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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선거 놀음에 파묻힌 인권 법안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면죄부, 공·소·시·효

[기획] 선거 놀음에 파묻힌 인권 법안 (12) 시효배제법 제정안

반인권적 국가범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선고되고 이어진 손배소송에서 국가가 고액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오면서 세간의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당시 언론의 초점은 온통 천문학적인 액수의 배상금에 맞춰져 있었지만, 사실 우리 사회가 주목했어야 하는 것은 그대로 묻힐 뻔했던 조직적이고 반인권적인 국가범죄의 진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가라는 이름을 걸고 자행되는 무자비한 폭력과 인권 유린의 가혹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인혁당 사건 외에도 실제로 지난 시기 저질러졌던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사례들은,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무자비하다. 그러나 만약 당시 저질러졌던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잔혹함에 몸서리치고 있는 이가 있다면, 나는 아직 놀라기에는 이르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공소시효배제특별법 제정 촉구 각계인사선언 기자회견 [출처] 공소시효배제특별법제정연대

▲ 공소시효배제특별법 제정 촉구 각계인사선언 기자회견 [출처] 공소시효배제특별법제정연대



까다로운 재심 절차, 그리고 공소시효라는 이름의 면죄부

최근 들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 등의 국가기관에서 지난 시기 저질러졌던 국가의 인권 유린 사례들을 조금씩이나마 발굴해내고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과 보상을 위한 권고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반인권 국가범죄의 실질적인 해결은 여전히 요원하다.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피해 구제의 첫 단계라 할 수 있는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조차 매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부족한 예산과 권한으로 인해 진실위의 활동력이 위축되어 있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진실위의 권고가 아무런 구속력을 갖지 않음으로 인해 피해자들은 재심의 단계를 거쳐야만 명예 회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재심의 요건과 절차라는 것이 매우 까다로운 것이어서, 대다수의 피해자들이 현재 재심 단계에 돌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두 번째 문제는, 피해자들이 어렵게 재심을 통해 명예를 회복했다 하더라도 소멸시효의 장벽에 부딪치게 된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더라도 다시 국가를 상대로 손배소송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국가는 예외 없이 소멸시효의 완성을 이유로 들어 배상 책임을 외면하려 하였다. 이는 국가의 신의성실 원칙에 대한 명백한 위반으로, 이에 따라 최근 재판에서는 소멸시효와 상관없이 국가가 자신의 책임을 다 할 것을 주문하는 판결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역시 일부 사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언제 이러한 결과를 뒤집는 판결이 나올지 모르는 일이며, 대법원에서는 아직 이러한 판례가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즉, 결국 국가가 저지른 범죄가 명백한데도 불구하고, 소멸시효라는 장벽에 의해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문제가 번번이 난관에 봉착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반인권적 국가범죄 해결의 최종 단계라 할 수 있는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현재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다. 여기에서 또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공소시효이다. 반인권 국가범죄의 진상을 밝혀내어 가해자를 고발한다 하더라도,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 일각에서는 이를 이용하여 국가범죄의 진상규명 자체를 막는 폐단조차 일어나고 있다.

이는 사회정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피해자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울부짖고 있는데, 그 범죄를 통해 포상을 받고 진급한 국가범죄의 가해자들은 여전히 승승장구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이는 국가 스스로가 국가에 대한 신뢰를 내던지는 일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지난 4월 국회 앞에서 진행된 1인시위 [출처] 공소시효배제특별법제정연대

▲ 지난 4월 국회 앞에서 진행된 1인시위 [출처] 공소시효배제특별법제정연대



시효 배제 입법 필요성의 대두

이에 따라 반인권적 국가범죄와 관련하여 재심 요건 완화 문제와 함께 공소시효 및 소멸시효를 배제 또는 정지할 것에 대한 요구가 인권단체 및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노력의 하나로 2002년에는 ‘반인도적 국가범죄 공소시효배제운동 사회단체협의체’에서 관련 법안을 제출하기도 하였고, 2005년 9월에는 마침내 열린우리당 당론으로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이원영 의원 외 145인 발의)’이 발의되기에 이르렀다.

이 법안은 반인권적 국가범죄에 대한 소멸시효를 배제하고, 현재 공소시효가 만료되지 않은 범죄를 포함한 이후의 국가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이 법안이 통과된다면, 현재 국가를 대상으로 한 손배소송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소멸시효 완성의 논리가 무력화됨으로써 피해 구제가 용이해질 뿐만 아니라, 향후의 국가범죄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더라도 처벌하게 됨으로써 국가범죄의 재발을 막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편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시효 문제가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다 보니 이외에도 여러 의원들이 관련 법안을 발의한 상황이다. 그 중의 하나로 이은영 의원이 올 해 6월 제안한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소멸시효이익 포기에 관한 특별법안’을 들 수 있다. 이 법안은 주되게 진실위의 진상규명 결과를 재심 사유로 인정함으로써 재심 절차를 간편하게 하고, 관련 사건에 대하여 국가가 시효이익을 포기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안은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주요 문제인 재심과 소멸시효 문제에 대한 대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나, 진실위 진상규명 사건 범위를 벗어난 수많은 국가범죄 관련 재심에서는 아무런 혜택이 없다는 점에서 이원영 의원 발의안에 비해 포괄적이지 못하며, 또한 공소시효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는 아쉬운 지점이 있다.

또한 최근 9월 21일 제안되어 법사위에 회부되어 있는 강창일 의원의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공소시효 배제 등에 관한 특례법안’이 있다. 이 법안의 주요 내용은 이원영 의원의 안과 거의 유사하여 반인권적 국가범죄에 대한 시효를 배제 혹은 정지하자는 것인데, 다만 공소시효의 배제 또는 정지를 이 법 시행 이후의 범죄에 한하여 효력을 발생하는 것으로 부칙을 두고 있다. 이는 인권적 원칙에 비추어 볼 때 이원영 안보다도 후퇴된 법안이라 할 것이다. 단 이은영 안과 마찬가지로 이 법안 역시 진실위 진상규명 결과를 재심 사유로 볼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겠다.

한 가지 더 시효와 관련하여 살펴봐야 할 국제인권기준이 있다. 바로 로마규정이다. 120여개국이 가입하고 있는 로마규정은 국제형사재판소(ICC)를 설치하여 집단살해죄, 전쟁범죄 등 반인도적 범죄를 국제적으로 처벌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주목할 것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시효를 전면 배제한다는 점이다. 단, 로마규정 상의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개념은 한국의 특수한 ‘반인권적 국가범죄’를 다 포괄하고 있지 않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는 이 로마규정의 가입 당사국이 되어 관련 국내법으로 ‘국제형사재판소 관할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이른바 ICC이행법안)’의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그렇다면 로마규정의 취지를 고려할 때, 이 법안의 입법을 추진하면서 ‘반인권적 국가범죄’를 포괄하여 함께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이와 관련하여 국회는 어떠한 고려도 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이 법안의 제정마저 조속히 추진하고 있지 않아 비판이 쏟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현재로서는, 반인권적 국가범죄 해결의 길을 조속히 열고 일반법적으로 반인권적 국가범죄와 관련한 해결의 원칙을 제시하기 위해, 이원영 의원이 발의한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대안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법안 역시 현재 반인도적 범죄와 관련하여 국제 사회에서 확립되어 있는 ‘불처벌불가의 원칙’을 충족시키지는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이 법안으로는 지난 시기 국가범죄의 가해자를 처벌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현재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의 보수성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 수준의 법안을 발의하는 것이 조속한 제정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판단된다. 또한 이 법안의 제정으로 현실적으로 걸림돌이 되고 있는 소멸시효의 문제를 일단 해결하고 미래 국가범죄의 재발을 막을 수 있으며 나아가 반인권적 범죄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따라서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커녕 진상규명조차 쉽지 않은 현실적 조건을 고려할 때, 이 정도 수준의 법안이라도 일단 제정하는 것이 절실하게 요구되며, 이는 분명 반인권적 국가범죄 해결에 있어 일보 전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효배제연대의 구성과, 법 제정을 위한 끈질긴 노력

그러나 법 제정에 아무런 장애 요인이 없을 것 같은 이 특례법안은, 현재 발의된 지 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공청회 한 번 잡히지 않은 채 국회 법사위에서 한없이 계류 중인 상황이다. 이에 따라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의 제정을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는 절박함에 기초하여, 올 해 초 인권단체들이 연대 조직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공소시효배제특별법제정연대’(아래 시효배제연대)이다.

시효배제연대는 4월 2일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각종 입법 활동을 활발히 추진해 왔다. 국회 토론회와 워크숍도 개최하였고, 임시국회 기간 내내 국회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진행하며 특별법의 제정을 촉구하였다. 지난 6월 국회 기간에는 ‘공소시효배제특별법 제정 촉구 각계인사선언’에 학계, 법조계, 종교계, 여성계, 시민사회단체를 망라한 각계 인사 161명의 동참을 끌어내었고, 얼마 전에는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올바른과거청산을위한범국민위원회’와 함께, 공안기관의 국가범죄를 고발하고 해결을 촉구하는 <없·애·야·한·다-공안기관 반인권범죄보고서1, 보안수사대편>을 출판하고, 이를 계기로 <‘국가보안법 폐지’, ‘공안기관 해체’, ‘공소시효배제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하였다. 17대 국회 회기 내에 공소시효배제특별법을 제정하기 위해 인권단체들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입법 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없·애·야·한·다-공안기관 반인권범죄보고서1, 보안수사대편> [출처] 공소시효배제특별법제정연대

▲ <없·애·야·한·다-공안기관 반인권범죄보고서1, 보안수사대편> [출처] 공소시효배제특별법제정연대



하지만 현재 대선을 눈앞에 둔 17대 국회는 공소시효배제특별법의 제정에 무심하기만 하다. 지난 6월과 8월, 법사위 제1소위에 특례법안이 처음 안건으로 올라가는 작은 성과가 있었지만, 이 역시 우리들의 끈질긴 노력에 못 이긴 형식적인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어서, 실제 1소위 회의에서는 제대로 심의조차 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얼마 전 대선 후보들(이명박, 정동영, 이인제, 권영길, 문국현 후보)에게 공소시효배제특별법과 관련한 공개질의를 진행하여 대체로 제정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답변을 받았으나, 이것이 과연 실효성 있는 대답이 될지는 솔직히 미지수이다. 심지어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는 ‘다른 법률간의 종합적인 검토와 충분한 심의가 국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향후 합리적인 법안이 나올 것으로 보며 단일화된 법안이 국회를 통과되면 후보자로서 또는 당선자로서 국회의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와, 법 제정 노력에 대한 적극적인 입장을 밝히는 데 주저하기도 하였다.

17대 국회, 과연 과거사 청산과 인권 실현의 의지가 있는가!

시효배제연대의 활동가로서 일하고 있는 나로서는, 도대체 인권적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도 않은 이 정도의 법안이 왜 통과가 안 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법 제정 촉구 과정에서 만난 법조계와 학계 인사들 또한 도대체 무엇이 문제가 되어 이 정도 법률이 통과가 어려운 지 알 수 없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아마도 공소시효배제특별법의 제정이 한없이 미뤄지게 되는 실제 이유는, 그 어떠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해도, 17대 국회가 진정한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갖고 있지 않은 데서 찾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아가 과거사 청산 자체를 기피하고 두려워하여 이와 관련한 어떠한 논의도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솔직한 국회의 현실이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현재 대다수 의원들이 법안에 관심이 없거나 제대로 된 검토조차 하지 않은 채,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특례법의 제정에 미온적으로 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사의 청산은 현재의 문제이며 곧 미래의 문제이다. 우리 사회가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해결에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야만의 시대를 넘어 인권 사회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반인권적 국가범죄 해결에 대한 원칙을 바로 세워야만 할 때이다.

17대 국회에 요구한다.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피해자들과 인권 실현을 염원하는 이들의 한 목소리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라. 선거놀음과 정쟁에 파묻혀 공소시효배제특별법의 제정을 또다시 미룬다면, 17대 국회는 직무유기라는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인권적 국가범죄를 올바로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인권이 살아 숨 쉬는 새 사회의 도래를 위해, 공소시효배제특별법의 제정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끈질기게 계속될 것이다.
덧붙임

◎ 김유경 님은 공소시효배제특별법제정연대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