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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선거 놀음에 파묻힌 인권 법안

주검은 말하고 싶다

[기획] 선거 놀음에 파묻힌 인권 법안 (10) 검시관법 제정안

주말에 시간이 되면 심야에 방영되는 CSI라는 미국 드라마를 가끔 보곤 한다. 이 드라마를 보게 되는 이유는 사망사건이 발생하는 범죄현장에 의학을 비롯한 갖가지 과학적 능력을 갖춘 수사관들이 현장에서 직접 조사하며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과학수사의 묘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제도하에서는 이는 단지 먼 나라 드라마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요즘 사회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이에 맞추어 사법 시스템도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측면으로 점점 발전하고 있고, 많은 인권단체들도 국민의 기본권과 인권의 확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다. 하지만, 유독 사망자의 인권보호와 사회질서유지의 중요한 제도라 할 수 있는 검시관(법의관)제도를 아직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다 보니, 권력에 의한 정치적 죽음, 군대에서의 은폐된 죽음, 각 산업현장, 의료분쟁 등 일상의 억울한 죽음들이 생겨나고 있다. 초기에 조사만 제대로 했어도 밝혀질 수 있는 많은 의문사는 가족들의 진상규명요구가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이어지고 있고, 급기야 군의문사를 전담하는 국가기구까지 생겨났다. 또한, 의료분쟁 송사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2월 국회 남문 앞에서 진행된 1인시위 [출처]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 지난 2월 국회 남문 앞에서 진행된 1인시위 [출처]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주검 발견한 최초 현장에 검시관을

이러한 문제 발생의 근본 원인 중 하나가 검시관제도의 미비 때문이다. 한국 검시제도의 문제점을 몇 가지 지적하면, 첫째 전문가들이 사건 조사의 과정에 배제되어 있어 전문성이 떨어진다. 검시의 책임자인 검사는 의학 전문가가 아니며 경찰역시 검시 조사 전담 인력이 없이 기본적 법의학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두 번째로 지적하는 것이 수사와 부검이 별개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법의학 전문가는 사건현장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경찰이 수집한 정황 증거 등으로 소견을 달고 비전문가인 검사의 판단과 이를 토대로 비전문가인 법원이 법률적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보니 최초 법의학적 소견을 밝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부(아래 국과수)는 반인권적 국가범죄에 의한 죽음이나, 정치쟁점이 되는 죽음의 경우 진상규명을 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권력의 하수인이라는 불신의 온상으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명감이 생겨날 수 없고 근무 조건 또한 열악하다보니 지난해 국과수 법의관 신청자는 17명을 뽑는데 단 1명뿐이었다. 각 의과대학의 법의학 전공 신청자들도 대부분 줄어들고 있다. 사회구조가 복잡해지고 각종 범죄의 유형 또한 다양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기본 인원조차 마련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이러한 제도를 개선하고자 2003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진상규명과정에서 사인확인제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지적에 따라 사인확인제도 개혁입법안 공청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의문사유가족대책위는 2003년 12월 더 이상의 억울한 죽음이 없기를 바라면서‘생명 존중과 법의학 발전을 위한 의문사 유가족들의 장기기증과 시신기증 서약서 전달식’을 갖고, 허영춘 씨(허원근 동지 아버지), 김정자 씨(박창수 동지 어머니) 등 14분의 의문사유가족들은 법의학 발전을 위해 시신기증을 약속한 바 있다.

이런 노력 끝에 검시제도 개선을 위한 법안은 2005년 6월 검시제도 입법을 위한 공청회를 거쳐 그해 10월 21일 유시민의원 외 143인 의원 발의로 ‘검시를 행할 자의 자격 및 직무범위에 관한 법률안’이 제출되었다.

법안의 주요 내용은 검시관 양성계획의 수립에 관한 사항 등을 심의·의결하기 위하여 법무부장관 소속하에 검시위원회를 설치하는 것과 이 법에 따른 검시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대통령령이 정하는 행정기관에 검시관을 두는 것, 검시관의 자격 규정을 두고 있고, 검시관은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유지해야 함을 밝히고 있다. 수사기관은 변사체를 발견한 경우 그 현장을 보존하고 그 변사체의 소재지를 관할하는 검시관에게 즉시 그 사실을 통지하여 검시관은 사인확인에 필요한 경우 변사체에 대하여 검시, 검안을 하도록 하였으며, 법무부장관은 검시에 필요한 검시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중앙행정기관의 장과의 협의를 거쳐 검시 전문인력의 양성계획을 세우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중립성과 독립성 가진 검시제도, 미룰 수 없다

애초 법안에서 많이 후퇴된 내용이라 의문사유가족들과 추모연대 등 관련단체들도 불만이 많았지만, 현실 조건에서 이정도의 내용이라도 우선 제정하자는 의견으로 모아졌다. 아쉬운 점 몇 가지는 우선, 검시제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중립성의 문제 때문에 관련단체에서는 보건복지부 등으로 할 것을 주장했으나, 해당부처에서 난색을 보이면서 그나마 관련 있는 법무부로 되어 있다. 그리고 검시대상을 애초 △모든 집단 수용시설로 분류될 수 있는 장소에서의 죽음 △15세 미만의 양자의 사망 △병원 도착 전까지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발생한 죽음 △중독 사고에 의한 사망 △병원 시술 중 발생한 사망 △화재∙폭발 등으로 인한 사망 △대형 사망 사건 등으로 구체화하고자 하였으나, 해당기관의 반발 등으로 인력과 재정이 마련되는 대로 범위를 넓힐 수 있도록 대통령령으로 범위를 정하도록 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회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에서 몇 차례 다뤄지고, 관련단체의 요구로 법사위 주최 공청회도 열려 각 부처의 의견 및 전문가들의 의견도 들었다. 그런데 법제정에 모두 공감한다며 금방이라도 제정이 될 것 같던 법안이 3년이 다되도록 법사위원회만 맴돌고 있다.

의원회관 사무실을 방문하며 읍소와 설득, 고성이 오가는 항의 끝에 법제정이 안 되는 몇 가지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검찰과 경찰이 현재의 제도가 바뀌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현재의 국과수 시스템에 재정지원을 늘리는 정도로 해서 현행대로 유지하자는 것이다. 국민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이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고집하며 수십 년 간 내려온 관행대로 가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찰청에 항의 방문도 해보았다.

2005년 법안 발의 이후 의문사유가족대책위와 추모연대는 국회가 열리는 동안 매년 아침 7시30분부터 9시까지 국회 남문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하고 법제정을 호소하였다. 지난해와 올해 초 까지 전국의 법제사법위원회 의원 지역사무소가 있는 울산, 대구, 광주, 의왕, 대구, 안산, 인천 등에서 추모단체를 중심으로 1인 시위와 항의서한을 전달하였다.

앞장 선 의문사유가족

“무릎이 너무 아파요…백발 노인이지만 날마다 국회 앞에서 국회의원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합니다.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눈도 침침하지만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을 편히 보내기 위해 국회의원들의 관심을 부탁드리며 간절히 머리 숙여 인사합니다.” (검시관법 제정을 촉구하며 허영춘 의문사유가족대책위원장님(허원근 일병 아버지)이 <한겨레>에 기고하신 글)

자식을 잃은 의문사유가족들은 의문사진상규명을 촉구하며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싸워오셨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억울한 일이 생기지 말기를 바라며, 이러한 일을 제도적으로 방지하고자 검시관법 제정을 위해 지금도 애쓰고 계신다.

1973년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가 운명한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는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공권력에 의한 사망”이라고 결정하였고, 법원은 국가가 유가족에게 손해배상을 하라고 판결했다. 이 과정에서 제대로 된 수사기록은 없었지만, 당시에 국과수가 작성한 부검감정서가 큰 역할을 했다.

지금 바로 법률이 제정되어도 충분한 인력을 확충하려면 10년이 걸린다. 현대사회에서 누구나 사고를 당할 수 있고, 그 죽음이 의문사가 될 수 있다. 국민의 인권을 존중하는 국회라면 이제라도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본 제도라 할 수 있는 검시제도의 마련과 육성을 위해 이 법안을 조속히 제정해야 할 것이다.
덧붙임

◎ 이형숙 님은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사무처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