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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선거 놀음에 파묻힌 인권 법안

국가보안법은 하나의 법률이 아니다

[기획] 선거 놀음에 파묻힌 인권 법안 (19-끝) 국가보안법 폐지안

17대 대통령 선거운동이 진행 중이다. 12명의 후보가 각축을 벌이고 있는데, 그중 6명의 유력후보에게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아래 국민연대)가 입장을 물었다. 정동영, 권영길은 명백하게 폐지 입장을, 문국현은 폐지하되 형법에 흡수한다는 입장을, 이인제는 전화상으로 개정 입장을, 이명박은 북한과 상호주의를 전제로 한 개정 입장을 밝히되 서면답변을 거부했고, 이회창은 아예 무시했는데 그의 출마의 변부터 발언들을 보면 폐지에 반대하는 입장이 명백함을 알 수 있다.

사실 국민연대가 서면으로 질의하여 답변을 요구했으니 이런 정도의 답변이라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폐지든 개정이든 선거 국면에서 밝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보수층의 한 표라도 아쉬운 판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실리적 입장을 갖는 후보들을 탓할 수는 없다. 그리고 답변에서는 폐지 입장을 밝힌 후보들 중에 정동영은 2004년 국가보안법을 폐지시키지 못한 여당의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제1당으로서 여전히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위해 노력한다는 어떤 징후도 우리는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2004년 12월 국회 앞에서 진행된 1000인 노상 단식농성 [출처]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홈페이지(freedom.jinbo.net)

▲ 2004년 12월 국회 앞에서 진행된 1000인 노상 단식농성 [출처]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홈페이지(freedom.jinbo.net)



최고조에 달했던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

2004년 6월부터 진행되었던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가장 최고조에 달했던 투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근 6개월 동안 이 투쟁은 상승했고, 현직 대통령이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역사의 박물관에 보내자‘고 선동했고, 집권여당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형법의 일부를 개정하는 폐지안을 제출했다. 민주노동당에서는 유보나 조건 없는 폐지 법률안을 제출했다. 그러자 개정은 할 수 있다던 입장을 갖고 있던 한나라당이 45일 동안 국회 법제사법위를 점거 농성하면서 국가보안법 폐지 법률안의 상정조차 막아 버렸다.

국회 밖에서는 여의도에 11월부터 천막농성에 돌입했고, 12월에는 집단 노상 단식농성을 전개했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라는 단일 사안을 놓고 한 때 1천명의 인원이 동시에 단식농성을 전개했던 참으로 감동적인 투쟁의 판을 벌였다. 정기국회, 그리고 이어진 임시국회 기간 동안 ‘연내 국가보안법 폐지’를 이룰 것 같은 상황은 노무현 대통령의 유보 발언과 김원기 국회의장 직권상정 거부, 열린우리당의 자중지란에 의해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로써 국회의 탄핵, 그리고 이어진 총선에서 다수당이 된 이후 열렸던 개혁 국면은 급격하게 퇴조했고, 노무현 정권은 개혁을 버리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가속화하면서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열린우리당은 자멸해 갔으며, 한나라당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막아낸 덕에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그리고 한나라당은 불고지죄 조항과 고무·찬양 조항을 개정하는 정도의 개정안에 명칭을 ‘국가안전보장법’으로 개명하는 정도의 개정안을 2005년 4월에 제출했고, 6월 임시국회에서는 3개의 법안이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 상정되었다. 그런 뒤에 2년여 동안 국가보안법 개폐안들은 국회 법사위 안에서 잠자는 상황을 맞고 있다.

그리고 여의도 국회 앞에서 결연하게 단식농성을 전개했던 대오는 흩어졌고, 이후 다시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의 파고를 높이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진보진영은 국가보안법의 폐지에 대해 당위적으로 동의하고는 있지만, 정치권처럼 이 투쟁에 힘을 실으려고 하지 않는다.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일부 세력들이 국민연대를 근근이 이어가고 있는 답답한 상황이다.

국가보안법은 죽지 않았다

2004년의 투쟁 실패 이후 실제 진보진영의 많은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은 사문화 단계에 들어갔다고 판단했다. 이 법의 위력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구속자 수가 그런 양상을 잘 보여준다.

10월 18일 현재 민가협의 조사에 따르면, 올해 국가보안법으로 17명이 구속되었고, 이중 현재까지 감옥에 수감 중인 이는 10명에 이른다. 노무현 정권 이후 국가보안법 구속자는 현저히 감소하는 추세를 보여 왔다. 그래서 2003년 78명, 2004년 38명, 2005년 13명이었다가 작년 2006년에 이른바 ‘일심회’ 사건부터 급속히 증가해 20명으로 늘었고, 올해도 이 수준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2006년 하반기에 발생한 이른바 ‘일심회’ 사건은 국가보안법 사건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1심, 2심을 거치는 동안 ‘일심회’란 조직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을 자처하는 민주노동당의 간부가 연루된 간첩 사건으로 선전되었다. 많은 부분 국정원이 수사한 혐의들이 무혐의로 처리되었다. 겨우 회합, 통신 위반 정도의 죄를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강순정 씨의 국가기밀누설혐의가 무죄 선고되는 등 아직도 국가보안법 사건은 무리한 구속수사가 남발되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고, 공안기관들이 어떤 통제도 받지 않은 채 이런 사건들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올해 상반기에는 평화사진작가 이시우 씨가 구속되었고, 인터넷 서점 ‘미르북’ 주인이 사회과학 서적을 판매했다는 이유로 보안수사대의 수사를 받았다. 그리고 여전히 한총련 수배자들이 보안수사대에서 수사를 받고, 구속되었다가 풀려났다. 공안기관의 국가보안법 수사가 고조되다가 10월초에 있었던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하여 그 기조가 수그러드는 상황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한 직접적인 구속과 수사보다는 올해는 현저하게 국가보안법의 외연이 넓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7월 26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정보통신망법에 의한 제재가 표적으로 삼는 것은 모두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이적표현물들이다. 국회에 계류 중인 통신비밀보호법에서도 국가보안법과 연관된 부분이 강화되어 있다.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선거법에서도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표현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미 국가보안법은 방송법, 신문법, 전파법, 뉴스통신진흥법 등의 조항에 스며들어가 있으면서 언론의 자유를 현저하게 제약하고 있다. 보안관찰법에는 모법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아가 국가보안법에 기초해서 국내 수사권을 유지하고 있는 국정원은 테러방지법에 사상, 표현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는 유사 국가보안법적인 내용을 담으려고 기를 쓰고 있고, 국회에서 이런 테러관련법들이 제정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보안수사대는 이미 개악된 정보통신망법과 개악되려는 통신비밀보호법을 통한 검열과 통제를 강화할 수 있는 권능을 새로이 부여받게 된다.

이처럼 국가보안법에 의한 직접적인 탄압이 계속될 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과 연관된 법률들의 강화, 공안기관들의 권한 강화가 나타남으로써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살아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억압하고 있다.

지난 7월 25일 서울 옥인동 보안수사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출처]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홈페이지(freedom.jinbo.net)

▲ 지난 7월 25일 서울 옥인동 보안수사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출처]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홈페이지(freedom.jinbo.net)



국가보안법 폐지의 조건

내년 12월 1일이면 국가보안법 제정 60년이 된다. 60년 동안 국가보안법이란 야만의 법이 생존해왔다. ‘헌법 위의 법’으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체제'를 떠받치는 기둥으로, 냉전적 자유민주주의자들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를 잡아온 국가보안법, 그로 인한 반공주의에 의해 사람들을 주눅이 들게 하고, 자연스레 국가보안법 체제에서 자기검열을 하도록 길들였던 권능을 지닌 국가보안법, 이 법이 폐지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사실 다른 법률들도 마찬가지지만, 한 법률의 제정과 개폐를 위해서는 사회적 힘이 필요하다. 입법 활동에서 전문성도 중요하고, 헌신적인 투쟁도 필요하지만,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대중적인 힘이 받침될 필요가 있다. 아니면 최소한 반대세력을 침묵하도록 만들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하다. 국회의원들이 입법 활동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하는 힘의 결집이 필요하다. 그런 힘에 의해서 입법되지 않는 법률은 입법 후에도 곧 형해화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국가보안법은 현재 대한민국 반공체제의 상징과도 같은 법률이고, 이 법을 헌신적으로 지키려는 힘을 가진 세력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런 세력을 압도할 힘을 민주주의와 인권진영, 나아가 진보진영이 갖추어야 한다. 현재 진행되는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는 그런 대세를 형성할 수 있는 유리한 지형을 조성해준다. 그러나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은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여 다시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기도가 언제고 시도될 수 있고, 신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유사 국가보안법적인 다른 법률들로 전화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검열과 감시, 통제체제의 근거로 작동하는 법률들의 폐지, 그리고 그에 복무하는 공안기관들의 해체 투쟁이 동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끝장내려는 기획이 새롭게 조성되는 정세 속에서 마련되어야 할 때다. 제정 60년을 넘기지 못하도록 국가보안법을 끝장내는 것, 진보를 지향하는 모든 세력들의 과제다.
덧붙임

◎ 박래군 님은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정책기획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