시스템이 작동하는 곳에서 우린 뭘 얻을 것인가? 구 남아공이나 과거의 독재로 악명 있는 특정 체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심지어 오늘날에도 일부 국가에서 그런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이 처벌받지 않고 작동하는 것을 무엇으로 방지할 것인가? 인권이다. 즉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의 9조(신체의 자유와 안전), 10조(구금된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받을 권리), 14조(재판의 평등/무죄추정의 원칙 등), 17조(프라이버시를 존중받을 권리), 19조(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 등의 조항들에 반영돼 있는 권리들이다. 이런 권리들은 형사법 체제가 침해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며 모든 나라의 국내법에 반영돼야만 한다. 인권이 없는 법과 질서를 갖는 것은 가능하지만 법과 질서 없이 인권을 갖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인권 조항은 형사 재판이 수행되는 방식에 실제적인 효력을 갖는다. 인권의 원칙들은 실체적인 절차법으로 효력을 발해야만 하고, 검사들의 의지로 그 원칙들이 이행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소망은 내부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인권은 추운 밤 우리가 끌어당겨서 따뜻하고 안전하게 덮을 수 있는 부드럽고 복슬복슬한 것이 아니다. 인권은 소수 좌경 세력만이 준수하는 그런 게 아니다. 인권은 형사법 체제나 법 실천에 선택적으로 추가하는 부속품(그러고 싶을 때만 끼워 넣는)이 아니다. 인권은 기본적인 것이다. 검사들은 인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인권은 우리에게도 속한 것이며 때때로 검사들도 인권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 …

결론적으로 다시 남아공으로 되돌아가본다. 1964년 6월 12일, 넬슨 만델라에게 종신형을 선고한 판사(Quartus de Wet)는 “두려움과 선호와 편견 없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남아공의 법과 관습에 따라 법을 집행하겠다”는 사법 선서를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만델라에 대한 종신형 선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법원의 기능은 다른 나라들 법원의 기능처럼 법과 명령을 집행하고 국가가 그 안에서 기능하고 있는 법률들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지만 정의는 어찌됐나? 민주주의에서 법률이란 법의 지배(rule of law) 원칙에 따라 만들어져야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정치권력집단에 의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법의 지배는 기본적 인권을 무시하지 않는다. 검사들 또한 인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