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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_세상] “아플까봐, 그게 제일 무서워요”

중국에서 온 식당 노동자, 조선족 유현순(가명)씨

요즘은 국내에서도 심심치 않게 중국에서 온 ‘조선족’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가정부로 존재하기도 하고, 혹은 건설 현장의 노동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도 하다. 그 중에도 많은 조선족 여성들은 식당에서 일을 한다. 말이 그리 어렵지 않게 통하고 한국인과 다르지 않은 외모를 가지고 있는 등 다른 이주노동자들에 비해 조선족들이 갖고 있는 비교적 ‘유리한’ 조건으로 인해 식당에서 그/녀들을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우리가 싸워봤자 무슨 힘이 있나요?

유현순(가명)씨도 올해로 한국에 온지 3년이 다 되어가는 조선족 식당 노동자이다. 유현순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약간 다리를 절고 있었다. 약 20여일 전에 식당에서 일하다 부러진 발가락 때문이다.

“그 날에 손님들 많았어요. 그 집에 국 들고 막 뛰고, 또 손님들 오면 주문받고 그래야 되잖아요. 막 뛰다가 식탁에 걸려가지고 그 당시에는 진짜 부러진 거 모르고, 사람 많으니까 정신도 없었어요. 주문 다 받고 그러고 나니까 도저히 못 걷겠어요. 못 걷고 ‘다리에 문제 생겼다’고 그러니까 사모님이 ‘그러면 빨리 병원에 가든가, 어디 가라’고 ‘집에 가든가 어디가라’고. 그 당시에는 택시비 주고 집에 갔어요. 그날 저녁에 난 골절인지는 몰랐는데, 너무 아파가지고 이튿날에 병원에 가서 사진 찍으니까 골절이라대.”

하지만 유현순씨는 사고에 대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외국인 취업교육을 3일 동안 받고 수료증을 받았지만 보험에 가입되지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1인 이상의 사업장이라면 식당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보험에 가입되어야 하지만 절차상의 번거로움 등을 이유로 잘 적용되지 않고 있다. 보험 문제 때문에 일부러 일당 노동자를 선호하는 업체도 많다.

“전화를 하니까 막 화를 내면서 우리가 무슨 그런 부담을 하느냐고 우리도 다 죽어간다, 우리도 뭐 죽고살고 하는 이런 형편인데 자기가 주의를 안 해가지고 다리가 부러진 건데 왜 우리보고 그러냐고 사모님이 그래요. 제가 어이없어 가지고, 근데 막 싸우기 싫잖아요. 여기 외국에 와가지고. 또 우리가 싸워봤자 무슨 힘이 있어가지고, 또 부끄러워가지고……. 그만 두자고, 우리가 혼자서 속이 상해도 참고 있자고, 인생을 살다보면 뭐 손해 볼 때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자고…….”

병원에는 절대로 안가요

결국 그녀는 순전히 자신의 부담으로 부러진 발가락을 치료할 수밖에 없었다. 한 달에 이삼일 정도만 쉬고 꼬박 12시간씩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 130만원 남짓. 그나마도 아들의 학비와 고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고 남은 돈이 생활비가 된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약 8개월간 식당에서 먹고 자면서 생활했지만 열심히 일한 결과 지금은 좀 나아져 보증금 200만원에, 월 15만원 내는 지하 월세방에 산다. 난방비가 아까워 차가운 방에서 그냥 잔 적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병원비는 가장 큰 부담이다.

“병원에는 절대로 안가요. 내가 한 번 이가 아파가지고 병원에 가니까 의료보험 이런 게 없잖아요. 의료보험 그런 게 없으니까 너무나 너무나 많이 달라 해. 이가 아파가지고 약물 하나 이렇게 똑 떨구고 그거 몇 번 하니까 5만원 달라하던데요. 그 당시에는 놀라가지고……. 치료 다 받았는데 돈을 안 줄 수도 없고. 이제 다시는 안가요, 아무리 아파도.”

실제로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경계에 서있다. 넉넉하다고 말 할 수는 없어도 하루하루 겨우 꾸려나갈 수는 있는 형편이지만 몸이 아프면 당장 병원비는 큰 부담이다. 뿐만 아니라 일을 못하게 되기 때문에 생활도 순식간에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그녀는 “병원비가 무서워서 내 몸 어디 아플까 그게 제일 무섭다”고 말했다. 그래도 자신의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했다.

“친구들이 진짜 아파가지고 병원에 가서 입원하고, 1년 번 돈 병원에다가 다 때려 넣고 그렇단 말이에요. 그렇게 할 수 없이 다 죽어가고 그러면 할 수 없지, 그러면 수술해야지. 내 친구는 입원하고 해가지고 작년에 돈 번 거, 한 1천만원 거의 들었어요. 1년 동안 번 거, 모아 놓은 거 다 들어갔어요. 의료보험이 없으니까.”

중국 사람이니까 또 하지…

현재 많은 이주노동자들은 조금만 고생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국을 찾는다. 그러나 역시 많은 수의 이주노동자들이 일을 하지 못하고 병만 얻어 돌아간다. 직접적으로 사고로 인한 병만의 문제가 아니다. 식당노동이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의 일자리에 속할 정도로 이주노동자들에게 취업의 문은 힘들고 어려운 일에 집중되어 있다. 당연히 적절한 휴식을 취하기도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갈 때쯤 그들의 건강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그녀도 “처음엔 신체가 좋았는데, 한국에 와가지고는 아파도 병도 안보고 병원에도 안가고…….”라며 말을 흐렸다.

“12시간은 진짜 너무 길어요. 10시간만 해도 괜찮은데, 열두시간이면……. 아침에 또 한두 시간 전에는 일어나야 되잖아요? 또 들어와서 한두 시간 씻고 그러면 자는 시간이 몇 시간밖에 안돼요. 그리고 다음날 또 일어나서 일 나가고. 계속 그렇게 반복되니까……. 어떤 집은 13시간 일하는 집도 있어요. 13시간 일하면서 월급은 똑같고.”

그렇게 바쁘게 살다보면 여가를 꿈꾸기는 힘들다. 외식이나 영화를 보러 가본 적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녀는 웃으며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집에 가면 기진맥진해서……. 12시간을 계속 일하고 집에 가면 맥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쉬는 날에도 아무 데도 가기 싫어요.” 그녀는 그래도 중국에 있을 때가 돈은 적게 벌어도 여유 있고 편안한 삶이었다고 기억했다.

“한 식당에 갔는데 할머니 한 분이 예순이 다 되었어요. 근데 그 식당에서 그 할머니 교포 한사람에게 일을 다 시키는 거예요. 그 할머니는 말도 잘 안 통하니까……. 빨래도 휙 벗어가지고 씻으라 그러고 음식물 쓰레기도 할머니보고 다 버리라하고. 나도 마침 그런 사람 입장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할머니한테 뭐라뭐라 말하니까 할머니가 막 눈물을 흘려요. 내가 여기서 너무너무 괄시받는다면서. ‘그럼 여기서 일하지 말고 다른 데서 좀 찾아보지요’ 그러니까 나이가 많아서 일자리도 못 찾는다고 해요. 찾는 사람이 없다고. 그러니 참고 하는 수밖에 없죠. 젊은 사람들은 절대 그런 일 못해요, 그 집에서. 너무너무 힘들어요. 그치만 중국 사람이니까 또 하지.”

사람은 다 같잖아요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은 비단 일의 고됨만은 아니었다. 타국에서 왔다는 사실만으로 달라지는 사람들의 시선과 대우는 높은 강도의 육체노동보다 그녀를 더 힘들게 했다. 실제로 한국인이 아닌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임금을 적게 받거나 고용 자체를 거부당한 적도 있다.

“기분 좀 상하지. 능력은 다 똑같은데, 일은 교포분들이 더 잘 할 수도 있는데도. 그럴 때는 마음이 상하지 뭐. 근데 어떡해, 안 쓰겠다는데. 아무리 많이 배우고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아직도 생각하는 거는, 저거는 중국 사람이다. 틀려요. 그게 너무 싫어요. 사람은 다 같잖아요? 양심이라는 게 있어서. 말 한마디에 너무나도 싫어요. 그럴 때는 진짜 천금만금을 줘도 싫어요. 자존심이란 게 있잖아요. 일이 힘들고 더럽고 그런 건 둘째 치고, 상처 받고 거기서 일하는 게, 그거는 도저히……. 근데 그런 상황 많아요. 어떤 사람들은 욕도 막 얻어먹고 그래요. 욕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여기서 한 몇 년 일하고 중국 가면 부자 되겠네요’ 그런 말 듣기 싫잖아요. 실제로 말하면, 여기서 얼마나 벌었다고 중국 가서 부자 되겠어요? 말은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하지만 속으론 싫어요. 무시하는 발언.”

이주노동자이자 식당 노동자인 그녀에게 차별과 무시는 고용주로부터 오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손님으로부터도 차별과 무시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한 차별과 무시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게 일어나 그녀가 ‘기분 나쁜 것’ 정도로만 치부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심각한 구조적 차별이다. 일상적으로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폭력인 것이다. “사람들한테 진짜 그렇게 당해야만 정신을 차려가지고 내가……. 그 때가 돼야 어떻게 해야겠다는 그런 게 생기더라고.” 한껏 높아진 목소리와 “한국 그래도 좋은 곳이에요”라는 말에 묻어나는 냉소와 체념의 씁쓸한 어긋남이 조선족 이주노동자 유현순씨의 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