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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디지털 성범죄 대응, 변한 것과 변해야 할 것

여전한 구호,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유통 사이트 웰컴투비디오의 운영자 손정우가 1년 6개월이라는 형기를 모두 채웠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구속 수감 중이다. 한국 검찰이 기소하지 않은 범죄수익 은닉 건에 대해 미국 정부가 범죄인 인도 청구를 한 까닭이다. 중복 없이 20만 건이 넘는 아동 성착취물을 유통한 끝에 국내에서 고작 1년 6개월을 복역한 그에게 미국으로의 범죄인 인도는 마치 그의 죄를 물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자 유일한 대안처럼 여겨진다. 범죄인 인도 여부에 모이는 대중의 분노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손정우 한 개인을 넘어선다. 이는 디지털 성범죄를 함께 저지르고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이들에 대한 분노이자, 이들의 범죄를 가볍게 여긴 사회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웹하드 카르텔에서 N번방까지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분노가 이뤄온 의미 있는 변화들을 짚으며, 바뀐 듯 바뀌지 않은 세상 속에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국가의 대응이 나아갈 방향을 살필 때다.

 느리지만 조금씩 변한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뒤, 국회 국민청원의 후속 조치로 이른바 ‘N번방 방지법’인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 개정안이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했다. 해당 법률안은 디지털 성착취물의 한 유형인 딥페이크 영상을 실존하는 성폭력으로 보고 처벌 규정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지만, 동시에 제작, 유통, 소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디지털 성범죄를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인 지난 4월 29일과 5월 20일, 20대 국회는 폐원을 며칠 앞두고 디지털 성범죄 관련 개정 법안들을 처리했다. 소라넷에서 시작되어 웹하드 카르텔, 다크웹과 N번방까지, 디지털 성범죄를 경미한 범죄로 간주하거나 남성들이 향유하는 놀이문화로 인식하는 사회를 바로잡으려 했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또 다시 결실을 맺은 것이다. 법 개정에 따라서 기존에 아동·청소년 음란물 소지만을 처벌했던 데에서 소지·구입·저장·시청과 촬영물을 이용하여 협박하는 행위까지도 범죄로 규정되었다. 성착취물을 직접 제작하거나 판매하지 않아도 이를 소비하는 일 자체가 성착취 산업의 수익이 된다는 현실을 법에 담아내는, 의미 있는 변화가 만들어졌다.

법 개정 전후로 거의 모든 공권력이 너도나도 변화의 흐름에 합류하는 분위기다. 정부는 관계부처 회의를 통해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확립하고 아동청소년에 대한 보호 강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처벌 및 보호의 사각지대 해소, 중대범죄라는 사회적 인식 확산이라는 추진 전략을 바탕으로 디지털 성범죄 근절 대책을 발표했다. 경찰은 디지털성범죄 특별수사본부 설치를, 검찰은 디지털 성범죄 사건 처리 기준을 발표하며 지금까지의 기소유예를 넘어서는 적극적 수사 및 구형 방침을 세웠다. 최근에는 가해자의 인터넷 개인용 서버(클라우드)에 저장된 영상 원본은 삭제하고 복제물만 증거로 확보하는 등 피해자 보호 우선 수사 기준을 선보이기도 했다.

드디어 국가가 디지털 성범죄를 중한 범죄로 인식하게 된 것일까. 그간 남성 중심적 사회는 디지털 성범죄에 분노하는 여성들의 반응을 그저 남성들의 일상적 문화에 과민한 여자들의 문제로 여겨왔다. 경찰은 피해자에게 “찾을 수도, 잡을 수도 없다”며 디지털 성범죄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해왔고, 검찰은 크게 처벌할 일이 아니라고 기소를 유예해왔으며, 어렵사리 가해자가 법정에 서면 판사는 가해자의 서사에만 집중하며 턱없이 낮은 형량의 판결을 내려왔다. 그러는 사이 피해자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니, 국가와 사회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피해자의 정의보다는 가해자의 사정만을 고려해온 법제도와 공권력은 더 이상 변화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여전히 남은 과제들

당장 법원의 변화가 눈에 띈다. 최근 법원은 제2의 N번방을 운영하면서 여중생들을 협박하여 성착취물을 제작·배포한 혐의로 기소된 배모 씨에게 소년법상 법정 최고형인 장기 10년·단기 5년의 형을 선고했고, 공범인 류모 씨에게 징역 7년이라는 중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 사이트를 운영한 손정우가 1년 6개월 형을 받고 다시금 범죄인 인도 심사를 받고 있는 지금, 너무나 늦게 변화한 법원의 태도를 마냥 고무적으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N번방 가해자에 대한 재판이 줄줄이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이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프라이버시나 아동·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 운운하며 헌법 소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따라서 원래 진행중이던 재판은 헌재 결정 이후로 미뤄질 예정이다. 이들은 법원에 반성문을 제출하고 참회하는 제스처를 보이는 데 주저함이 없지만, 정작 재판정에 서면 감형을 위해 ‘주범이 시켜서 한 일이다’, ‘재유포나 시청만 했다’, ’고수익 알바에 눈이 먼 피해자들이 범죄에 빌미를 줬다’ 와 같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디지털 성범죄를 사소하게 여기는 인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인식에 기댄 자기 방어 논리는 법원에서 늘 감형 요소가 되어왔다. 가해자의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높아진 형량을 받은 가해자들이 스스로의 재판 결과를 운이 나쁜 경험으로 인식하고 억울해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가해자 중심적인 수사와 판결로 디지털 성착취를 확산하고 공고히 하는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받는 사법부는 철저한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지난해 12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 ‘가해자 중심적인 성범죄 양형기준 재정비’ 라는 제목의 청원이 26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성범죄 양형기준 중 진지한 반성, 부양 여부, 나이, 범죄 전력, 성장 배경은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참작되어 감경 사유가 되지만, 그에 반해 피해 구제나 회복 여부, 가해자 자신이 유포한 성착취 영상물의 삭제를 위해 노력한 정도 등 피해자의 입장에서 양형은 고려되지 않아 왔다. 법원이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상 피해자가 그 얼굴과 목소리를 드러내기 어렵다는 조건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 가해자 중심적으로 판결을 내려온 셈이다. 피고인에 유리한 요소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아니라 피해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아온 법원의 양형기준을 비판하는 청원이었던 만큼, 법원은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기 위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런 사정 속에서 올해 말로 연기된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피해자가 입은 부당한 피해와 고통을 인정하는 것을 우선하는 양형 기준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피해자의 일상을 바로세울 책임

2018년 웰컴투비디오의 운영자 손정우가 재판을 받을 당시 그가 재판정에 제출한 반성문이 500장이 넘는다고 한다. 그가 운영한 사이트에는 중복되지 않는 영상만 25만 건이 있었다고 하니, 실제 해당 사이트의 실존하는 피해자는 수십만에 달할 것이다. 그러니 그가 썼다는 반성문은 사실 피해자 한 명에 한 장 꼴도 되지 않는 양에 불과하다. 그의 반성문이 감형을 받기 위한 노력뿐 만은 아니었길 간절히 바라지만 그 반성문들이 피해자에게 가닿을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은 자신의 고통과 부당한 피해 사실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알리지 못하는 상황을 경험한다. 자신이 처한 문제를 혼자서 떠안으면서도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피해자의 고립감은 깊어지기 마련이다. 경찰서와 법원을 오가며 평소와 같은 일상을 구가하거나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고, 신상이 알려진 경우 살던 곳과 맺어온 관계 속에서 삶을 지속시켜 나가기도 어렵다. 어쩌면 일상의 붕괴는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피해자가 부당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인정하고, 피해자가 현재 처한 조건을 면밀하게 살펴 책임 있게 지원하는 내용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법적조력은 물론 필요한 경우 긴급생계 및 주거 지원 절차가 마련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완전하고 영구적으로 피해자의 성착취 영상물을 삭제하는 일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하는 일이 시급하다.

딥페이크라는 신기술이 새로운 성착취 유형으로 드러났듯이, 앞으로 계속해서 법적 근거가 미비해 처벌할 수 없는 다양한 유형의 온라인 성착취가 생겨날 것이다. 이때 국회의 과제도 분명해진다. 매번 새로운 양상의 범죄가 벌어질 때마다 사후적 입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 아니라 온‧오프라인에서 행해지는 젠더폭력의 본질적 구조를 이해하고 여전히 음란물이라는 용어에 포섭되어 있는 성착취 개념을 담을 수 있는 법적 체계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또한 디지털 성착취 피해자 보호 및 지원을 위한 체계와 지원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피해자가 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피해의 고통을 주체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고통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며, 부당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때 곧 피해자의 정의를 세워나갈 수 있다. 지금 당장 피해자 한 명 한 명의 깨진 일상을 복원할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끈질기게 물어야 하는 이유이다.

변화된 세상은 반드시 온다

오는 7월 6일 손정우의 범죄인 인도 여부가 결정된다고 한다. 심사가 어떤 결론에 이르던 간에 그에 대한 처분이 수많은 피해자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분노를 꺾지 않길 바란다. 그보다 디지털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오늘도 여전히 안온한 일상을 구가하는 무수히 많은 가해자들이 절망하는 계기가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손정우가 재수감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시점,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다 불법 촬영 혐의를 받은 한 중년 남자가 출동한 경찰과 실랑이를 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의 휴대폰에서 앞에 선 여성의 다리 사진이 발견됐지만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벌어진 상황을 억울해했다. 그가 길길이 날뛰며 신고한 여성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걸 지나칠 수 없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짝다리를 짚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나의 존재를 경찰도 가해자도 의식하는 눈치였다. 가해자가 경찰서로 이송되며 사건이 일단락 돼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버스를 기다리던 많은 인파 중 몇몇의 눈빛을 읽었다. 버스를 놓치고라도 신고한 여성 곁에 남아 있을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마도 지금의 변화는 절대 변할 것 같지 않은 세상에 지치지 말자고 서로를 북돋아 왔던, 조금씩 변화하고 있으니 포기하지 말자고 다짐해온 사람들 덕분에 이루어졌으리라.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공권력과 국가가 그 분노의 다짐에 동참할 차례다. 그저 관망하며 세상이 변하기를 바랄 수는 없지 않나. 지금까지 가해자의 편에 서서 피해자를 외면해온 국가와 사회를 떠올린다면, 변화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