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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사랑방 20년을 돌아보다 (1)

<편집자 주> 인권운동사랑방 20년 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20년 한 길을 걸어오며 쉽게 긴장을 풀거나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많은 분들 덕분에 인권운동사랑방이 다시 걸어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그 길을 함께 걸었던 사람들을 기억하며 고마움을 전합니다.


0.
90년대 인권운동을 했던 활동가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그때는 ‘인권’이라고 하면 다 먹혔어.” 시대는 변했다. 지금 여기에서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의 고민은 이렇다. “이러다가 ‘인권’에 먹히는 거 아냐?” 국가‘인권’위원회의 변모를 보며, 사무실로 걸려오는 ‘가해자 인권만 주장’한다는 항의 전화를 받으며, 우리는 ‘인권’에 대한 긴장을 곧추세운다.

그러나 ‘인권’이 언제나 저항의 언어일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은 그때에도 없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오히려 ‘인권’을 경계하기도 했다. 인권이 체제를 포장하는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인권’을 놓지 않고 20년을 걸어왔다. 그것은 ‘인권’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다. 20년의 역사 동안 만나 온, 인간의 존엄을 깨우치는 목소리들이 우리에게 남긴 울림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 그것은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지거나, 더 어려워지거나 더 쉬워지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인권이 저항의 언어로 작동할 수 있도록,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질문을 멈추지 말라는 요구일 것이다. ‘인권’을 살피기 위해 ‘지금, 여기’를 살피라는 요구.

인권운동사랑방(아래부터, 사랑방)은 ‘인권’에 대한 긴장과 믿음 사이에서 어떤 질문을 던지며 걸어왔을까. 20주년이라는 핑계를 빌어 사랑방은 역사를 돌아볼 시간을 얻었다. 좌고우면과 좌충우돌 사이에서 사랑방이 걸어온 길이 보였다. 뿌듯함과 아쉬움이 그리 쉽게 구분되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에도 완결된 역사란 없겠지만, 때로는 사랑방을 통해 때로는 길 밖의 풍경을 통해 더듬어본 기억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쉽게 긴장을 풀거나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많은 분들 덕분에 사랑방이 다시 걸어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게 되기도 했다. 그 길을 함께 걸었던 사람들을 기억하며 고마움을 전한다. 되돌아보는 이 길이 많은 이들에게 반갑기를 바란다.

1.
인권운동이 한국 사회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가진 운동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다. 사랑방은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경계에 자리를 잡았다.

80년 광주민중항쟁은 한국 사회에 ‘민중’을 등장시켰다. 엄밀히 말하면 ‘민중’을 발견한 이들이 80년의 항쟁을 광주민중항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의 변혁을 꾀하는 이들은 ‘민중’의 거대한 저항을 조직하기 위해 애썼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주체로 ‘시민’이 아닌 ‘민중’을 세우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민중’은 극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한 모든 대중을 일컫는 말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의 삶과 연결할 수 있었던 보편의 이름이기도 했다. 87년 민주화항쟁을 전후로 만들어진 대중조직들이 이와 같은 운동의 전망 아래 대중의 힘을 조직했다.

독재 타도를 위해 모였던 운동들은 87년 민주화항쟁 이후 분화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 사회 개혁을 주장하며 ‘시민’을 다시 세우려는 시민운동이 등장했다. 그것은 민주화항쟁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80년대 후반 경제 호황을 거치며 한국 사회의 계층 구조가 변화한 결과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 사회의 변화, 그리고 세계사적 변동 속에서 시민운동의 주장은 변혁의 포기로 이해되었다. 새로운 ‘현상’으로서의 시민운동과 정치적 ‘주장’으로서의 시민운동은 순식간에 ‘현실’이 되었다.

사랑방은 ‘탄원서 써주는 단체’라는 자리를 넘어서려고 했다. 민중운동의 하위 파트너로만 인식되던 역할을 벗어나 ‘인권운동’이라는 독자적인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을 하나의 운동으로 수렴하려는 시도를 경계하며 더욱 다양한 영역에서 운동을 펼쳐가려는 의제별 운동들이 만들어지던 시민운동의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대중화, 전문화, 국제화’라는 목표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러나 시민운동이 만들어내는 정치적 효과는 금세 드러났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었던 사랑방은 시민운동과 경계를 그으려고 했다. 사랑방이 인권운동의 인프라를 세우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기본기능의 구조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체제에 갇히지 않는 인권운동에 대한 다짐을 실물화할 수 있는 운동의 조건, 땅을 다지려는 도전이기도 했다.

2.
그 땅은 좌표를 재고 세밀하게 측량을 하면서 설계한 땅은 아니었다.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인간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물러설 수 없는 곳에 맞닥뜨리며 인권운동의 자리를 확인했다. 그 곳에 누구나 문턱 없이 찾아올 수 있기를 바라며 ‘사랑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랑방의 한 활동가가 연행되면서 발행한 속보가 ‘인권하루소식’이라는 매체가 되었고, 인권하루소식 700호를 기념하자며 시작한 ‘인권영화제’가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의 현장이 되었다. 한국 사회를 움직였던 민주화의 기운 속에서 ‘인권’은 아직 민중의 것이었다. 체제에 갇히지 않는 인권운동을 만들어가겠다는 다짐은, 육체의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한 번 붙들면 끝장을 보는 태도를 통해 구현될 수 있었다. 당시 운동의 풍토에 대해 스스로 다른 풍토를 보여주려고 했다. 바람을 일으켜 땅이 보이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권’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서 ‘인권’은 여전히 낯선 언어였다. 사랑방도 마찬가지였다. ‘인권’은 익숙하게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배우고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 다녀오면서, 국제인권규약들을 탐독하면서, ‘인권’이 무엇인지를 탐구했다. 인권은 “민중에 의한 기본적 통치이념”이어야 한다는 시선을 통해 ‘인권’을 읽어냈다. 그리고 ‘인권’을 널리 알리려고 노력했다. 인권을 알리는 것은 인권 규범을 소개하고 인권 소식을 전하는 것 이상이어야 하므로 인권교육의 장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인권을 실현하기 위한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자원활동가 제도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들과 나누기 시작한 ‘인권’ 이야기는 그 전까지 사람들에게 익숙한 인권만은 아니었다. 87년 민주화항쟁 이후 반독재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과거 청산의 과제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사랑방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감옥인권운동은 양심수나 정치범의 권리를 넘어 모든 수감자들의 권리에 대한 주장으로 나아갔다. 감옥과 다름없는 시설의 인권유린 실태를 폭로하며 모든 갇힌 자들의 벗이 되고자 했다. 사람들에게 익숙해져버린 불심검문에 대한 불복종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린이·청소년'의 인권이라는 생소한 말을 인권운동의 의제로 만들어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는 노력은 인권하루소식의 독자들, 인권영화제의 관객들, 인권자료실을 찾아오는 연구자들, 인권교육실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집단으로서 또는 개인으로서 ‘인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인권운동의 자리를 넓혀 주었다. 그러나 차차 넓어지는 자리가 인권운동만의 것은 아니었다.

3.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이라는 정치적 사건을 만들어냈다. 김대중은 스스로를 ‘인권대통령’이라 불렀다. 인권이 어느새 대중적인 언어가 되어 갔다. ‘민주개혁’은 인권의 요구들을 담는 듯 보였다. 인권운동의 요구이기도 했던 인권 의제들이 정부 정책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각종 과거사위원회의 설치 등 기구와 정책을 통해서 인권의 제도화가 눈에 띄게 이루어졌다. 운동의 제도화도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정부기구, 각종 위원회, 제도적 절차들이 세상을 바꾸는 유력한 수단으로 부각되었고 운동의 의미는 좋은 정책을 관철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다양한 운동들이 인권의 언어를 사용했다. 인권은 다른 의미에서 ‘먹히는’ 언어가 되어갔다. 사람들에게 울림을 전하는 저항의 언어가 아니라, 정책의 정당성을 설명하며 제도로 밀어 넣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가 되었다. 법과 제도의 근원으로서 선언되던 ‘인권’은 차츰 법과 제도로부터 나오는 권리인 것처럼 뒤집혀 보였다.

80년대의 운동들이 벼렸던 꿈, 87년 민주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와 한계 사이에서 뻗어나가던 운동의 기운들이 급속하게 휘감겨 들어갔다. 정치적 민주화를 향한 꿈은 반독재 민주 정권의 수립에서 멈췄고 경제적 민주화를 향한 꿈은 세계경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시장 합리성의 확립에 가로막혔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싸웠던 많은 이들의 꿈은 ‘민주화’로 더 이상 설명될 수 없었다. 운동들은 흔들렸다. 여러 길 중 하나의 길일 뿐이던 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금세 큰길이 됐다. 세상을 바꾸려고 조금씩 내온 많은 길들이, 다니는 사람 없어 흔적이 지워질 듯했다. 가던 길을 가려는 운동들은 고집스럽게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하면서 고립되기도 했다. 사랑방도 함께 흔들렸다. 하지만 인권운동의 오랜 요구였던 국가인권기구의 설립이 정권의 장식물이 되게 두어서는 안됐다.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국가인권기구를 요구하며 인권활동가들은 노상단식농성을 벌였고 국가보안법을 끝장내기 위한 싸움을 조직했다. 제도가 말하지 않고 말하지 못하는 ‘인권’을 말하려는 노력을 놓지 않았다.

4.
“50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인권 대통령’이 구제금융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인권 억압 대통령’으로 변신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상황”에서 사랑방은 “진보적 인권운동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토론했다. 한국의 인권운동 현황을 살피며, 비틀린 ‘인권’을 넘어서기 위해 인권운동의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진보적 인권운동을 만들기 위한 이론의 개발, 인권운동으로서의 사회권운동 창조, 국가안보 논리와의 전면적 대결,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접근 등이 과제로 제시되었다. ‘인권’ 자체를 통해서 인권운동의 자리를 보여줘야 한다는 다짐이었다. 사랑방은 더욱 다양한 방면으로 활동을 모색했고 사랑방 부설 인권운동연구소를 설립해 우리의 인권이론을 만들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제정된 ‘운동원칙선언’(1998)은 내적으로는 운동의 독립성을 지키고, 외적으로는 명망을 꾀하는 운동의 풍토에 경종을 울리려는 노력이었다.

해야 할 일을 찾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이라는 정치적 사건은 IMF 구제금융 사태와 함께 찾아왔기 때문이다. 불안정노동과 빈곤이 사람들의 삶을 해일처럼 덮쳤다. 일자리가 있는 것만으로도 안도해야 하는 현실에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 확산되었고, 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한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구조조정에 맞서 싸울 힘이 있던 현장을 향한 국가의 폭력은 거침없었다. 사랑방은 경찰 진압의 부당함과 문제점들을 조사하고 알리면서 정권에 항의했다. 평화적 집회 문화라는 담론으로 저항을 통제하려는 정권의 의도에 맞서기 위해 노력했다. 불안정노동과 빈곤의 실태를 밝히기 위한 조사활동에도 참여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만들어낼 변화들을 모두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인권운동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헤아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현장들에서 사람들의 힘이 흩어지고 있음을 미처 보지 못한 채 ‘인권’이라는 말로 그/녀들을 지키려는 노력이 관성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다만 사랑방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변화 속에서 ‘인권’이 어떤 의제나 사안을 설명하는 말 이상이 되어야 함을 느끼고 있었다.

5.
진보적 인권운동이 주목하고 도전해야 할 것으로 제시한 사회권과 북인권은 의제를 개발하는 것 이상을 뜻했다. 체제에 쉽사리 포섭되지 않을 ‘인권’을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그리고 세계인권선언 28조가 말하는 ‘질서에 대한 권리’의 내용을 탐색하는 것이었다.

경제위기 이후 사랑방이 발행한 『인간답게 살 권리』는 한국 사회에 ‘사회권’을 등장시켰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빈곤의 현실을 ‘인권’의 문제로 접근하는 시도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이론적 탐색에 그쳐서는 안 됐다. 사랑방은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권 운동을 벌여가려고 했다. 신자유주의가 인권을 침해한다면 인권이 실현되는 질서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지 질문했다. 그 질서를 만드는 싸움은 권리의 주체인 사람들로부터 출발해야 했다. ‘당사자와 함께 하는 사회권 운동’을 만들기 위한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고려대학교 청소용역 노동자들과 만나면서 노동조합 결성까지 함께 이루게 된 경험이 가능성을 엿보게 했다.

인권의 실현은 인권 자체의 규범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능한 사회구조를 만듦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인권침해를 지적하는 것을 넘어서 인권이 실현되는 질서의 방향을 밝히기 위해 공공성을 검토했다. 구체적인 권리 영역에서 도전해 보자며 주거권 운동을 시작했다. 그 후 다양한 권리영역으로 확장하며 사랑방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으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권리의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권리 주체들이 함께 싸울 수 있도록 다양한 실험을 했다. 노숙당사자모임과 함께 주거인권학교를 열었고, 의료급여 개악 시도에 맞서 쪽방 주민들을 만났고, 주민들 스스로 마을을 바꾸는 대안 개발을 모색하며 장수마을에 갔다.

북인권 역시 하나의 의제 이상이었다.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인권침해 국가로 지목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맥락을 무시한 ‘인권’은 강대국들의 세계질서 재편 의도를 치장하는 들러리일 뿐이었다. ‘북인권’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연구했다. 사회주의 인권론을 학습했고 한반도 평화 체제를 만들기 위한 인권운동의 역할을 토론했다. 국가안보 논리와 대결하기 위해 분단체제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 질문했다. 그러나 북에 대한 정보는 심각한 수준으로 통제되고 있었고, ‘인권’을 말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북 민중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조건에서 북인권 운동을 이어가기는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