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으로 읽는 세상

인간이 존엄한 나라에서, 씨 유 어게인

판문점선언 1년, 장기수 붓글씨 전시회 <선(線) 위에 선(立)>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마지막 회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을 움직이게 했다. 이름 없는 의병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불러낸 섬세한 재현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느꼈다. 1907년이었다.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이 일본제국에 의해 퇴위 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들이 무기를 들고 항일투쟁에 나섰다. 해산된 군인도 합세해, 일본 통계로도 15만 명이 봉기했다는 정미의병이다. 전국의 의병들은 13도 창의군으로 부대를 편성해 치열하게 싸웠으나 대부분 사살 당했고 일제의 토벌을 피한 이들은 만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만주로 간 고애신('미스터 선샤인'의 가상 인물)은 함께 했던 동지들을 기억하며 다짐한다. "독립된 조국에서 씨 유 어게인."

독립된 조국에서

십여 년이 흐른 1919년 3월,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기 위해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조선만세소요사건'으로 부르며 수천 명을 죽이는 진압에 나섰다. 이듬해, 충북 제천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13도 창의군 호서대표로 싸우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임을 당한 이강년의 좌종사 이주승이 그의 아버지였다. 마을 인근의 월악산 자락에는 제천 의병들이 지내던 큰 굴이 있었고 그곳에서 어떤 꿈들이 피어나고 있는지 아이도 모르지 않았다. 열일곱 살에 찍었다는 사진 속 아이는 세 봉우리가 솟은 정자관을 쓰고 두루마기를 차려 입었다. 무표정한 듯 평온한 얼굴은 무언가 자신 있다고 말하는 듯 다부지다. 한학을 배우다가 새로운 학문을 만나게 될 때의 마음이 그랬을까?

열여덟 살이 되던 해 그는 경성영창학교에 입학했다. YMCA의 전신인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설립한 학교였다. 수학, 과학 등의 교과보다 책 읽는 일이 좋았다고 한다. 일본어로 된 책을 보며 그는 빈곤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됐다. 그가 감명 받았던 책의 목차는 이렇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가난한가/왜 많은 사람이 가난한가/어떻게 가난을 없앨 수 있는가" 그는 좋은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기 위해 '월악 동지회'라는 독서모임을 만들기도 했고, 의병들처럼 무장봉기를 준비하던 조선민족해방협동당을 뒤에서 지원하기도 했다. 일제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서 고문도 당했다. 일본이 망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구속되는 시절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해방은 스물다섯 살 되던 해 시작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조선 민족의 해방은 다난한 운동사상에 있어 겨우 새로운 일보를 내딛었음에 불과하나니" "완전한 독립 국가의 건설"과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 등이 이루어지도록 행동할 것을 선언했다. "사람답게 사는 데 조금이라도 이바지"하고 싶었던 그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는 주장을 담은 글을 쓰기도 하고 영등포에서 노동자를 조직하는 활동에도 나선다. 그러나 독립된 조국에서 그의 이름 이구영은 오랜 시간 동안 기억될 수 없었다.

그의 삶을 삭제해온 국가

친미 성향의 이승만이 외세에 저항하는 듯 보이는 반탁운동을 조직하는 혼란스러운 정국이었다. 쌀과 직업과 권리를 주는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중들의 저항은 이어졌다. 미군정 여론조사에서 사회주의를 원한다는 사람이 70%에 이르는 시절이었다. 이승만은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제주 민중을 학살한 후, 1948년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 권력을 쥔 그는 국민보도연맹의 창설, 반민특위 습격을 감행한다. 노동자들과 함께 한다는 이유로 이구영도 두 차례나 감옥에 갇혔다.

독립된 조국에 두 개의 정부는 인정될 수 없었다. 남은 대한민국의 북쪽을 북한이라 부르고, 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쪽을 남조선이라 불렀다. 서른 살이 된 이구영에게 전쟁 소식이 들려왔다. 북에서 넘어온 군대는 부산까지 내려갔다. 북진통일을 부르짖던 대통령은 '나 홀로' 피난했고 평화통일을 바라던 민중들은 마을을 재정비했다. 이제 곧 해방인가 싶던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달라지고 인민군은 퇴각한다. 그때 이구영도 38선 이북으로 넘어갔다. 남쪽에 가족을 두고 북으로 떠나던 이구영이 마음속에 담았던 인사가 이러했으리라. "해방된 조국에서 씨 유 어게인."

북에서 한문을 가르치며 지내던 이구영은 1958년 남조선으로 가서 해방을 완수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두렵지만 설레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며, 자신 앞에 놓인 역사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형법보다 국가보안법을 먼저 만든 대한민국에서 그는 '적'일 뿐이었고 그의 이름은 '남파공작원'이었다. 부산에서 체포된 이구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다시 감옥에 갇혔다. 4.19혁명 이후 20년으로 감형되었으나 곧이어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시대에는 더욱 극악한 폭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상전향공작.

때로는 고문과 백색테러의 모습으로 때로는 가족과 지인의 글썽이는 눈물로 때로는 편지 왕래를 중단시키거나 밥을 줄이는 방식으로, 전향하지 않고서는 감옥에서 살아나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협박이 이어졌다. 혹독한 시간이었다. 1931년 일제가 시작한 사상전향제도는 이승만 정부에서 보호감호제도로 다시 태어났고 박정희 시대에 사회안전법으로 자리를 굳혔으며 1989년 이후 보안관찰법으로 이어지고 있다. 1980년 이구영은 가석방으로 출소했으나 국가는 그대로였다.

분단의 선(線)

북이나 남이나 상대방의 실패와 패배의 증거를 만들어야 했다. 전향하지 않은 사람은 존재할 수 없었다. 같은 이유로 자기 체제의 문제를 드러내는 목소리는 용납할 수 없었다. 독재를 반대하는 것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가 되어버렸다. 학살, 사법살인, 의문사, 고문, 간첩조작, 강제징집 등 국가는 어떤 사람들을 삭제해버렸다. 그 자리에 선(線)이 세워졌다. 주권의 경계를 확인하는 국경선이었다면 북의 삼촌과 남의 조카가 만난 것이 죄가 될 리 없고, 전쟁이 멈춘 자리를 표지한 휴전선일 뿐이라면 종전선언을 반대한다는 괴이한 주장이 나올 이유가 없다. 분단의 선은 정치범이 수감된 감옥에 있었고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의 핏줄에 있었고 국가보안법 위반 유죄를 선고하는 재판정에 있었다.

선 안의 우리는 '몰라야 하는 것'들에 갇히게 되었다. 일제의 사상전향 시도에 저항하며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우러러보면서도 그가 사회주의자거나 북과 관련 있다면 선뜻 내세우지 않거나 아예 모른다. '건국'의 시점에 대한 각기 다른 주장에서 드러나듯 북한의 역사가 삭제된 채로 우리는 온전한 역사를 살 수 없다. 일본 전범 처리를 흐지부지 만들면서 동아시아 정의를 봉쇄한 미국이나 반미 선동을 멈추지 않는 북한을,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아하거나 싫어한다. 판문점선언도 분단의 선에 갇혀 있다.

지난해 4월 27일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을 이끌어낸 남북정상회담은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기대하게 했다. 역사상 최초로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될 때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던 만큼 기대가 커졌다. 그러나 올해 하노이에서의 두 번째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로는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북한이 더 변해야 한다는 주문들이 많다. 북한을 변화의 주체로 보기보다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70여 년에 걸쳐 만들어진 분단의 선이 워낙 견고하니, 북한은 적이 아닐 수 있더라도 악(惡)이 아닐 수는 없는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북한을 변화의 대상으로만 본다면 남한도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배드딜, 노딜, 스몰딜, 빅딜과 같은 말의 잔치 속에서 정작 대한민국은 무엇을 '딜'할 수 있는지 말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과 미국이라는 두 바퀴로 움직이는 차의 핸들을 잡는 것으로 평화체제에 이를 수 있을까? 남한도 엔진이 되어야 한다. 남한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발견하면서 함께 변화해야 한다. 함께 변화하려면 서로 알아야 한다. 그런데 선 안에서 선 너머의 북한을 이해하기란 당장은 쉽지 않다. 섣부른 민족주의는 동화정책이라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차라리 남한사회에 대한 이해를 시작하는 게 낫다.

선 위에 선 사람들

분단의 선을 만나면 적어도 스스로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될 것이며, 잠시 머물러본다면 우리의 삶과 미래에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될 것이다. 분단의 선이 가로지르고 있는 남한사회. 선 바깥은 권리도 삶도 역사도 존재해서는 안 되는 자리였다. 그래서 형기를 마친 사람을 다시 가둬도, 증거 없이 사형을 언도해도 문제되지 않았다. 이웃이 배척하고 가족이 고립되어도 '자초한 일'이라며 비난당할 뿐이었다. '빨갱이'라는 이름이 붙은 무권리 상태가 용인되었다. 분단의 선을 따라 인간의 존엄이라는 가치가 삭제되고 있었다. 사상도 불가능해졌다. '어떻게 가난을 없앨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데 길잡이가 되는 이념은 한국사회에서 불온한 것의 이름일 뿐이다. '이념적'이라는 말 자체가 비난의 수사로 통용되는 사회다. 선 너머를 절멸하려는 국가는 역사도 삭제해왔다.

그 자리에 사람들이 있었다. 선이 먼저 있어서 거기까지 간 게 아니다. 저마다의 꿈을 품고 삶을 이어가는 어떤 자리에 국가가 선을 그었을 뿐이다. 국가는 사람들을 선 안으로 제압하거나 선 바깥으로 추방하려 들었다. 선 위에 선 사람들은 선을 긋는 국가의 폭력에 맞서 열 개의 발가락으로 땅을 움켜쥐듯 선 위에서 버텼다. 그러므로 그들은 분단의 선이 낳은 폭력을 고발하는 동시에 폭력으로 무너뜨릴 수 없는 존엄의 자리를 지켜낸 사람들이다. 인간의 해방을 도모하며 사상을 토론하는 사회로 가고자 할 때 우리는 이 선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4월 30일까지 열리는 전시회 <선(線) 위에 선(立)>에서는 국가가 지우려 했던 사람들 류낙진, 박성준, 석달윤, 신영복, 안승억, 오병철, 이구영, 이명직, 이준태가 붓으로 써 내린 선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의 글씨와 이름도 그리로 가는 길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인간이 존엄한 나라에서, 씨 유 어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