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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은 강요할 수 없다

[세계인권선언의 현재적 의미] 제18조 사상․양심․종교의 자유

세계인권선언 제 18조;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는 자신의 종교 또는 신념을 바꿀 자유와 선교, 행사, 예배, 의식에 있어서 단독으로 또는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공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자신의 종교나 신념을 표명하는 자유를 포함한다.


사상․양심․종교의 자유의 의미

로댕의 유명한 조각 작품,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그런데 이런 광경은 어떤가? ‘생각하는 사람’에 철창을 두르는 것이다. 철창 안에 갇힌 생각하는 사람을 한국 사회는 ‘사상범’이라 불러왔다. 즉, 생각하는 사람이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인권단체에서는 ‘양심수’(prisoner of conscience)란 말을 써왔지만, 생각 때문에 갇혔다는 것에서는 마찬가지다.
사상․양심․종교의 자유는 생각하는 사람에게 철창을 두르는 일체의 간섭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이 간섭과 억압은 국가권력으로부터 올 수도 있고, 돈․광고․인사 등의 불이익을 갖고 협박하는 기업이나 재단으로부터 올 수도 있고 절대․유일의 진리임을 내세우는 종교로부터 올 수도 있다.
그럼, 외부로부터 억압과 강제만 없으면 자유로운 걸까? 그렇게만 생각하면 자유가 너무 작고 초라해 보이지 않는가? 자유는 개인과 사회의 진보를 위한 더 적극적인 의미도 가진다. 생각하는 자유, 옳고 그름을 따져보는 정신활동, 창조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활동이 있어야 인간은 자신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다. 나아가 그런 활동을 동료인간과 더불어 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할 수 있다.

‘사상’, ‘양심’,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세계인권선언은 정의내리지 않았지만, 이에 대한 정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상․양심․종교’란 ‘세계를 향해, 사회를 향해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태도’를 아우르는 말이다. 그것은 무슨 주의나 신념, 절대자에 대한 믿음 등 ‘자기 자신과 세상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눈이고 힘’이다. 이것을 인권에서 목록으로 만든 것이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학문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교육의 자유’ 등이고 이들을 아우르는 제일 폭넓은 개념이 ‘사상의 자유’라 할 수 있다.

정신활동의 자유는 신체활동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인간생활에 필수적이다. <혹성탈출>이라는 1960년대 영화가 있다. 우주인들이 지구로 귀환해보니 원숭이들이 지배하고 있고, 인간은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우주인들은 자신들이 지구가 아닌 다른 혹성에 불시착한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곳은 지구가 맞았고, 인간들이 그런 운명을 맞은 것은 ‘생각하는 능력’이 제거됐기 때문이었다.
우리 현실에서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제거하려 드는 것은 검열과 통제, 위협과 폭력, 강요와 주입 등이다. ‘당신 생각이 불순해(삐딱해)!’라는 한마디가 얼마나 큰 파괴력을 지니며 ‘생각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가 얼마나 큰 무력감을 느끼게 하며, ‘그렇게 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가 얼마나 큰 공포를 느끼게 하는가.

공포를 느끼게 하는 한 마디

사상의 자유를 중히 여기는 사람들도 때론 영글지 못한 생각, 변변치 못한 생각, 도덕적으로 칭찬할 만한 게 못되는 생각은 허용해선 안 된다고 여길 때가 있다. 그런데 누가 그런 판단을 내릴 권한을 가질 수 있는가? 누구의 기준에서 변변치 못하고 부도덕하다는 것인지 잣대의 정당성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가 꼭 필요한 것이다. 자유로운 표출과 충돌과 논증 속에서 생각은 변화․발전하는 것 아닌가. 모자라고 틀린 것으로 여겨졌던 생각이 진주로 드러난 사례는 역사 속에 넘쳐난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상 무지였고, 옳다고 여긴 것이 오류였음을 깨닫게 하는 자극은 인간 사회에 유익한 것이었다. 토론과 논증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상․양심의 자유가 아니다.

사상․양심의 자유란 ‘거참 훌륭하네, 멋있네.’ 할 만한 양심만 갖는 자유는 아니다. ‘민주주의의 투사다, 사회주의자다’ 하는 식의 무슨 주의자만 갖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둘러싼 오해를 살펴보자. 살상무기를 들 의무를 이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평화와 종교에 대한 신념 때문에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주로 얘기했기에 생긴 오해일 텐데, ‘군대에 가는 것은 비양심이고, 안 가는 건 양심이냐?’는 오해이다. ‘양심의 자유’에 따르면 굳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는 재외동포가 애국심에서 일부러 자원입대하는 것도 양심이고, 살상무기를 들고 전쟁연습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군대를 거부하고 감옥을 택하는 것도 양심이다. 또는 ‘나는 군대 같은 조직생활이 너무 무섭다. 나의 몸과 마음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는 것도 양심이다.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내가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내 인격의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대한민국 헌법재판소)에 따라 그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양심의 자유다. 즉, 병역거부자들은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따라 그런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란 표현을 쓰는 것이지, 자신과 다른 의견의 양심은 비양심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다만 다양한 양심 중에서도 병역거부를 택한 양심은 ‘어떤 세계관, 주의, 신조’라 할 수 있는 것에 도달한 양심이라 할 것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conscientious objection)란 용어는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널리 채택하고 있고, 1987년에 유엔은 의무복무제를 택하고 있는 국가들에게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여 사회봉사 등 다양한 형태의 대체복무를 도입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양심의 자유에 대해 있을 수 있는 또 다른 오해는 ‘그럼 뭐든지 내 맘대로, 내 식대로 하면 되겠네’이다. 자유가 중요하고 필수적이라는 말이 무조건의 절대적 권리라는 뜻은 아니다. 모든 사람의 권리를 위협하고 파괴할 자유는 인권에서 옹호하는 자유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식대로 생각하고 자기식의 생활방식을 선택할 자유를 갖지만 인권에서 ‘자유’라 할 때는 그런 각각의 인간의 자유를 일종의 선하고 바람직한 목적을 위해 특별히 사용하는 걸 말한다. 그래서 모든 자유가 아니라 그중에서도 ‘사상․양심․종교의 자유’가 특별히 인권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선하고 바람직한 목적’을 특정인(세력)이 정해놓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자유가 추구해야 할 ‘선하고 바람직한 목적’이 무엇이냐에 대한 토론과 논증은 항상 열려있어야 하기에 사상․양심의 자유가 요구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찾아내고 실현하는 것을 ‘사상․양심의 자유’는 열어놓고 하지만, 그걸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강요하는 것은 ‘자유의 폐지’인 것이다.

사상의 자유의 조건

제우스신과 한 시골 사람이 함께 걸어가면서 하늘과 땅을 주제로 자유롭고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우스가 이 사람을 납득시키려고 애쓰는 동안 시골 사람은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한 가지 의문을 내비쳤다. 그러자마자 제우스는 별안간 돌아서서 벼락으로 그 사람을 위협했다. 그러자 시골 사람이 말했다. “아! 제우스신이여, 이제 당신이 틀렸다는 걸 알겠어요. 당신이 벼락에 의지할 때 보면 당신은 언제나 틀립디다.”

사상의 자유는 ‘벼락’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즉 외부의 압력이나 강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만들어져야 내 생각이 된다. 불안하고 억압이 따르는 분위기에서 ‘예’라고 토해낸 것이 진정한 ‘예’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감옥에 가두는 식의 박해가 주종을 이뤘다면 요즘은 이윤의 논리를 강요한다. 과거 공안기관에서 전화를 걸어 ‘그런 식으로 글 쓰면 재미없습니다.’라고 하는 것과 요즘 자본가가 전화를 걸어 ‘연구비는 기대하지 마쇼’라고 하는 것 사이에는 억압의 방식이 다르다는 차이밖에 없다. 네티즌들이 인터넷에 올린 글로 수사를 받고, 그런 글을 게재한 사이트 운영자가 세무조사를 받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억압방식의 혼합으로 보인다.

또한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힘센 권력기관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소위 ‘상식’으로 여겨지는 다수의 가치관이 소수자, 이른바 아웃사이더를 억압하기도 한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벌떼같이 몰려 들여 초죽음을 만드는 일이 정보통신의 발달과 함께 더욱 흔해졌다. 사상의 옳고 그름은 다수결로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열정과 두려움 없는 헌신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 아닐까? 사상의 자유는 뜻이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보단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을 위한 자유의 원칙”이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빈부의 차이는 사회에 해가 되지만 사상의 차이는 해가 되지 않는다. 사상은 다양할수록 오히려 자양분이 된다.

사상을 드러내지 않을 자유도

또한 사상을 드러낼 것이 자유라면 드러내지 않을 자유도 마찬가지로 자유다. 가령 적극적인 집필 활동으로 권력을 비판하는 작가도 있을 수 있고, 권력에 아첨하는 구린 글들이 판칠 때 거기에 끼어 삶을 도모하느니 조용히 펜을 꺾는 작가도 있을 수 있다.
내 생각을 편견 없이 들어줄 사람들 앞에서는 자유롭게 드러낼 사상이지만, 그 사상을 이유로 나를 괴롭히려는 공안기구의 수사관 앞에서는 꼭 그럴 이유가 없다. “너, 그런 생각 하는 것 맞지? 다 알고 있는데, 왜 비겁하게 네 사상을 숨기고 그래?”라고 내 속을 훤히 안다는 식으로 나와도, “네 사상이 떳떳하면 밝혀야 하는 거 아니야? 못 밝히는 건 뭐가 구린 거 아냐”라고 아무리 을러대도 거기에다 내 사상을 고해바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양심수들은 이런 협박을 많이 받았다. 그에 대해 한 양심수는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권력 앞에 게워낼 필요는 없다”고 했다. 강제로 사상을 따져 물을 권리는 없으며 대답할 의무도 없다.

사실, 자유롭게 생각할 권리, 내 마음 깊은 곳의 자유 자체가 그리 큰 문제가 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이불 속에서 나 혼자 야광시계를 들여다보는 것과 커다란 들판의 암흑 속에서 야광시계를 꺼내들고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일은 다르다. 진짜 어려움은 사상이 ‘표현’될 때, 사상이 ‘조직’될 때, 그리고 표현된 신념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할 권리를 주장할 때 생긴다. 여기서 사상의 자유는 다른 인권과 결합된다. 즉,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정치 활동의 자유, 학문․예술의 자유 등이다. 이들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분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함께 있어야 실현될 수 있다.

종교의 자유

사상․양심․종교의 자유가 나란히 말해지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처지에 따라 생각이 다르다. 무신론인 사람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종교의 자유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고, 아주 종교적인 사람들은 사상과 양심이 종교에 부수적인 것으로 본다.
어쨌든 인권의 탄생과 논쟁의 무대는 서유럽의 근대였고, 여기서 종교의 자유를 둘러싼 대립은 인권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근대 유럽의 종교․과학․정치혁명은 인간이 무엇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정당한 사회질서는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격렬하게 바꾸었다. 그런데 이들 사회에서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세례부터 장례까지 인간의 모든 활동을 교회가 이끌었고, 기독교는 영원절대의 보편적 진리를 내세운 종교였다.

그런데 사회전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교회권력이 순기능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신앙은 이단으로 색출됐고, 지옥불의 심판에 앞서 현실에서 고문과 화형 등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단 심문 법정과 종교 재판소는 공포 그 자체였고, 이교도란 이유로 유대인과 인디언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고, 같은 기독교 내에서도 신앙의 방식을 둘러싸고 참혹한 전쟁이 벌어지고, 수십만 명이 종교 때문에 망명하고, 책이 불태워지는 일 등이 벌어졌다. 가령 1600년대에 ‘지구가 돈다’고 생각한 갈릴레오는 종교 재판소에서 자신의 신념을 철회해야 했고, 그의 책은 오랫동안 금서목록에 올라 있다가 1988년에서야 로마교황청이 갈릴레오의 명예회복을 선언했다. 신교도를 억압하기 위한 법률은 심지어 자녀들에게 부모의 종교에 대해 당국에 고해바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전통교의에 도전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외치지 않으면서 인간이 ‘내면의 자유’를 갖는다는 건 가능하지 않았다. 따라서 근대 서구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의 자유의 선구자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감히 질문하지 못했던 진리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보길 원했고, 알기 위해 대담해지려 했다. 근대 서구를 풍미했던 ‘계몽’이란 말은 ‘빛’의 은유법이다. 관습, 미신,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정신의 어두움을 타파할 수 있는 ‘빛’에 대해 갈구하는 사람은 정치로부터 종교까지 모든 것에 대한 대안을 생각할 수 있었다.

종교적 관용과 자유의 차이

그러나 종교에 대한 투쟁이 처음부터 개인의 종교의 자유를 획득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확립된 것은 ‘종교적 망명’의 권리였다. 이것의 전제는 ‘국가가 국교를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군주가 선택한 종교가 맘에 안 들면 떠나는 것은 봐주겠다. 하지만 떠나지 않을 경우 불이익을 감수하고 살 각오를 하라’는 것이 종교적 관용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종교적 관용은 자유와는 분명 다른 것이다. 주는 사람 맘이기 때문이다. 관용해주는 권력은 관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관용이나 불관용이나 그게 그거인 것이다. 어떤 의견, 신앙 또는 종교적 행위는 승인해주고, 다른 것은 용인도 승인도 하지 않는 국가정책이 종교적 관용이었다. 관용은 특정 종파에게만 허락되거나, 설령 신앙 행위가 관용되었다 할지라도 특정 종파의 사람은 공직에 취임하거나 특정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대학에서 학위를 받을 수도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박해가 오히려 조직화된 종교에 대한 회의를 크게 만들어갔다.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느냐 아니냐는 국가의 권한이 아니다. 진실한 신앙에 대해서는 신과 나 사이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국가의 임무는 사람들의 사회적 이익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데 있는 것이지, 정부의 기능인 형벌의 부과라는 외면적인 힘으로 사람들의 내면적 확신을 없앨 수도 없고 생기게 할 수도 없다. 박해는 많이 해봤지만 무고한 피만 흘리지 않았는가?’
이런 회의는 조직된 교회를 멀리하는 대안 활동들로 옮겨졌고 사람들은 점점 더 종교를 공적이고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으로 여기게 됐다.
이제 비로소 ‘종교적 관용’은 인권이라 할 수 있는 ‘종교적 자유’로 나아가게 된다. 이제 국가와 교회는 분리되고, 국가가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종교의 자유는 국가권력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개인의 내면적 자유가 된 것이다.

종교 갈등으로 서로 피를 흘릴 때 사상가들은 이렇게 호소했다.
“신의 이름으로 만행을 자행하지 말고 종교적 관용의 정신을 견지하라.”
“인류애와 종교 자유에 입각하여 폭력을 자제하라.”
“모든 인간은 종교와 상관없이 권세, 존엄, 권위, 위엄에 있어 모두 하나이고 동등하다!”
몇백 년 전의 이런 외침들은 종교 갈등이 세계 곳곳에서 화약고를 이루고 있는 오늘날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특정 종교 강요는 인권침해

그런데 근대 서구에서 확립된 개인의 종교적 자유란 어디까지나 ‘기독교’란 테두리 내에서, 개별 시민과 국가 권력 간의 관계에서 생각된 것이었지, 이교도나 무신자에 대해서까지 너그러웠던 건 아니었다. 따라서 다문화성을 증진시키려는 오늘날, 종교의 자유를 생각할 때는 예전보다 더 단계를 높일 필요가 있다.
가령 많은 비기독교 문화권에서는 기독교의 공격적인 선교활동과 개종 압력을 인권침해로 여긴다. 종교를 갖지 않을 권리도 있으며, ‘공공영역에서의 모든 개종 권유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의 종교의 자유의 의미다.

흔히 자기네 종교에서 개인이 벗어나려 하는 것은 억압하면서 타종교에 대해서는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타종교 속에서 그 종교의 관행을 거스르거나 벗어나려는 개인의 선택을 향해서는 종교의 자유라고 옹호하면서, 타종교의 신도들이 집단적으로 자신들이 갖는 신앙의 의미를 드러내 보이면 ‘종교 근본주의’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일이 국제적인 종교충돌로 비화되곤 한다.

종교의 자유는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면에서는 개인의 권리이지만, 같은 종교로 결연한 사람들이 그 속에서 통합된 느낌을 가진다는 점에서 집단적 권리이기도 하다. 종교인은 개인으로나 집단으로나 자신들의 명예와 이미지를 언론, 공공당국, 타문화로부터 존중받을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국제인권기준에서는 ‘특정종교에 대해 종교적 증오를 고취시키는 것’은 종교나 신앙의 표명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다.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불의에 대한 저항 때문에 이어져왔다. 권력자들은 저항의 원천이 되는 자유로운 사상과 자신들의 본질을 파헤치는 논증의 힘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갖은 수단으로 사상의 자유를 못살게 굴었지만, 박해는 회의를 부르고, 회의는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철옹성을 무너뜨려왔다.
그런데 사상의 자유의 적은 박해라는 확실한 얼굴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강제가 아닌 척, 조용하게 은밀히 다가오기도 한다. ‘사상은 싫어, 이데올로기는 싫어’, ‘너무 이데올로기적이잖아’ 식의 거부도,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자’는 식의 주장도 그 자체로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사회공동체의 어떤 요구에 대해서도 ‘난 몰라, 난 싫어’를 외치며, 국가권력의 간섭만이 아니라 공적인 것을 위한 집단과 결사 일체를 거부하는 극단이 나타날 수도 있다. 획일성에 반발하는 것과 공적인 것을 위한 결연을 구분할 줄 모른다. 자유는 개성의 구현을 위한 필수품으로 여기면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집단과 결사 자체를 부당한 간섭이나 귀찮은 것으로 여긴다면 형식적으로는 자유이지만, 선택다운 선택을 할 수 없는 자유롭지 않은 상황을 만들 수 있다.

덧붙임

*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