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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40년만에 실토한 고문과 조작

국정원과거사위, 인혁당·민청학련·인혁당재건위 조사결과 발표

국정원이 과거 대표적인 조작사건으로 지목되어 온 인민혁명당(아래 인혁당) 사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아래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해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수사과정에서 고문을 자행해 조작했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7일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 아래 국정원과거사위)는 "이들 사건은 학생시위로 인한 정권의 위기상황 속에서 제대로 수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사건의 실체가 매우 과장된 채 발표되었고…발표에서 규정된 인혁당이나 민청학련의 성격은 그대로 수사지침이 되어 짜 맟추기가 진행되어 이들 단체를 무리하게 반국가단체로 만들어간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 과정에서 "불리한 진술을 강요하는 과정이나 핵심인물들의 소재를 찾기 위해 고문이나 가혹행위가 자행"됐다고 덧붙였다.


1차 '인혁당' 사건…'북파공작원'을 '남파간첩'으로 조작

이른바 '1차 인혁당' 사건은 지난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위기에 빠진 박정희 정권이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8월 14일 중앙정보부가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혁당을 적발'했다면서 이들 인혁당 관련자들이 '북괴의 지령'으로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배후조종했다고 발표한 사건이다.

이에 대해 국정원과거사위는 "당 수준에 이르지 못한 서클 혈태의 모임을 가져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며 "5·16 군사쿠데타로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이 전면 금지되자 혁신계 주요인물들이 장차 합법화될 혁신정당 활동에 대비하여 혁신계 청년들의 통합을 논의해오던 활동이 드러난 것으로 '국가변란'을 기도한 반국가단체로 실재했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인혁당이 북의 지령에 의해 조직되고 활동한 근거로 창당을 주도한 남파간첩 김영춘과 창당에 참여한 뒤 월북했다가 1967년 남파된 김배영의 존재를 제시했다. 하지만 국정원과거사위는 중앙정보부의 내부문건 등을 분석한 결과 '남파간첩 김영춘'이라 발표한 인물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4·19 후 사회대중당 후보로 고성에서 민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전 동아대 철학과 교수 김상한이라고 발표했다.

국정원과거사위는 국정원 내부문건인 '김상한 월북사건 진상조사 보고'를 분석한 결과 "김상한이 남파간첩으로서 북으로 귀환한 것이 아니라, 남한의 다른 대북정보기관으로부터 특수공작 임무를 받고 북파된 것"이며 이 정보기관은 "과거 좌익활동 경력 소지자로서 북파 후 북괴에서 신뢰를 득할 수 있는 자를 물색 중, 교수출신 김상한의 개인적인 약점을 이용하여 월북시키면 공작성과거양이 기대"된다며 북파공작원으로 선발했다고 밝혔다. 또 인혁당 사건 발표 당시 "중앙정보부는 김상한이 대북정보기관에 의해 북파된 사실은 몰랐지만, 적어도 그가 남파간첩이 아니라는 점은 파악하고 있었다"며 "중앙정보부가 허위사실을 발표하여…스스로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한 것"이라고 국정원과거사위는 지적했다.

김배영의 경우 당시 중앙정보부는 인혁당 창당위원인 그가 1962년 일본을 경유해 월북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인혁당 사건 발표 3개월 후인 1964년 11월 월북한 것으로 조사결과 밝혀졌다. 국정원과거사위는 "중앙정보부가 김배영의 소재를 확인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김배영이 월북하였다고 발표한 것은 학생시위의 배후에 친북세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1964년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가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의 '조종'으로 발생되고 진행되었다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북괴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도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수사과정에서의 고문에 대해서 국정원과거사위는 △제일은행원 이종배(일명 이상배)가 현장검증을 다녀오는 과정에서 또다시 고문당할 것이 두려워 투신했고 △허작은 고문을 견디지 못해 안경알로 자해해 중상을 입었으며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반이 피의자들의 고문상처를 확인해 국회에 보고했고 △수사에 참여한 장원찬 검사도 도예종에게서 고문의 상처를 확인했다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며 "수사과정에서 고문이 자행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사건을 맡은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 등 검사들은 자백 이외에 혐의를 입증할 별다른 증거를 찾을 수 없자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며 기소장에 서명할 것을 거부했다. 이에 중앙정보부 차장 출신의 신직수 검찰총장 등 검찰수뇌부가 사건을 수사하지도 않은 당직검사를 통해 사건 관련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자 이용훈·김병리·장원찬 검사가 이에 반발해 사표를 제출하기도 했다.


'민청학련' 사건…대통령 담화문에 따라 짜맞추기 수사로 조작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은 1974년 민청학련이 조총련·인혁당재건위 등의 배후조종을 받으며 국가변란을 기도했다면서 유신정권이 1034명을 체포해 253명을 구속하고 비상보통군법회의가 △7명 사형 △7명 무기징역 △12명 1심기준 징역 20년 △6명 징역 15년 등 중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1972년 10월 탈법적 유신 선포 이후 1974년 4월 3일 서울시내 각 대학에서 유신철폐 시위가 일어나자 이날 밤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하에 그들과 결탁하여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상투적 방편으로 △'통일전선'의 초기 단계적 지하조직을 우리 사회 일각에 형성하고 반국가적 불순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확증을 포착했다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해 민청학련 가입, 관련자와의 회합·통신·연락, 학생들의 출석·수업·시험거부, 학내외 집회·시위·농성 시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한 바 있다.

국정원과거사위는 "민청학련은…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조직된 반국가단체가 아니라, 반유신투쟁을 위한 학생들의 연락망 수준의 조직이 유인물에 표기한 조직명칭에 불과한 것"이라며 "수사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표된 대통령 담화문에서 이미 민청학련을 공산주의자와 결탁하여 인민혁명을 수행하는 조직이라고 규정하였기 때문에 중앙정보부의 수사방향은 처음부터 민청학련 주요관련자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고 밝혔다.

국정원과거사위가 조사한 문건 '수사상황보고 92보'에 따르면 △수사의 초점은 "관련자(특히 주동자)는 공산주의 사상의 보지자임을 입증"하는 것이었고 △신원조사를 통해 "가족 중 부역자, 혁신계, 월북자, 행방불명자, 전과자를 찾아내며 △배후관계와 관련해서는 "간첩의 지령에 의한 것이다. 재일조총련의 지령이다. 국내 혁신세력의 조종하에 움직이고 있다. 북괴 대남방송을 청취하고 그대로 행동했다"라는 진술을 받아내라는 지침을 내리고 있다.

중앙정보부의 '민청학련 사건 관련 일본인에 대한 수사지침'이라는 문건은 "초기수사단계에서 조서에 올린 사항으로서 범죄요건에 배치되거나 일본인의 관여사실을 부정하게 될 자료로 쓰일 수 있는 부분, 전후 모순 되는 부분 삭제" 등 일본인들의 진술을 어떤 방식으로 삭제·왜곡할 것인지를 담고 있다.

국정원과거사위는 민청학련 사건 수사과정에서도 상당수의 학생들에게 구타·물고문·잠 안 재우기·모욕과 협박 등 가혹행위가 관행적으로 가해졌다고 밝혔다. 또 당시 수사에 참여한 전직 직원 중에서 고문사실을 인정하거나 고백한 사람은 없지만 고문상황과 방법 등에 대한 피해자들의 설명이 일관되고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닌 중립적인 인사들인 교도관·파견경찰·검찰서기 등이 고문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고 밝혔다.


'인혁당재건위' 사건…"파견경찰이 전기고문 장면 목격"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서도원, 도예종 등은 1969년부터 지하에 흩어져 있는 인혁당 잔재세력을 규합, 인민혁명당을 재건하고 대구 및 서울에서 반정부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사주했다"고 발표한데 이어 같은해 7월 비상보통군법회의가 서도원·도예종 등 인혁당 관련자 7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이에 앞서 같은해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민청학련 사건 수사상황 발표에서 "민청학련은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 재일 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 공산당원, 국내 좌파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과거사위는 "'인혁당재건위'란 단체는 중앙정보부와 군사법정 검찰부가 검찰 송치 직전에 수사의 편의상 붙인 명칭일 뿐 실제로 존재한 지하조직의 정식명칭은 아니"라며 "실재했던 조직이 아니다"라고 결론내렸다. 또 "연루된 혁신계 인사들의 활동인 반박정희활동 내지 반정부활동일수는 있어도 체제전복이나 국가전복기도행위로 볼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에서도 중앙정보부가 고문을 자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 수사를 담당한 서울 성북서 파견경찰 전재팔은 "수사관이 군용전화 손잡이를 잡고서 기대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손잡이를 돌렸다"고 국정원과거사위의 면담조사에서 진술했다. 당시 담당검사 송종의와 중앙정보부 직원, 다른 파견경찰은 고문사실을 부정했지만 △피고인들이 항소·상고이유서를 통해 구타·물고문·전기고문 등 다양한 유형의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고문일시와 고문수사관의 이름 등을 구체적으로 진술했으며 △교도관과 서울구치소 수감자 등 3자적 위치에 있는 목격자들이 고문에 대해 증언했다며 "사건 조사과정에서 고문이 행해졌다는 정황을 확인"했다고 국정원과거사위는 밝혔다.

1977년 12월 29일 작성된 '인혁당사건 공판조사 변조 발설자 내사 결과보고'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는 '반국가단체' 결성의 유일한 증거인 자백이 담긴 공판조서가 변조되었음을 지적한 조승각·김종길 변호사와 가족대표 임인영 등을 중앙정보부에 연행하기도 했다. 조 변호사는 1975년 2월 공판조서 중 피고들의 진술이 법정에서의 실제 답변과 다르게 기록된 부분에 밑줄을 치거나 엑스(X)자 표시를 해 이를 복사하여 피고인 가족들에게 교부했던 것. 하지만 대법원은 검찰신문조서에 기재된 내용을 피고인들이 공판에서도 인정했다면서 1심 공판조서를 판결문에 인용했다.

결국 대법원은 1975년 4월 8일 피고인 22명 전원의 상고를 기각했고 도예종·서도원·이수병·송상진·하재완·김용원·우홍선·여정남 등 8명에게는 사형 확정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국정원과거사위는 "전격적인 사형집행과 관련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사실을 확인해 줄 문서나 증언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사전에 국방부, 법무부 등의 긴밀한 협조와 준비가 있어야만 사형이 집행될 수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형 확정 즉시 처형은) 이미 청와대 선에서 정해져 있었던 것으로 무리없이 판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국정원과거사위는 △피해자들의 피해회복을 위한 국가 차원의 적절하고 신속한 조치 △국가안보의 이름 아래 국가보안법을 이용해 시민들의 헌법적 권리를 침해한 과거와 결별하려는 국가차원의 결단 △재발방지를 위한 부단한 자기 반성 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날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아래 인혁당대책위)와 천주교인권위는 성명을 내고 "사건을 조작한 것은 중앙정보부이지만, 사법부가 권력의 편에서 부끄럽고 끔찍한 사법살인을 저질렀다는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며 "법원은 올해 안에 인혁당 사건의 재심개시를 결정하고, 재심을 통해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야한다"고 요구했다. 또 "사법적 명예회복은 물론이고, 피해자들과 가족들을 위한 정부의 노력이 시급히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족들과 인혁당대책위는 지난 2002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아직 재심 개시여부조차 결정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출범한 국정원과거사위는 △KAL 858기 폭파 △민청학련·인혁당 △동백림 유학생 간첩단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 △김대중 납치 △정수장학회 △중부지역당 사건 등을 7대 우선조사 대상으로 선정하고 민관합동조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