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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_세상] “아들한테 꼬지꼬지 파가지고 돈 받는 건 싫다”

현실성 없는 기초법 상 부양의무자 기준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다 나이 들고, 게다가 부양해 줄 수 있는 가족조차 없는 사람’은 빈곤의 벼랑 끝에 있다. 최근 한 여성단체의 조사에 의하면 65세 이상 여성의 23%는 소득이 한 푼도 없고, 45%는 소득이 50만 원 미만으로 확인돼 여성 노인의 빈곤이 예상보다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나마 가난한 사람을 국가가 구제해 준다는 ‘사회안전망’이 ‘보호망’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빈곤한 사람에게 또 다른 낙인과 상처를 주고 있다.

노름, 폭력, 그리고 가출

올해로 69살이 되는 강영순 씨를 만난 곳은 청량리역 근처이다. 그녀는 한 평도 채 못되는 거리에서 양파 노점을 하고 있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른 수급권자 신청을 위해 지난 6월부터 3개월에 걸쳐 그녀와 만남을 이어갔다.

청량리역 근처 시장에서 양파 노점을 하고 있는 강영순 할머니

▲ 청량리역 근처 시장에서 양파 노점을 하고 있는 강영순 할머니



어릴 적 강영순 씨 집은 동네 부자였다. ‘아가씨’ 소리 들으며 내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수를 놓으며 손에 물 하나 묻히지 않고 자랐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결혼 후 노름과 폭력을 일삼는 남편과 살면서 180도 달라졌다. 결혼 후 친정에서 대준 돈으로 영주에서 갈비집을 운영하면서 “돈을 갈쿠리로 쓸어 담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 날 장사를 위해 고기를 사와야 할 돈을 남편이 노름판에다 갖다 바치기를 수십 번. “한 번은 서방이란 놈이 애 어릴 때 우는 것 안 달래고 노름 돈 안 준다고 산 지 3일도 안 되서 날이 시퍼런 삽을 던져서 내 귀가 반으로 찢어졌어. 피가 철철 나고…” 반복되는 남편의 노름과 빚, 폭력 속에 몇 번이나 집을 나올 생각을 했지만, “애들이 밥도 먹고 할 정도 되어야 나가지. 그 어린 걸 놔두고 나가면 안 되지”하는 생각에 참고 또 참았다.

강영순 씨가 처음 남편을 떠난 것은 큰 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전학이 안 되는 큰아들은 시골에 두고, 둘째아들과 딸 둘만 데리고 서울로 왔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골의 갈비집을 접고 서울로 찾아온 남편과 다시 살아야했다. 시골 가게 정리하고 남은 돈으로 서울에서 시작한 사업은 남편이 노름판에 있는 동안 동업자가 말아먹고, 남편은 “툭하면 때리고 (맞아) 기절해 있으면 이웃사람들이 물 퍼붓고” 하는 생활은 계속되었다. 그녀가 두 번째로 집을 나온 건 큰아들이 대학 다니고 막내딸이 초등학교 5학년 될 즈음이었다. 이혼은 행여 자식에게 피해갈까 봐 생각지도 못했고, 내 한 몸 나가면 되지 하는 심정으로 가출을 결심했다.

“일어서면 궁디가 쪼글쪼글해. 살이 빠져서"

학력도 기술도 돈도 없이 집을 나온 40대 중반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집을 나와서 강영순 씨가 예순두 살에 노점을 시작하기 전까지 청계천에서 식당 주방일도 하고 보세공장에서 실밥도 따고 강남에서 파출부 노릇도 했다. “지금은 몸이 안 되지만, 이거 해 보니까 그래. 그때가 좋았어. 일주일만 댕기면 통장에 돈이 쑥쑥 올라가고” 그런데 지금 하고 있는 양파 노점으로는 하루 끼니 떼우기도 벅차다. “암만 못 팔아도 하루에 2만 원어치 팔아요. 2만 원 하루에 팔면 3천 원 남아요. 끼워주다 보면 2천 원 남을 때가 일쑤요.” 그나마 겨울에는 장사가 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여름에는 2만 원 짜리 양파 한 망 파는데 이, 삼일씩 걸리기도 한다. 특히 최근 2-3년 사이에는 더 그렇다. “너무 안 되니까, 여름 타느라 죽을 뻔했어.”

실제로 올 여름 그녀는 굶주림으로 정신까지 놓을 뻔했다. “라면을 딱 일주일 먹었어. 딱 죽겠더라구요. 정신 가더라구요. 라면만 너무 먹어가지고.” 강영순 씨가 라면만 먹을 수밖에 없는 데에는 설령 자신이 굶더라도 남한테 피해 주는 건 싫다며, 물세며 전기세며 공과금을 꼬박 꼬박 내온 성격도 한 몫 한다. “여름에 십 원도 안 생기는데, 내 먹을 것도 안 되는데다 의료보험 나가지, 안집에 전기세, 물세 나가지, 또 뭐 나가지. 똥이 돈에 튀지 뭐야. 또 주민세 나가지. 아, 열받더라구. 돈이 착착 쓸려 나가요. 나 돈 십 원도 안 써. 차비 낸 것도 없어요. 아침도 안 먹었어. 저녁도 안 먹고. 복숭아 하나 깎아 먹었어요. 물 먹고 보리차 먹고 약 먹고.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은데 살이 쪽 빠졌어요. 일어서면 궁디가 쪼글쪼글해. 살이 빠져서.” 이런 상황에서 장사가 더 안 될 경우 강 씨가 세운 대책은 “지금 있는 전세를 사글세 돌리고 고거 빼먹고 살다가 안 되면 약 먹고 죽는 거”였다. “우선 내 사는 동안에 먹다가 내일 밤이라도 스르르르. 나 고거 밖에 생각 안나. 그렇다고 이 집 가서 밥 얻어먹고, 저 집 가서 밥 얻어먹고, 그거는 해서는 안 되지.”

빈곤해도 수급권자 될 수 없다?

전국노점상연합과 빈곤사회연대 상담을 받아 강영순 씨는 지난 6월 국민기초생활수급을 받기 위해 제기1동 동사무소를 찾았다. 동사무소 사회복지담당 공무원의 1차 조사 결과, 월 소득 400만 원이 넘는 둘째 아들이 있고, 결혼한 막내 딸 또한 매달 20만 원은 부양비를 줄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수급대상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서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수급권자’는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부양의무자가 있어도 부양능력이 없거나 부양을 받을 수 없는 자로서 소득인정액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자로 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그러나 강 씨가 남편의 노름과 폭력 때문에 집을 나온 이후 아들, 딸에게 도움을 받기는커녕 몇 년 째 연락조차 안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되지 않았다. 사회복지담당 공무원에 따르면, 10여 년 전 그녀가 강남에서 파출부로 일할 때 직장에 다니게 된 둘째 아들이 찾아와 6개월 정도 같이 살았던 기록이 남아 실질적인 가족관계 단절로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결론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부양의무자기준에 따라 부양 능력이 있는 아들, 딸에게 도움을 받으라는 것이다.

동사무소에서 알려준 주소를 들고 서울에 있는 둘째 아들을 찾아가 부양의무자 기준이란 것 때문에 강 씨가 수급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을 전했다. 하지만 그 아들은 20년 전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이혼 처리됐다며 “아버지는 우릴 안 버렸지만 버리고 나간 건 어머니예요. 자식들은 전부 아버지 이름 밑으로 가 있고 법적으로 어머니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데, 부양의무자로 찾아왔다는 것이 신기하네요.”라며 어머니를 도울 마음이 아직까진 없다고 했다.

이혼 사실을 근거로, 올해 7월 초 동사무소에 부양의무자 조사를 다시 의뢰했다. 이혼했을 경우, 자식이 한 쪽 부모를 부양하고 있으면 다른 한 쪽은 부양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결혼한 딸의 경우도 부양의무가 있지만 시부모를 부양하고 있을 경우 친정부모까지 부양할 의무는 없어진다. 추가 조사 결과 아들의 경우 아버지를 부양하고 있지 않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부양의무는 여전하다고 나왔다. 그러나 아들은 부양거부의사를 밝힌 상황이다. 딸의 경우는 연락이 안 된 채 7월 한 달이 지나갔다. 8월 동사무소 사회복지담당 공무원이 바뀌고 인수인계가 제대로 안된 상황에서 강 씨의 수급신청 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올 여름 라면으로 버티다가 정신이 나가는 경험을 했다는 강영순 씨는 동사무소 사회복지담당 공무원에게 부양비는 나중에 아들에게 받더라도 일단 우선보호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걸 내가 호소를 하면, 어미가 되가지고 도리가 안 되고, 정부에서 조사를 하니까…정부에서 주더라도, 우리 아들이 원래 손에 들어가면 그만이요. 뭐든지 손에 들어갔다 하면 나오는 걸 못 봐요. 그러니까 어떻게 좀 조치를 해주세요.”

이렇게 힘들 줄이야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하면 부양의무자(할머니의 경우 둘째 아들과 막내 딸)가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정되면 일차적으로 자식들이 부양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부양의무자가 부양을 거부할 경우, 정부에서 우선적으로 생계비를 지급하고 그 부분은 부양의무자에게 강제로 징수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가 이런 방법까지 써서 자식들에게 부양비를 받아 생활하는 경우는 실질적으로 가족 간에 의절한 경우 등 극히 소수다. 강 씨 또한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생활고를 겪었고, 아들이 도와줄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뒤에 힘들게 내린 결정이었다. 정부가 지원하지 않고 자식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의 대안은 전세금을 빼서 먹고 살다 그것도 없으면 죽는 것밖에 없었다. “웬만하면 내가 얘기를 안 해요. 근데 너무 인제는 나이가 있으니까, 다리가 아파, 다리가 아파 막, 이제 장마가 돌아오니까 이 관절염이 있어가지고 다리가 아파 죽겄어. 나 요럴 적에 쌀이라도 한 가마 주면 장마에 들앉아 먹을까 싶어요. 집에 쌀 한 톨 없어요. 지금. … 내가 산 들 얼마나 살어. 그 동안이라도 먹고 살다 죽구로. 억지로 살 필요는 없어. 자살하면 (아들 딸) 저거가 망신이요.”

정부에게 선보호를 요청했지만 강영순 씨는 두 달이 넘게 걸린 상담, 조사 기간 동안 당신이 집을 나왔기 때문에 “아들한테 꼬지꼬지 파가지고 돈을 받는 건 싫”은 마음과 “지가 빈말이라도 나 좀 위로를 해 줬으면……. 전혀 오지도 안하고, 저거 사는 집도 내가 몰라요.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까 괘씸”한 마음 사이에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내가 이거 이래놓고 얼마나 고민한 줄 알아요? 밤에 잠이 안 오면 걱정이 되요. 그러니께 내가 요새 내 머리에 돌 하나 얹어 놓은 것 같애. 머리가 무겁고,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애. 귀도 멍멍하고, 신경을 자꾸 쓰니까. 괜히 내가 건드렸다 싶어. 후회도 나. 그것도 다 벌집 쑤셔놓는 거 매로, 다 시끄러우니까.”

지난 8월 23일 강 씨는 생계보장비용은 부양의무자인 아들에게 징수할 것이라는 조건과 함께 수급자로 선정되었다. 오전에 결과를 들은 강 씨는 “오늘부터 새 세상에 사는 거 같아. 이제 쌀도 있으니까 밥도 해먹고 도시락도 싸와서 먹고 해야지 아이고 좋아라”하며 손뼉을 쳤다. 그러나 오후에 만났을 땐 “가슴이 답답해서, 부글부글 끓어서, 약하나 먹고 나니까 좀 풀렸어. 이래 된 게 한 편으로는 좋지만 한 편으로는 억울하잖아. 내가 평생 열심히 살았는데 이것 밖에 안 되니까. 뼈 빠지게 일했는데 어려울 때 어디서 돈 만 원 짜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고. 동네 사람한테도 창피하고. 내 인생이 서럽고.”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되어야

쌀이라도 한 포대 주면 먹고 살텐데 하는 심정으로 국가의 보호를 요청했다가 강 씨가 살아온 인생이 서럽도록 만든 것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가족부양우선의 원칙 때문이다. 정부에 의한 보호보다 부양의무자에 의한 보호가 먼저 행해져야 하고, 부양능력이 있는 부양의무자가 있을 경우에는 부양의무자로부터 보장비용을 강제 징수할 수 있다는 규정 탓이다. 현행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부양의무자 기준은 제정 당시부터 논란이 되어 여러 인권사회단체는 부양의무자 기준의 삭제를 지속적으로 정부에 요구해왔다. 2005년 개정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부양의무자로 '수급권자의 1촌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로 정하고 있다. 개정 전에 정의되었던 '생계를 같이 하는 2촌이내 혈족'인 형제자매는 제외되었지만 하지만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단지 부양의무자의 기준을 축소하는 것으로 머무를 수는 없다. 부양의무자의 존재여부와 무관하게 인간다운 생존은 공동체가 책임져야 하는 몫이다.

평생 열심히 일하며 살아온 사람이 나이 들어 생계조차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가에게 생활보호를 요청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다. 이에 대한 기본적인 생계보장의 의무는 가족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국가에게 있다. 국가의 책임을 가족에게 전가함으로써 가족으로부터 실질적 부양을 받고 있지 못한 많은 노인들이 굶주림과 질병, 낙인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강영순 씨처럼 정부가 강 씨의 생계보장비용을 아들로부터 강제로 징수해 지급하는 경우는 평생 안고 가야할 심리적 고통까지 덧붙이는 격이 되고 있다. “쌀 한 포대 얻어 먹을려다 된통 당했다”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전국노점상연합이나 빈곤사회연대 같은 단체들이 법에 있는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라고 데모도 하고 제안도 하고 있으니까 법이 바뀌면 아들이 안 도와줘도 정부가 직접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는 현재로서는 기약할 수 없는 희망의 말을 건네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 씨가 목소리를 높인다. “나는 그걸 원해요. 작게 받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