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후원인 인터뷰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역사를 쓰고 싶은

조형근 님을 만났어요

‘광복 80주년’을 맞는 해, 왠일인지 해방의 의미를 묻고 되새기는 이야기들이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광복절 행사와 대통령 임명식이 이어지고 임시정부 법통이 강조되는, 어쩌다가 ‘정부’만 보이는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문득 책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를 냈던 조형근 님을 떠올렸습니다. 마침 인터뷰 전 칼럼(힘센 ‘사실’ 앞, 기억하는 그 마음)으로 이야기를 먼저 꺼내주기도 하셨어요. 해방, 그리고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시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동네 사회학자입니다. 대학에서 오랫동안 비정규직으로 있다가 쉰 살이 넘어 덜컥 정규직 교수가 됐는데 적응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사표 내고 파주 교하에 살면서 동네 사람들과 협동조합 책방 하고 합창단, 책읽기모임 같은 걸 해요. 어쩌다 인연이 닿아서 미얀마 현지 고아원 돕는 일도 하게 됐는데, 다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일이예요. 그 외에는 글 쓰고 어디서 불러주면 강연하면서 살고 있어요.

 

사표를 내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요.

제가 2014년 2월에 파주로 이사를 왔어요. 서울에서 전세 난민으로 살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떠났죠. 그 해 세월호 참사가 있었잖아요. 동네에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분향소를 만들어놨더라고요. 분향소 지키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야기 나누다가 동네 사람들을 알게 됐어요.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동네살이’를 알게 됐죠. 그만둘 때 사실 비빌 언덕이 있었던 거예요. 동네살이도 제대로 하려면 되게 바쁘거든요. 갈 데가 없지 않다, 그래서 결심을 할 수 있었고 같이 사는 분도 제 첫마디에 ‘그럼 사표 내라’ 그러길래 그만둘 수 있었죠.

 

동네 사회학자로 살아가는 일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즐거운 건 정말 확실해요.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이죠. 사람이 다 다르니까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계속 벌어져요. 같은 사람을 만나도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게 돼요. 또 하나, 제가 자녀가 없어 몰랐는데, 누군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걸 함께 겪는 재미를 알게 됐어요.

얼마 전 ‘나쓰 마쓰리’를 했어요. 여름 마을 축제를 부르는 일본 말이에요. 협동조합 책방에 상근 하시는 분이 일본인 여성이에요. 활발하고 좋은 자극을 주는 이웃인데 몇 년 전에 나스 마쓰리를 해보자고 제안해주셨어요. 흔히 이주민과 친해지면 ‘한국 사람 다 됐네’ 이런 식인데 이 분은 ‘당신들도 일본을 좀 알면 좋겠다’고 했어요. 유카타 입고 사진도 찍고, 일본식 놀이도 하는 시간들을 가졌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올해는 한국 전통 놀이도 같이 하자 해서 제기차기 하고 일본 가면과 한국 탈 만들기 프로그램도 하고, 일본 놀이 중에 장난감 금붕어를 큰 대야에 띄워서 종이로 된 뜰채로 뜨는 놀이를 했어요. 종이가 중간에 녹아서 찢어지면 못 건지잖아요. 누가 더 많이 뜨는지 두어 시간 애들과 함께 놀았는데, 더워서 되게 힘들었는데도 정말 재밌는 거예요. 어디서 이렇게 아이들과 재밌게 놀까. 마음이 약간 우울하던 때였는데 같이 노니까 너무 좋았어요.

물론 괴로움도 있죠. 살다보면 부딪히는 일도 있게 마련인데 익명의 관계로 멀어지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죠. 안 보려고 안 나가면 그것도 보이는 거죠. ‘저 사람 요새 무슨 일 있나’ 어떤 사회학자가 커뮤니티 생활은 ‘배역이 부족하다’고 했어요. 도시 생활에서는 배역이 나눠지는데 커뮤니티에서는 한 사람이 1인 다역을 하면서 여기서 저기서, 손님으로 학부모로 동호회 회원으로,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도시 생활은 컴플렉스한데(complex) 커뮤니티 생활은 컴플리케이티드하다(complicated)’고 표현하더라고요. 번역이 마땅치 않은데 저는 ‘꼬여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꼬이기 싫을 때가 있죠. 한 번 만나는 사이면 다시 안 보면 되는데 다른 배역으로 계속 만나야 되고 그런 역할들이 필요하니까 피곤할 때가 있어요. 커뮤니티 생활 오래 해본 분들 얘기 들어봐도 다 똑같아요. 나이 들어서 사람에 대해서, 저에 대해서도 더 배우게 돼요.

ⓒ 쩜오책방

 

작년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를 내고 그 전에는 <우리 안의 친일>이라는 책도 내셨어요. 역사에 관심을 가진 계기나 관심을 두는 주제가 있을까요?

어릴 때부터 역사 이야기 책을 좋아했어요. 진로 고민할 때 저는 사학과를 가고 싶었는데 법대나 상대 가라는 부모님께 차마 사학고 간다는 말은 못하고, 그나마 부모님이 조금 덜 걱정하시겠지 하며 사회학을 선택했어요. 그래도 계속 역사에 흥미가 가서 역사사회학을 전공했어요. 일제시대 공부를 많이 했어요.

일제시대도 자본주의화와 저항에 대한 연구가 많은데요, 저는 어느 순간부터 ‘책임’이라는 단어가 자꾸 떠오르더라고요. 저도 그렇고 우리는 역사에서 피해자라는 감각과 거기에 맞서서 저항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강한 듯해요. 틀린 건 아닌데 꼭 거기에 들어맞지 않는 이야기들이 공부를 할수록 나와요. <콰이강>에도 썼듯이 일본군을 도우며 포로를 학대하는 실무를 담당한 조선인들도 있었거든요. 경성방직은 1939년 만주에 공장을 세우는데 총독부 후원 아래 해외 진출을 한 거예요. 베트남 전쟁도, 어렵고 힘들게 돈 벌러 다녀온 사람도 있는데,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한 편이 되어 어딘가 진출하고 싶은 욕망들도 섞여 있는 거죠. 우리가 이런 역사의 흔적 위에서 자란 것이기 때문에, 다 지나간 일이 아니고 나도 연루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연루됨의 윤리’라는 키워드를 책에서 꺼냈습니다. <우리 안의 친일>에서도 그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책임’과 겹치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거대한 서사에서 잘 안 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거예요. 쉽지는 않아요. 사료라는 게 목소리 큰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으니까요. 얼마 전 칼럼에 연합군 포로를 감시했던 조선인 감시원 중 한 명의 이야기를 썼어요. 영국군 포로 한 명이 남긴 후기에 실린 이야기예요. 짐짝처럼 기차에 실려서 이송되는데 감시원한테 ‘제발 문 좀 열어 달라, 질식해서 죽을 거 같다, 우리 절대 도망 안치겠다’고 호소했어요. 근데 조선인 포로 감시원이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열어줬어요. 창문 아니고 진짜 문을 열어준 거예요. 포로들은 번갈아 밖으로 나가서 걸터앉으면서 바람을 쐬었대요. 그 행복했던 짧은 순간을 믿을 수가 없었대요. 그 감시원의 친절을 평생 잊지 못했다고요. 누군가 탈출했다면 자기가 위험해질 텐데 말이죠. 포로들도 아무도 탈출을 안 했고 도착해서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안에서 문을 다 닫았대요. 이런 마음들이 대단한 독립운동 같은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눈앞에 있는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이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제임스 퍼거슨이라는 인류학자는 그걸 ‘현존의 윤리학’이라고 해요. 그런 믿음을 서로 확인하는 게 해방의 의미를 찾는 이야기들일 것 같아요.

 

올해는 ‘광복 8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해방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적절히 던져지고 있는지,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역사가 진영 정치의 도구가 돼버린 게 너무 안타까워요. 역사는 당연히 정치와 얽혀있지만 역사가 바로 정치는 아니거든요. 한국의 역사학계는 오랫동안 굉장히 민족주의적이었어요. 일제시대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것이 과제다 보니 불가피한 면도 있었지만 과도할 정도로 국수주의적인 면도 있었어요. 초기의 식민지 근대화론은 그런 면에 대한 반발이었죠. 그런데 이게 뉴라이트 사관으로 가버렸어요. 양면을 균형 있게 객관적으로 보자고 강조하다가, 역사에서 자유주의가 이기게 돼있었다는 목적론으로 바뀐 거죠.

결정타가 건국절 논쟁이었어요. 그 후로 역사 논쟁의 수준이 더 저열해졌어요. 독립운동사나 일제시대 생활사 등 정말 풍부한 연구들이 이어지던 중이라 더욱 아쉬웠어요. 어떻게 새 세상을 만들 것인지 모색하는 독립운동이 정말 많았고 그만큼 노선이 달랐다는 건데, 이게 지금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지와도 연결되는 얘기예요. 이게 건국절 대 임시정부 법통론 구도로 가버리니, 한쪽에는 임시정부가 남고 다른 쪽에는 뉴라이트가 말하는 ‘친일을 했지만 실력을 키웠던 사람들’이 남으면서 다른 이야기들은 싹 사라져버렸어요. 임시정부 말고도 강력한 독립운동단체들이 있었습니다. 한편 임시정부는 헌법을 만들고 형식적일지라도 선거도 치르면서 새 나라의 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했어요. 그 의미와 한계가 무엇이고 다른 단체와의 관계는 어떻게 볼지 토론이 필요한 문제예요. 그런데 이런 말 잘못하면 ‘너 뉴라이트야’ 되는 거예요.

하나 더 짚자면 원래 임시정부 법통론은 진보에서 굉장히 비판하던 거예요. 3.1운동 직후에 임시정부에 모두의 뜻이 모였지만 임시정부가 외교론에 치우치면서 곧 분열됐고 우익 일부를 뺀 상당수가 임시정부와 갈라집니다. 임정은 스스로 유일한 정부라고 했지만 모두에게 인정받지는 않았어요. 여운형 선생도 수평적으로 연대하자고 했고요. 제헌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는 걸 밀어붙인 사람은 이승만이예요. 김구 선생은 반으로 쪼개진 반쪽 정부는 임정 법통을 계승할 자격이 없다고 강력히 부인했어요. 근데 어떻게 된 게 세상이 꼬여서 반대로 됐어요. 진영론이 역사의 코미디를 만드는 거죠.

ⓒ 쩜오책방

앞으로 써나가려는 주제가 있을까요?

<콰이강> 한 챕터가 연예인과 팬 이야기예요. 일제시대는 처음으로 대중문화가 생기고 가수나 영화배우, 스타들이 나와요. 팬이라는 게 생겼죠. 그러면서 인천에 살던 열다섯 살 여성이 가출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강원도 산골에는 배우가 되고 싶어 동네 온 극단을 따라 가출한 열다섯 살 여성이 있었고요. 떠난 소녀들이 그 후 어떻게 살았을까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살면서 머무는 것도 필요한데 어떨 때는 떠나야 되잖아요. 익숙한 걸 떠날 줄 아는 용기를 그려보고 싶어요.

버스안내양을 하거나 식모로 가는, 공장에 가거나 비공식 부문의 영세자영업을 하다가, 나이가 들어 필수노동을 하는 상당수가 노년층 여성이에요. 평생을 우리를 업고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분들 고생 위에 우리가 잘 살게 됐다는 이야기라기보다, 남자들이 고생해서 전쟁 나가고 돈 벌어오면서 이 나라 만들었다는 서사와 다른 서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에요.

사실 제 어머니도 딱 그렇게 가출을 하셨어요. 맏이고 동생들이 많아 계속 일을 하셨어요. 그러다가 저희 아버지를 만났는데, ‘경상도 아가씨’가 ‘서울말 쓰는 남자’를 보는 게 너무 좋았대요. 늘 욕먹으면서 자랐는데 존댓말 써주는 남자를 만났으니까요. 결혼을 하겠다고 했더니 외할아버지께서 가두셨대요. 명분은, 아버지 고향이 이북(개성)이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났다는 건데, 결정적으로는 밑에 주렁주렁 달린 동생들 키우려면 일을 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어머니가 가출하셨대요. 아버지 하나 보고 서울 가서 결혼을 하셨대요. 그런 엄마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혹은 떠나지 못했지만 떠나고 싶었던 사람들도요. 그래서 어머니 인터뷰를 하기로 허락도 받아뒀는데 시작을 못했네요.

 

불과 몇 달 전 우리 사회는 비상계엄 사태로 시작해 조기 대선에 이르는 긴 시간을 겪었습니다. 개인의 역사에서 그 시간들은 어떻게 기억될 것 같나요?

제가 사십대 초중반까지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언젠가부터 머리만 대면 바로 자게 됐거든요. 그런데 계엄 이후, 특히 탄핵심판 선고기일이 발표가 안 되면서 악몽을 꾸다가 깨는 날이 길어졌어요. 굉장히 우울해졌죠. 제가 기억에 남는 이야기 중 하나는 페이스북에서 본 건데요, 자기 장모님이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자기들을 늘 못마땅해 하는 전형적인 꼰대 스타일이셨대요. 그런데 계엄 속보가 나왔을 때 너무 놀라서 바로 한 일이 집안 불을 다 끈 거래요. 어디로 도망가야 하나 생각하며 안절부절 못했다고 해요. 윤석열 정부 시절에 반정부 투쟁을 하던 분도 아닌데 본능적으로 너무 무서웠다는 거죠.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계속 서성거렸대요. 우리에게 어떤 외상이, 트라우마가 있었던 거예요. 저한테 악몽이 찾아온 것처럼요.

이게 안 좋은 점과 좋은 점이 다 있는데 민주주의에 대한 절실함이 굉장히 강렬하다는 걸 이번에 다시 확인했잖아요. 제 친구 한 명은 집회를 매일 나갔어요. 운동권 아니에요. 직장을 다니는 사람인데 절실함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이게 최소한의 민주주의조차 위태롭고 이걸 지키기도 버겁다는 말이 되기도 해요. 어떤 정치학자는 마지노선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썼어요. 마지노선만은 지킨다, 그런데 여기서 평등이나 차별 철폐 같은 얘기를 하면 지금을 지키기도 버겁다며 피하게 되는 거죠. 민주화 이후 트라우마를 아직 우리가 못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계엄 사태는 우리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뒤에서 잡아끄는 힘에 붙들리게 하는 계기도 됐던 것 같아요.

 

인권운동사랑방이 해왔거나 하고 있는 활동 중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기대도 전해주세요.

단 하나가 있다면, 당연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이에요. 물론 사랑방만 하는 게 아니고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서 같이 하는 것이지만요. 제가 마흔 즈음 몇 년간 아마추어 밴드를 했어요. 멤버가 네 명이었어요. 연습 한 지 1년 정도 지났을 때 끝나고 한 잔 하는데 두 명이 커밍아웃을 했어요. 게이라고요. 둘은 서로 알고 있었고 커플은 아니라고. 저는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하는데 리더였던 여자 친구가 상황을 잘 풀어줬어요. 어떻게 얘기했냐면, 자기 말고 남자라서 은근 기대를 했다, 그런데 한 명은 유부남이고 둘은 게이면 어쩌냐고 해서 다 같이 빵 터지고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갔어요. 그래서 좋은 기억이었는데 한편으로는 그 친구들이 1년 동안 말을 못하고 기회를 본 거잖아요. 말해도 될까 안 될까, 인생이 늘 그렇게 조마조마했을 걸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만은 않죠. 정부가 다른 의제보다 저어하는 것 같은데 잘 됐으면 좋겠어요.

제가 조금 더 관심을 갖는 분야는 이주민 인권이에요. 그 중에서도 미등록 이주아동이요. 파주에 성매매 지역으로 알려진 용주골에 미등록 이주민들이 굉장히 많이 살아요. 집값이 싸기 때문이죠. 아프리카에서 온 분들이 많아요. 인구 통계를 정확히 내지는 못하지만 거기 아이들도 많이 있어요. 교육이나 복지 받지 못하죠. 아이들이 학교를 갈 수는 있지만 다시 추방하고 기간에 제한을 두고 하면서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없어요. 사랑방도 더 신경 써주면 좋겠어요.

 

책방을 하시니 인권운동사랑방 후원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으로 인터뷰를 마쳐볼까요?

외국 책 두 권과 한국 책 한 권을 꼽아봤어요. 하나는 디디에 에리봉이 쓴 <랭스로 되돌아가다>예요. 조금 어렵지만, 자기를 드러내며 노동계급과 유리된 지식인 엘리트의 문제를 보여줍니다. 두 번째 책은 옆나라 영국에서 민중 버전으로 하는 같은 이야기예요. 브래디 미카코의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원래는 노동당을 지지했던, 그러다가 보수 꼴통이 돼서 브렉시트를 지지한 노동자들은 어떤 사람인가, 내 남편이 바로 그렇다며 쓴 책이죠. 인상적인 에피소드들이 있어요. 남편이 암을 앓았는데 비슷한 증세가 다시 나타났어요. NHS(영국의 국영 보건의료서비스)로 신청을 했더니 열 달 뒤에 오라는 거예요. 남편이 나이도 많고 걱정이 되니까 부인이 사립병원에 가자고 했는데, 남편이 죽어도 안 간다는 거예요. 내가 질 수 없다, 노동자 계급이 함께 만들어온 우리의 제도인데 내가 어떻게 사립병원에 갈 수 있냐면서 지독하게 몇 달을 버텼다는 거예요. 또 다른 에피소드는 동네에 중국인들이 와서 사는 집에 관한 거예요. 10대 아이들이 가서 유리창에 돌 던지고 하니까 그러면 안 된다고 야단을 쳤다는 거예요. 외국인 나가라고 투표한 노동 계급 영감 꼰대들이, 사람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규찰대를 만들었대요. 이런 남편과 맨날 싸우면서도 미워하지 못하고, 그들이 지지하는 정책을 우리가 지지할 수는 없지만 이 사람들을 어떻게 봐야 하나 생각을 많이 하게 해요. 한국 책은 강지나 님이 쓴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를 추천합니다. 책을 뜯어보면 볼수록 얘기할 게 많아요. 사랑방 후원인들이 이야기를 이어가주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