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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의 인권나무 키우기] 조폭을 무진장 혼내주는 영화 속 ‘사람 좋은’ 경찰?

나쁜 놈은 때려도 된다?

▲ 나쁜 놈은 때려도 된다?

범죄나 조직폭력배에 대한 한국영화는 지리멸렬할 만큼 많다. 이러한 영화들에서 주인공을 맡는 이들은 대개 성질이 급하고 단순하지만 우직하고 심성이 고운 형사들이다.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며 경찰로서 사명을 다하는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안전을 해치는 일당을 소탕하는 데 거리낄 것이라고는 없다. 이 영화들에서 빠지지 않는 장면은 기소조차 되지 않은 피의자들을 경찰이 마구 구타하는 것이다. 만인의 공분을 살만한 피의자(조직폭력배, 밀수업자, 소매치기, 흥신소 직원, 성매매업자, 성폭력범 등)는 발뺌할 때마다 가차 없이 얻어터진다. 하지만 야만적으로 구타를 당하는 연행된 자 중에서 권력을 쥔 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쳐다봐도 없다. 연행된 직후 경찰에게 멱살이라도 잡히는 비리 혐의 고위관료나, 아내를 살인에 가까운 수준으로 구타한 뒤 끌려온 가정폭력 가해자는 이상스레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가 현실을 너무나 정확히 모사하는 것이다.
일종의 고문이랄 수 있는 수사과정 중 구타로 인해 처벌을 받는 경찰은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영화를 본 관객들은 금수 같은 짓을 저지른 흉악범들이 맞는 것을 통쾌하게 여기는 편이다. 어차피 ‘평범한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건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러한 재현이 문제가 된 것을 본 적이 없다.

경찰은 신처럼 올바르게 판결할 수 있는가?

인권을 누릴 만한 가치가 조금도 없는 중죄인이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는가. 인권을 전적으로 강탈당해야 하는 자가 존재하는가. 심증만으로 재판도 받지 않은 사람들을 무지막지하게 겁박하며 취조하는 것이 적법한가. 만일 비교적 경미한 일로 연행된 사람들이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폭력에 정면으로 노출된다면 어떻게 될까. 경찰은 피해자를 대신해서 가해자로 의심되는 이들을 잔인하게 응징할 특권을 지니는가. 무엇보다도 경찰의 폭력이 우리가 동의할만한 죄인들에게만 국한되어서 행사될까. 사회적 약자들이나 증오범죄에 취약한 소수자들(콘돔착용 문제로 성 구매자와 싸우다가 경찰서에 끌려온 성 노동자나, 게이바에서 다른 동성애자와 다투다가 연행된 동성애자, 거주허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식당에서 일하다가 끌려온 이주노동자 등)이 경찰에게 거세게 뺨을 맞아도 그저 쉽게 넘길 수 있는가.

영화 속 경찰폭력은 실제의 반영?

한국영화에서 냉혈한 죄인들에게 인권을 부여하지 않는 관행은 단지 영화 속 재현 문제로만 보기 어렵다. 영화매체는 결국 대중의 인권의식이나 실제 경향과 상당 부분 결부돼 있다. 경찰 폭행 장면이 이른바 인권선진국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에서 없다시피 한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독이 적군파 테러리스트들과 한바탕 시끌벅적한 싸움을 벌일 즈음에 만들어진 영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1975)에서는 적군파 테러리스트와 하룻밤 동침한 점만으로, 협력자로 간주된 여성이 경찰서에 연행되어서 조사받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독일사회는 거듭되는 테러공격으로 인해 집단 신경쇠약에 걸릴 만큼 혼란스러웠다. 보수집단에서는 적군파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증오를 쏟아냈다. 그러나 극 중 카타리나가 취조 도중 구타를 비롯한 가혹행위를 당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심문과정이 지나치게 힘겹거나 불리하게 치달으면 일정 시간 조사를 미룰 수 있는 권리가 피의자에게 부여된다는 점이다.
국제 엠네스티에서는 호송차량에서부터 경찰서에서 연행된 자들이 거치는 모든 곳을 훤히 보고 녹화할 수 있는 카메라 시설이 반드시 부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증거가 남지 않는 공간은 인권침해를 야기할 수 있다.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지극히 제한된 예외적 환경에서 인신을 구속당한 자들의 인권을, 사후약방문이나마 지키는 방패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연행 및 취조과정이 꾸준히 녹화 및 보관되고, 이를 검ㆍ경으로부터 독립된 감찰기관이나 인권 관련 부서에서 제대로 감시한다면 경찰서 안팎의 경찰폭력 시비는 상당 부분 감소할 것이다.

경찰은 조폭만 구타하는가? 시위 도중 경찰폭력에 부상당한 시위참가자

▲ 경찰은 조폭만 구타하는가? 시위 도중 경찰폭력에 부상당한 시위참가자


무죄추정의 원칙은 사치가 아니다

어느 미국의 변호사는 25년 넘게 각종 재판에 참여하면서 수많은 피의자를 만났다. 그가 변호해주었던 이들 중에서는 연쇄살인범도 있었고, 아동을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이도 있었으며, 자신을 길러주었던 양아버지를 도끼로 내리찍어서 무참히 살해한 이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악마들’의 권리를 위해서 전문지식을 활용한다는 숱한 지탄을 받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법조인의 길을 억척스럽게 걸어왔다.
그가 인권변호사로서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았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자극적인 언론기사나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는 여론, 석연치 않은 경찰의 브리핑 자료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대신에, 모든 피의자들이 응당 누려야 할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편견 없이 사건을 접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적잖은 피의자들은 인종이나 저학력, 전과, 직업(성 노동자, 마약밀매 등), 부족한 영어구사력 혹은 지적장애로 인해 누명을 쓰거나, 자신이 저지른 죄에 비해 과한 혐의를 뒤집어쓴 경우가 많았다.
두 번째로, 혹독한 단죄를 부추기는 응보에 치우칠 것이 아니라, 법치주의에 따른 공평무사한 법으로 처벌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여아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피의자의 변호사로 나섰다가 그는 심각한 위협에 내몰렸다. ‘변호사가 피의자를 돕는 것은 무죄석방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이 지은 죄에 걸맞은 처벌을 받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믿음’이라고 주창하며 사람들을 설득했다.

경찰수사가 복수에 집중될 때 부작용

최근 인도에서는 버스에 탄 여성을 집단적으로 성폭행하고 신체 장기를 의도적으로 훼손한 후 달리는 버스에서 떨어뜨려 피해자가 극심하게 앓다가 사망한 비극적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 이후 인도에서는 몇 주간 대대적인 시위가 열렸다. 당시 시위대는 ①연행된 피의자 전원을 속전속결로 재판해서 사형 집행할 것, ②고질적인 인도의 여성폭력 퇴치방안과 후진적인 여성인권을 진작하기 위한 구조적 개선(예컨대, 경찰력 강화 및 여성경찰 증설, 심야버스에 대한 불심검문 강화 등)을 대대적으로 요구했다. 인도 당국은 몰 성인지적인 조치로 일관하다가, 급기야 성폭력 범죄에 대한 속전속결 재판과 향후 피의자의 사진과 실명을 언론을 통해 공표한다고 예고했다.
하지만 이러한 대책은 문제점을 수반한다. 적법한 수사나 재판을 통해서 피의자들의 죄를 엄격하게 따져 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범죄를 일벌백계하겠다는 정부나 법원의 시각전환은 수많은 인도여성이 애타게 염원하는 숙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일 피의자 여섯 명의 죄목이 똑같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가. 한 명도 빠짐없이 교수형에 처하라는 사람들의 광포한 여론에 등 떠밀린 상태에서는 무리한 수사와 불공정한 재판이 불 보듯 훤하다. 여섯 명의 피의자 중 두 명을 변호 중인 변호사에 의하면, 죄다 연행된 이후 매일 극심한 고문을 받으며 거짓자백을 강요받고 있다고 호소했다. 인도 수사당국은 변호인의 의혹 제기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인도의 변호사협회에서는 여섯 명의 피의자를 위한 변호를 집단적으로 거부하자고 결의했다. 모조리 피의자들이 재빨리 사형되기만을 바라는 현실에서 정의가 올곧게 달성될 것인가.
인도에서는 ‘사법 외 집행’ 관습이 남아있다. 피의자를 법의 심판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개인 혹은 집단이 자의적으로 가해자라고 의심되는 이들을 ‘복수’라는 이름으로 처단하는 것이다. 이 형국에서 피의자의 사진과 이름이 공표될 경우, 피의자의 가족들이 당하는 2차적 피해 대책은 강구되어 있지 않다. 범행과 전혀 관련이 없는 가족들이나, 피의자가 속한 소수인종 공동체가 집단적인 증오에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만큼, 피의자의 신상공개는 신중하게 결정되어야 한다.

경찰은 영화 속 경찰폭력을 왜 문제 삼지 않는가?

경찰의 자의적 폭력으로 채워진 영화, 우리 이웃의 범죄

▲ 경찰의 자의적 폭력으로 채워진 영화, 우리 이웃의 범죄

영화에서 경찰이나 검사가 연행된 피의자들을 자의적으로 폭행하는 장면이 나와도, 이를 문제 삼는 경찰이나 검찰의 반박이 없다는 것 역시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조금 생각을 달리하면, 이러한 재현은 경찰이나 검찰 같은 기관의 권위를 심각하게 떨어뜨릴 수 있으며, ‘허위사실 유포’로 경찰이나 검찰을 치명적으로 모함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를 즐기는 관객 중 상당수가 ‘인권이 필요하지 않은 죄인들’을 화끈하게 ‘단죄’하는 것에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경찰이나 검찰의 연행된 사람들에 대한 폭행이 그들의 권위를 실추시키지 않는 것으로 이어진다. 은연중에 대중은 ‘폭력/응징’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그들에게 허락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필자가 몇 년 전 만난 빈민활동가는 활동가가 되기 전 이틀 동안 굶다가 근처 슈퍼마켓에서 먹거리를 훔치다 발각되어서 파출소에 연행되었다. 연행된 이후 조사를 받던 내내 경찰들이 그의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 순간 고등학생들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파출소에 들렀다. 경찰들은 더 이상 그를 때리지 않았지만, 적나라한 욕설과 함께 모욕적인 말을 했다. 자신이 지은 죄가 명백하다고 반성을 하면서도, 고등학생들 앞에서 인간 이하로 하대 받으며 극심한 수치심을 느꼈다. 만기복역하고 석방된 후 그는 빈민촌에서 공동체운동을 하며 유난히 골골한 사람들로 가득 찬 빈민촌에서 어버이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만일 경찰폭력의 피해자가 평범한 우리 이웃이라면?

한국영화에서 경찰이나 검찰의 피의자에 대한 욕설과 구타장면의 피해자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들과 매우 다를 수도 있다. 만일 그 경찰이 소수자들에 대한 증오로 뭉친 사람으로서 일용직 노동자들을 형편없는 집단으로 취급한다면? 만일 어떤 경찰이 몇 십 년간 가정폭력의 여파로 남편을 살해한 여성의 뺨을 거듭 때리면서 가부장주의 실종을 개탄하며 여성을 몰아붙인다고 해도 여전히 웃을 수 있을까.
이때도 우리들은 ‘사람 좋은 털털한 욕쟁이 형사’의 자의적인 처벌권한을 수긍하며, ‘못된 인간들’이 통쾌하게 매 맞는 것에 대리만족을 느끼며 정의가 도래했다고 만족할 것인가. 법에서는 어떤 피의자도 고문이나 모욕적인 처우를 받지 않을 권리를 기본권으로 정하고 있다. 이를 어기는 것은 엄연한 불법행위이다. 한국영화에 이러한 장면이 비일비재하다는 점은 과연 영화 속 경찰폭력이 가상의 이야깃거리에 불과한지 의문을 자아낸다. 동시에 관성적으로 경찰의 월권행위를 묵인하는 태도가 온존해있다는 씁쓸한 현상의 반증일 수도 있다.
덧붙임

나이테 님은 인권자유기고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