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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2005년 인권하루소식 종간사] 절망의 추억, 희망의 기억

2005년의 마지막을 알리는 석양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저물고 있다. 올 한해 저 태양 아래 피빛으로 물든 인간의 땅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려고 몸부림친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쌀협상 비준안 국회 통과를 막기 위해 찬 겨울 여의도에 섰던 전용철·홍덕표 두 농민은 경찰의 곤봉과 방패에 쓰러졌다. 다국적 곡물회사에 쌀시장을 넘길 수 없다며 농기계를 앞세우고 서울로 가고자 한 농민들은 경찰에 가로막혔다. 농민들은 다만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전국 관공서 앞에 볏가마를 쌓고 손수 키운 볏가마를 불태워야 했다. 길고 완강한 투쟁 끝에 대통령이 사과하고 경찰청장이 사퇴했지만 사태의 진정한 원인인 쌀개방은 일정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다. 비준안을 통과시켰던 여의도의 저 '선량'들은 경찰청장의 사퇴를 종용했을 뿐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농업의 근본적 회생대책을 마련하라며 농민들이 흘린 피는 여의도 땅바닥에서 식을 줄을 모른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노동자들도 그냥 비껴가지 않았다. 정부는 비정규직을 양산하게 될 비정규직 노동법 개악안을 내놓고도 비정규직을 과보호하면 실업이 늘어난다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로 불안정한 고용과 노동조건의 후퇴를 강요하고 있다. 하이닉스매그나칩·현대자동차·울산건설플랜트·기륭전자·신세계이마트·하이텍·현대하이스코 등 지치지 않는 투쟁으로 스스로 희망이 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동안 쌓아올린 절망의 높이만큼이나 높은 공장 크레인으로 올라간 이들, 메아리 없는 절규로 한뎃잠을 자청한 이들, 이 가운에 우리 곁을 떠나간 현대차 비정규직 류기혁, 화물연대 김동윤, 한국노총 충주지부장 김태환의 얼굴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한편으로 아시아나·대한항공 두 조종사노조 파업에 대한 정부의 잇따른 긴급조정권 발동은 정규직·비정규직 가릴 것 없이 파업권 하나 보장되지 않는 노동기본권의 현주소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통제할 수 없는 전세계적 자유무역질서에 항의하는 목소리도 한층 더 커졌다. 부산에서 열린 아펙정상회의는 부산선언을 채택해 타결전망이 어두웠던 DDA 협상에 산소호흡기를 달았고 2020년까지 역내 무역 투자 자유화를 약속했다. 무엇이 두려워서인지 정부는 부산역에서 노숙인들을 내쫓았고 정상회의 기간 반세계화 시위 전력을 가진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했다. 그리고 정상회의장으로 행진하는 시민들의 앞을 컨테이너 상자로 가로막고 물대포를 쏘아댔다. 시애틀과 칸쿤에 이어 홍콩에서 벌어진 WTO 각료회의를 저지하게 위해 날아간 한국민중투쟁단은 각국 시민들과 함께 회의장 근처까지 진출하며 완강한 투쟁을 벌였고 이 가운데 11명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주한미군을 한강이남으로 후방배치해 '신속기동군'으로 재편하는 계획에 맞서 평택주민들이 지난해 쳐든 평화의 촛불은 해를 넘겨 다음달 500일을 맞이한다. 중앙토지수용위원회가 기지이전 대상부지에 대한 토지수용재결 안건을 통과시켰고 협의매수를 거부한 부지 73만8천평을 국방부가 지난 22일 법원에 공탁하는 등 내년초로 다가온 강제수용절차는 '이대로만 살게 해 달라'는 주민들의 염원을 얼어붙게 만들 참이다. 이 가운데 미국의 침략전쟁에 동참한 이라크 파병은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연장됐다. 부시 대통령이 스스로 이라크전쟁이 잘못된 정보에 의해 시작됐다고 시인했지만 파병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철군논의가 불붙지 않은 남한은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국가안보와 국익의 이름아래 온 국민을 하나의 이념으로 줄세우려는 해묵은 시도는 해방 60년을 맞은 올해도 계속됐다. 동국대 강정구 교수는 한 인터넷 매체에 '한국전쟁은 북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 전쟁'이라는 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썼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감옥에 갇힌 이들이 1000명을 넘어섰지만 대체복무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병역법 개정안의 국회 논의는 더디기만 하다. 국가정보원의 권한을 강화하게 될 테러방지법 제정시도는 올해도 끈질기게 고개를 쳐들었다.

사회방위를 빌미로 프라이버시를 위협하는 공세도 한층 강화됐다. 한나라당이 성폭력범죄 재범방지를 빌미로 전자팔찌를 채우는 법안을 발의했고 법무부가 피의자·수형자로부터 유전자를 채취하는 법안을 입법예고해 전국민 유전자디비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본격화했다. 정보통신부는 사이버폭력을 없앤다며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하겠다고 나섰고 헌법재판소는 '열손가락 지문날인'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이 가운데 이른바 '국정원 엑스파일'이 폭로돼 정보기관이 자행한 도청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작지만 또렷한 희망의 싹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지난 50년동안 이 사회의 가부장성을 상징해온 호주제가 폐지됐다. 단속과 강제추방 위협에 맞서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해 첫 독자노조를 설립한 이주노동자들은 노조위원장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쟁의 깃발을 놓치지 않고 있다. 두발자유화를 요구하며 거리에 선 청소년들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절망에 절망이 더해지는 가운데서도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이들 투쟁하는 이들이 옆에 있기 때문이다. 결코 녹녹하지 않은 반인권의 현실에서도 절망대신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새해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