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하루소식

인권위, 비정규법 개악안에 제동

"동일노동 동일임금 명시, 파견제 확대 반대"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가 임박한 비정규 노동법 개악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14일 인권위는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등에 관한 법률안(이하 기간제법안)'과 '파견근로자 보호등에 관한 법률 중 개정법률안(이하 파견법안)'에 대해 "정부가 비정규직 법률안을 통해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 시정 등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하려 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정부의 비정규직 법률안으로는 이미 과반수에 달하는 비정규직의 규모를 축소하고,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을 시정하며, 비정규직 근로자의 노동인권을 보호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며 "비정규직 보호라는 당초 취지에 맞게 수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14일 오전 인권위에서 열린 기자 브리핑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는 조영황 인권위원장

▲ 14일 오전 인권위에서 열린 기자 브리핑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는 조영황 인권위원장



조영황 인권위원장은 같은날 오전 열린 기자 브리핑 모두발언을 통해 "비정규직이 결코 고용의 일반 원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확인"하고 "비정규직은 고용형태에서는 예외적으로,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전제했다. 또 "나아가 비정규직 근로가 제한적으로 인정된다고 해도 이들에 대한 근로조건은 정규직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 없다"며 "차별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기간제 사용사유 제한·동일노동 동일임금 도입해야"

기간제법안에 대해 인권위는 "기간제 근로자의 지나친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기간제근로자의 사용을 합리적인 사유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제한적으로 허용하도록 '사유 제한' 규정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기간제 사용이 허용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을 일정하게 제한하며 △사용사유제한이나 사용기간제한을 위반한 경우에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간주해 "제한의 실효성을 확보하고 기간제근로자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또 인권위는 정규직 노동자와의 차별해소 방안으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규정을 명문화함으로써 최소한 가장 중요한 근로기준인 임금에 있어서만큼은 차별적 처우에 대한 객관적 기준을 마련"할 것을 요구했다. 이밖에도 근로계약 체결시 근로조건을 서면으로 명시하도록 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정규직으로 채용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강자 상임위원

▲ 정강자 상임위원



"파견 허용 업무 확대 안돼"

인권위는 파견법안에 대해서도 "파견대상 업무의 허용범위를 전면적으로 확대할 경우 파견근로 남용의 문제가 한층 더 악화될 위험이 있다"며 대상 업무의 허용범위를 일정한 업종에 한하여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또 파견 허용기간을 3년으로 연장하고 3개월의 휴지기간을 둔 파견법안에 대해 "파견근로의 남용방지와 직접고용 유도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며 △현행 2년을 유지하고 △휴지기간은 업무내용을 고려해 보다 확장할 것을 제안했다.

또 파견법안이 파견 허용기간 초과 시 "직접고용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현행 간주규정을 "고용의무가 있다"는 의무규정으로 후퇴시키는 것에 대해 "현행 간주 규정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냈다. 이어 파견노동자의 노동3권을 보장하기 위해 파견노동자가 "사용사업주를 상대로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사용사업주의 파견노동자에 대한 책임을 확대하거나 사용사업주의 사업장 노사협의회에 파견노동자가 참여하는 방안을 모색할 것을 제시했다.


"일부 아쉬운 점 있으나 환영"

하지만 인권위는 △기간제 노동자를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고 △파견노동에 대해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원칙으로 제시하면서도 "파견근로의 현실을 고려해 한시적으로" 파견근로자의 임금을 직접고용 근로자의 임금의 일정 비율 이상으로 보장하거나 파견사업주가 받는 대가를 일정 비율로 제한하는 안을 제시해 파견제 자체를 건드리지는 못했으며 △파견법의 간주규정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도 실제로 현실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무허가 파견업체에 의한 파견과 파견금지 업무에 종사하는 파견노동자에 대한 적용여부는 명시하지 않았다. 또 파견노동자의 노동3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단체행동권 보장 방안까지는 제시하지 않아 실질적인 권리 행사가 가능할지는 의문이어서 아쉬움을 남겼다.

이에 대해 정강자 상임위원은 "세부적인 쟁점해결에 인권위의 역할이나 전문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며 "노사정대표자회의 틀에서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파견금지 업무의 파견노동자 등에 대해서는 노동부의 행정지도를 통해 법 적용 범위로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박현진 활동가는 "인권위가 비정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권 문제를 주요 사업으로 삼으려는 의지가 보인다"고 환영하면서도 "노사합의에만 문제를 맡겨둬서는 약자인 노동자의 입장이 반영될리 없다"며 "현실적으로 인권위가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또 파견법안에 대한 인권위 의견에 대해서는 "파견노동자를 보호해 중간착취를 줄이는 방향이 아니라 중간착취를 합법화하는 파견법 자체를 철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계와 여당 격렬하게 반발

이번 의견표명에 대해 민주노총(위원장 이수호)은 곧바로 논평을 내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으나) 비정규직 문제해결에 대하여 핵심적이고 중요한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를 환영한다"며 "현재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논의되고 있는 비정규입법안 논의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비정규노동자의 진정한 보호와 권리보장을 위한 제대로 된 법안이 마련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재계와 여당은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한국경영자총협회(회장 이수영)는 이날 발표한 '경영계 의견'을 통해 "비정규 법안과 관련하여 국가인권위원회가 의견을 발표하는 것은 자신들의 업무 범위를 벗어난 것은 물론, 노동시장의 문제를 인권이나 정치적 문제로 다루려고 하는 것으로서 매우 잘못된 것"이라며 "노동계의 일방적 주장을 여과없이 수용하여 가뜩이나 경직적인 노동시장을 더욱 경직화시키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열린우리당 이목희 제5정조위원장은 "황당무계하다"며 "왜 이 문제를 이 시기에 권고 아닌 의견표명이라는 형태로 의견을 개진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그는 "인권위 업무 영역인지 확실하지 않다", "국민경제의 전체적 관점이나 국가경영의 관점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 "고용안정과 불안정은 인권위에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라는 등 이번 결정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인권위 흔들기 중단하라"

이에 대해 인권단체 사회권전략팀과 인권단체 연석회의는 14일 낸 성명서를 통해 "(국제인권규약과 국가인권위법을 볼 때) 사회권이 인권위의 업무 영역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며 "인권위는 사회권에 관한 정책권고 또는 의견표명을 할 수 있고, 사회권 상황에 대한 실태조사는 물론 인권침해 유형·판단기준 및 그 예방조치 등에 관한 지침 제시도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그동안 한국사회 소득구조의 양극화 결과는 제 몫을 가져가지 못한 비정규 노동자의 땀과 피로 얼룩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전제하고, "열린우리당의 태도는 국가인권위 의견 표명…(의 가치를)…폄하"하는 것으로 "국가인권위 흔들기"일 뿐이라며 "인권에 대한 무지가 결국은 인권을 침해할 수밖에 없음을 다시금 확인했다"고 질타했다.

지난 11일 열린 인권위 전원위원회에서 의결된 이번 의견표명에는 당시 회의에 참석한 8명의 인권위원 가운데 7명이 찬성의견을 표명했고, 한나라당 추천으로 인권위원이 된 김호준 위원만 기권했다. 정 상임위원은 "소수의견을 명시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데 본인이 원하지 않았으므로 소수의견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지난 3월 16일 '비정규근로 관련 입법안에 관한 청문회'를 개최해 노사정 관계자들의 증언을 청취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11월 23일 비정규 노동법 개악안이 국회 환경노동위에 상정되자 같은날 인권단체 연석회의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인권위의 침묵을 규탄하고 개악안에 대해 인권위가 발언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발표하고 인권위를 항의방문했다. 또한 올해 인권단체 사회권전략팀과 인권단체 연석회의는 두 비정규직법안에 관한 의견서를 국가인권위에 전달한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