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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기획] 사상전향제를 말한다 ④

전향거부와 민주화 운동


오랜 세월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두터운 이데올로기적 편견은 전향 거부행위를 민주화의 진전이란 관점에서 평가하는 데 있어 걸림돌로 작용해왔다. 조만간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전향제도를 거부하다 사망한 이들의 죽음이 민주화운동과 관련성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 판단하게 되는데, 이는 양심의 자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의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가늠자가 될 것이다.

<인권하루소식>은 이에 앞서 전향 거부와 민주화운동과의 관련성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를 비롯해, 법조인·종교인·인권운동가·법학자의 의견을 소개한다.[편집자주]


■ 저항권과 민주주의 (오완호,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세계인권선언의 전문에는 민중의 저항권을 규정하고 있다. 폭정과 압제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바로 인권운동이자 민주화운동이다. 반 인권적 행위에 대한 저항과 개인과 공중의 인권을 수호하기 위한 저항은 오랜 역사 속에서 민중이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인권투쟁으로 실현되어 왔다.

최근 장기수 모임 '통일광장'은 65년부터 89년까지 총 73명의 장기수들이 감옥 안에서 죽었으며, 실제 죽은 이들의 수는 이보다 좀더 많을 거라고도 주장한다. 이들 중 최근 의문사진상규명위가 밝힌 최석기, 박융서, 손윤규, 변형만, 김용성씨는 73년부터 진행된 극악한 사상전향공작에 저항하다가 고문 및 구타에 의해 죽어갔다고 한다.

냉전이 심화되던 7, 80년대 군부독재가 자행한 수많은 인권침해 중 하나가 바로 강제 사상전향공작이다. 이른바 죄익 사범들에게 자행된 사상전향공작은 반인륜적 범죄이자 인권침해행위이며,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강제로 포기하게 하는 폭력행위였다.

사상전향공작은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규약, 그리고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 인권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민주사회의 기본질서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권유린 행위였다.

이러한 반인권적 반민주적 정책과 폭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은 법정에 세워져야 한다. 공소시효에 상관없이 그들이 행한 폭력과 고문에 대해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생각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반인권적 반민주적 폭력에 저항하다가 죽어간 사람들의 희생은 인권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관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생각과 사상의 다름이 다양성으로 존중되는 민주사회를 지향한다면, 개인의 인권이 어떠한 경우에도 존중되는 인권사회를 원한다면, 폭력을 향해 저항권을 행사한 사람들을 인권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존재로 평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인권선언이 저항권을 인권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전향공작에 저항하다 사망한 것과 민주화운동과의 관련성 (변호사 김선수, 민주사회를 위한변호사모임 사무총장)

전향공작에 저항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경우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소정의 민주화운동(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에관한법률 제2조 제1호의 규정에 의한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의문의 죽음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위 법률상의 민주화운동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민주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을 말한다.

다만 위 민주화운동은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항거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적 공권력의 행사에 순응하지 않는 소극적인 활동도 이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사상전향공작에 대한 저항이 민주화운동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려면 먼저 사상전향공작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권위주의적 통치인지를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그런데, 전향공작은 사람의 내심의 사상을 바꾸도록 국가권력이 강요하는 것으로서 헌법상 보장된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정면으로 침해한다. 표현된 사상으로 인해 형사처벌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심의 사상을 바꾸도록 강제하는 것은 표현되지 않은 사상을 처벌할 수 없다는 문명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마저 짓밟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아가, 전향공작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 인간은 비록 형사처벌을 받더라도 보다 고귀한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지킴으로써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사상과 신념을 전향하도록 강제 당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당하는 것이고 행복추구권을 침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향공작이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하는 권위주의적 통치에 해당한다고 하면 이에 저항하는 것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키는 활동으로 평가할 수 있고, 따라서 민주화운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 행위자의 사상이 무엇인지 여부에 의해 결론이 달라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행위자의 사상이 무엇인지에 의해 그 결론이 달라진다면 이는 국가가 특정한 사상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결과가 되어 부당하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과 사상의 자유 투쟁 (정진우 목사,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총무)

인간이 가진 내면적 사상을 외적 강제에 의해 강요받지 않을 사상의 자유란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내용의 하나이다. 그런 점에서 전향제도나 전향 공작이란 사상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가장 극악한 반민주적 행위였으며 이를 거부하고 사상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은 마땅히 민주화운동이다. 전향 공작 과정에서 전향을 거부하다 사망한 이들은 부당한 권력의 인권유린에 맞서 종교, 사상,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조치에 대해 저항, 거부했기 때문에 더 많은 공권력의 탄압을 받은 것이었다. 따라서 당연히 민주화운동에 포함돼야 한다.

또한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이란 단지 정치사상적 좁은 의미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외세와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는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민주화운동은 단지 책에서 배운 사상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민중의 삶을 옥죄는 외세와 독재정권에 대한 반대와 투쟁 과정에서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고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과정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민주화운동을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협하게 재단하는 것은 현재의 '민주화명예회복보상심의위'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설립 목적과 맞지 않다. 슬픈 역사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 앞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좀더 겸손해야 한다.


■ 전향 거부와 민주화운동 관련성 (박종보 교수, 대전 한남대 법학과)

여기서는 개별 사건의 구체적 사실관계를 고려하지 않으며, 전향강제반대성 명을 발표한다거나, 단식투쟁을 벌이는 등의 다른 적극적 저항행위를 제외하고, 사상전향을 거부한 행위 자체가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가지는지 여부만 논한다. [필자주]


1.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는 종교나 세계관에 관하여 중립적이며 특정한 국가이념을 설정하지 않는다.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하에서 국가기관이 사상전향을 강요하는 행위는 위헌적인 공권력행사이며, 전향을 거부하는 행위가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행사하는 행위임은 명백하다.

2.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 제2조 제1호에 따르면, '민주화운동'의 요건은 첫째,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행위이어야 하고, 둘째, '민주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시킨 활동'이어야 한다.

3. 먼저 전향거부행위가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행위인가가 문제된다. 양심의 자유 보장은 전체주의체제를 거부한다. 국가가 국민의 신념을 '그르다'고 평가하고 '옳은' 이념을 주입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권위주의적 통치'이다. 그런데 이러한 권위주의적 공권력행사에 대하여 순응하지 않는 소극적인 행위가 '항거'한 것이 될 수 있는가? 모든 경우에 그러하다고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더라도, 구체적인 사실관계에서 공권력행사의 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소극적 불순응이 적극적 저항행위로 인정될 가능성은 높아진다고 할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 정보기관과 교정당국이 진행한 총체적인 강제전향공작은 수형자의 전향 여부에 따라 가혹한 폭행, 구금의 극단적인 장기화, 심지어 생명을 위협하기에 이르는 것이어서, 이에 불응하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본다.

4. 법률상의 민주화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또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시킨 활동'이어야 한다. 준법서약서제도를 신설하면서 기존의 전향제도가 폐지됨으로써 양심의 자유가 불완전하게나마 신장되는 데 많은 좌익수형자들의 전향거부행위가 기여하였다는 객관적 사실은 쉽게 인정할 수 있다. 문제는 행위자에게 일반 국민의 기본권신장이라는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주관적 의도가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공권력의 위법 부당한 행사에 대한 모든 개인적·개별적·일회적 항의나 시정요구를 민주화운동이라 평가하게 되거나 또는 피해자의 주관적 인식이나 의도와 상관없이 그 피해가 결과적으로 국민의 기본권 신장에 도움을 준 경우면 모두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인정하는 지나친 확대해석에 이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인권은 자기의 권리를 찾기 위하여 투쟁하는 과정에서 발전해 왔지, 타인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한 숭고한 목적으로 헌신한 지사들에 의하여 확보된 것은 아니다. 자기의 헌법상 기본권을 보장받기 위한 모든 의식적인 활동은 국민의 권리를 신장하는 활동이 된다.

5. 위 항과 관련하여 좌익수형자들의 전향거부가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지키기 위한 소신에 찬 행위일 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유지하거나 민주헌정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행위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사회주의 사상은 양심의 자유의 보호범위 내에 속하지 않는다는 생각과 궤를 같이 한다. 양심은 "정의와 부정의에 관한 내면에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확신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일정한 행위와 부작위에 관한 의무감"(독일 연방행정법원)이기 때문에 그 객관적 내용이 무엇이라고 미리 정해 놓을 수는 없다. 양심의 자유를 보호하는 헌법은 사상의 자유도 보호한다. 이른바 국시(國是)라고 하는 강령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것은 헌법에 위반된다. 물론 양심의 자유도 무제한은 아니다. 양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제약이 따른다. 형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양심의 자유는 적어도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정부의 통제가 절대로 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미국 연방대법원). 수형자가 저지른 범죄의 종류는 양심의 자유 보장 여부와 상관없다. 어떤 이유로 수형자가 되었건 간에 신념을 바꾸라는 강요에 저항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신장시키는 행위이다.

6.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향 공작과정에서 전향을 거부하다가 희생된 사람들의 행위는 권위주의 통치에 항거하여 민주 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권리를 신장시킨 행위로서 민주화운동에 해당한다.


■ 사상전향 거부행위와 인권신장의 관련성 (국가인권위원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국가인권위원회가 최근 전달한 '사상전향제도 및 준법서약서 제도에 대한 의견' 중 지금의 주제와 관련된 장만을 싣는다.[편집자주]

국가나 타인의 강제에 의해서 사상전향을 강요하는 것이 헌법상 보장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 할 때, 이를 거부하는 행위에 대해, 비록 그 각 행위가 다양한 원인과 배경에서 비롯된다고 하더라도, 인권신장에 기여한 행위가 아니라고만 단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할 것입니다. 사상전향 제도가 일반에 알려지고, 이 제도가 지닌 본질적인 문제점에 대해 사회가 주목하여 궁극적으로 이 제도의 폐지를 초래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이 문제가 인권신장과 무관한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상전향제도의 페지를 주장하고 이에 대해 거부행위를 했다면, 그 행위는 적어도 인권신장에 기여한 행위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