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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종이와 펜을 제공할 뿐

민관합작 민생살리기 입법 촉구 서명운동을 접하며

편집인 주

세상에 너무나 크고 작은 일들이 넘쳐나지요. 그 일들을 보며 우리가 벼려야 할 인권의 가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질서와 관계는 무엇인지 생각하는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넘쳐나는 '인권' 속에서 진짜 인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나누기 위해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이 하나의 주제에 대해 매주 논의하고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인권감수성을 건드리는 소박한 글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때로는 촉촉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가가기를 기대합니다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 경영자총연합회 등 재계 38개 단체가 구성한 ‘민생구하기 입법 촉구 국민운동본부’에서 1월 13일부터 범국민서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들이 말하는 민생구하기 입법, 경제활성화법은 정부가 작년 내내 밀어붙여 온 비정규직 기간연장, 파견근로 허용확대와 같은 노동법 개정과 재벌의 인수합병, 기업지배를 용이하게 하는 기업활력제고법(원샷법), 교육, 의료, 철도, 가스 등과 같은 공적 영역에 자본진출을 허용하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제정이다. 다루는 범위가 넒고 법안의 개수가 많음에도 언론은 자세한 내용을 다루고 검증하기는커녕 민생살리기, 경제활성화법이라며 선전하면서 정부와 국회의 신경전 보도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실상은 광범위한 영역에서 노동자-시민의 권리박탈과 함께 재벌 자본의 이윤쌓기를 보장하는 제도개악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와 기업의 서명운동은 심각한 정치적 권리 침해행위

그런데 최근 법안 제정과 관련된 정부와 기업의 행보는 국민의 정치적 권리를 제약하고 박탈하는 방식으로 공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재계 유관 단체가 주도하던 거리서명운동이 18일 박근혜 대통령의 거리서명 참여 이후 기업권력을 적극 활용하는 형태로 바뀐 것이다. 20일에 삼성그룹은 본사사옥 1층 로비에 서명부스를 차리고 사장단이 서명에 동참하더니 CJ, SK, 포스코, 현대차 등 대기업 20여 곳도 서명운동에 함께 하기로 했다. 중소기업중앙회도 가맹단체에 적극적으로 회사 내 서명부스 설치를 요청하고 있다. 상상해보자. 가장 잘 보이는 회사 로비에 서명부스가 설치되어 있다. 사장을 비롯한 상사들이 솔선수범해서 서명을 한다. 대부분 법안 내용에 대해서도 잘 모를 테지만 혹여 법안에 반대하는 노동자라도 서명을 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근로계약, 취업규칙, 노사협의회 대의원 선출 등 자신의 근로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안도 울며겨자먹기로 사인해야 하는 게 회사의 현실임을 생각해보면 회사 내 서명부스 설치는 사실상의 강제 서명으로 노동자들의 정치적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다.

대통령의 거리서명이 준 메시지가 몇몇 정치인들에게는 분명했던 것 같다. 급기야 경북 김천시, 문경시, 영주시에서는 읍면동 행정기관을 통해서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통반장이 집집마다 방문해 서명을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과거 군사독재 시대에 행정기관에서 주도했던 ‘관제 서명운동’이 부활한 것이다. 회사에서 강요되는 서명과는 또 다르게 집집마다 찾아와 서명을 요구하는 통반장들을 만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부담이다. 강요가 아닌 자발적 서명이라고? 그럼 투표율도 낮아서 걱정인데 방문선거를 도입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가장 공식적이고 강력한 제도이자 권력인 행정부와 기업이 직접 나서서 서명을 강제하는 ‘민생살리기 입법 촉구 서명운동’은 단지 비웃음의 대상이 아니라 매우 심각한 정치적 권리 박탈행위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민생입법촉구 서명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사진 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 박근혜 대통령이 민생입법촉구 서명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사진 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집회시위 탄압과 민생살리기 서명운동은 동전의 양면

박근혜 대통령은 거리서명에 참여한 후, 다음 날 국무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계속 국민이 국회로부터 외면당한다면 국민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이 엄동설한에 경제인과 국민이 거리로 나섰겠나. 지켜보는 저 역시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무겁다.”

그에게서 거리로 나선 국민들의 답답함을 듣게 될 줄이야. 정부가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집권 3년차 주요과제로 내세운 작년 한 해 동안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는 총파업을 비롯한 수많은 직접행동에 나섰고 그 때마다 정부는 강력한 탄압으로 일관했다. 작년 11월에 있었던 민중총궐기가 대표적인 현장이었다. 노동자 민중들의 권리 주장과 행위를 집회시위가 아닌 사회혼란을 야기하는 폭력행위, 소요라고 규정하며 온갖 막말을 쏟아내더니 이제는 거리로 나서는 경제인과 국민을 걱정하는 이가 대통령이다. 저들에겐 결국 누가 집회시위를 하고 거리로 나오는지가 중요하다. 회사에서의 정치행위 금지? 노동자를 더 쥐어짜고 사장 돈 더 벌 수 있는 법을 만들겠다는데 서명운동이든 정치활동이든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없는 시간과 돈을 들여서 어렵게 거리에 모인 사람들의 행동은 경찰이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조금 잠잠해졌다 싶으니 강력한 권력을 이용해 서명운동이라는 형태로 노동자-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강요하는 꼴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권리가 구성되고 작동되는 방식이 대개 이러하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에 어렵게 돈을 모아 출마하면 온갖 선거법으로 틀어 막히고, 이를 뚫고 세력을 만들어내면 정당해산이라는 강수를 둔다. 결국 국민들은 민생살리기 서명운동처럼 강요된 투표용지에 투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2월 3일자로 84만 명이 참여했다는 서명운동과 4월로 다가온 총선이 그리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민생살리기? 정부는 사장들과 어깨동무하고 있다

민생살리기, 경제활성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은 뒤에 시키는 대로 말하라고 강요하는 서명운동이 결국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는 분명하다. 너무 답답했던 나머지 정부가 나서서 재벌들과 함께 하겠다고 선언했으니 말이다. 사장님들과 함께 나서서 이 법안을 통과시키라고 요구하니 법안 내용을 잘 몰라도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회사가 망하면 노동자도 힘들다. 하지만 망하지 않는다면 사장과 직원은 제로섬 관계다. 사장에게 좋은 것은 노동자에게 나쁘다. 기업구조조정을 원활하게 한다는 원샷법이 시행되면 온갖 시세차익과 합병에 따른 주식소득은 가진 자들이 얻겠지만 해당 회사 직원들은 대규모 감원과 전환배치에 몰릴 것이다. 기간제 연장과 파견허용이 늘어난다는 것은 이제 안정적인 일자리는 불가능하니 현실을 인정하고 사장들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불안정한 일자리를 공식화하자는 것이다. 철도, 도로 민영화 등에서 우리가 익히 겪었듯이 교육, 의료와 같은 공적 영역을 시장에 개방하는 것은 결국 돈 가진 자들의 투자수익을 올리고 시민과 노동자들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게 뻔하다.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가 경험하고 목격한 현실이다.
덧붙임

정록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