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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송유나의 인권이야기] 위협받는 물·에너지 권리

2005년 7월, 단전 때문에 촛불을 켜고 공부를 하던 한 여중생이 불에 타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저소득층과 장애인 등 소외된 민중들은 여전히 공공요금을 내지 못해 고통받고 추위와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해 말 기승을 부리는 추위 속에서 정부는 동절기와 하절기, 극한의 상황을 막기 위해 단전과 단수 조치를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으며, 공공서비스 확장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12월 22일, 에너지 기본법이 국회 법사위를 통과하였으며, 대통령직속 지속가능위원회에서는 물기본법 제정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 '법'과 '조치'는 한계적이며, 에너지와 물의 민영화 즉 시장화를 의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전기, 가스, 물. 이들은 거대 네트워크 산업이자 초기 비용이 많이 드는 장치 산업이다. 이는 철도와 지하철 등 궤도 산업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사회 뿐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에서 이들 산업은 공적영역으로 출발한다. 국가는 자본과 시장경제의 발전을 위해 공공영역의 토대를 쌓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렇게 국가가 견실히 마련한 토대 속에서 사적 자본은 성장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수탈을 위해 철도와 도로를 깔고, 조선시대의 공동체적 수리제도를 접수하여 지주 제도를 강화한 것이 한 예이다. 또한 한국의 발달된 전력 시스템과 집중적인 댐 건설이 70년대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을 위한 교두보였다는 점이 또 다른 사례라 할 것이다. 이렇듯 공공부문, 공공서비스는 국가가 국민을 위해 기본적으로 공급하고 보편성을 유지해야 하는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본주의 발달을 위해 기여하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이중적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경우 아직까지는 전기와 가스, 수도요금 등 대부분의 공공서비스 요금이 다른 나라에 비해 그다지 높지 않다. 물론 최근 고유가와 러시아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인해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이 상당 부분 인상되었으며, 수도요금 역시 요금현실화 기하기 위해 부단히 올라가는 실정이다. 철도나 지하철, 버스 요금 등 소위 이동권을 중심으로 한 공공서비스 요금 역시 낮은 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공공부문 즉 공공서비스가 국민을 위한 보편적 서비스와 자본축적의 효율화를 기하는 이중적 측면을 지닌다 할지라도 역시나 공공부문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부문이 그 정체성을 잃는 그 순간, 이 존재는 매우 자유로워진다. 국내외 자본이 줄곧 민영화를 주장하고, 세계무역기구(WTO) 서비스 협정 및 자유무역협정 등을 통해 일국의 공적 영역의 개방을 요구하고 있는 점은 이 때문이다. 물론 공공서비스의 축소가 비단 요금의 인상만을 가져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통신 산업을 보자. 전 국민의 기억 속에 한국통신이 공기업이었으며, 공공적 영역이었다는 기억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90년대 중후반까지 114 서비스는 무료였다. 114가 분사되자 유료로 전환했고, 현재 문의한 번호가 1번을 누르면 직통으로 연결되어 필기도구를 찾아 헤매는, 번거로운 고통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100원 이상의 요금을 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중전화는 사라졌고 돈이 되지 않는 고장난 기계를 수리하는 공적 서비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90년대 중후반 피시에스와 휴대전화 도입은 분사화, 민영화, 아웃소싱을 낳았다. 경쟁 시장이 효율적이라는 신자유주의의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불과 3-4년만에 경쟁 시장은 3개 사의 과점 시장으로 돌변했고, 화려한 광고에 눈이 멀어 버린 우리들은 그들 간의 담합 속에서 막대한 통신요금을 물고 있다. 한 가구의 10년 전 통신 요금과 지금의 통신요금의 비율을 따져본다면 어떠할 것인가?

민영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전력과 가스, 철도 등 공공부문을 사수해야 한다는 소망은 노동자들의 투쟁, 정확히 표현하면 노동조합의 생존권 쟁취 투쟁 속에서 시작되었다. 민영화는 해당 산업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며, 경쟁과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노동권을 말살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연스럽게 공공성 쟁취 투쟁과 결합하여 발전하였다. 이는 비단 사회공공성이 공공서비스 요금이나 고용안정의 문제를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신이 시장의 상품으로 전락하면서 우리의 개인정보 역시 상품화되어 인터넷 내외부의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렇듯 공공영역은 보편적인 공급의 책임과 더불어 그 공공영역이 누구에 의해 누구를 위해 어떠한 목표에서 지배되고 관리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더욱 중요한 문제를 내포하게 된다.

한국사회는 에너지원의 98% 이상을 수입에 의존한다.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 거의 모든 자원이 그러하다. 최근 중국과 인도의 자본주의적 성장은 그들의 엄청난 인구의 규모와 맞물려 동북아 진영의 에너지 전쟁에 이르는 위기적 정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석유전쟁이 이라크 전을 불러일으키고, 러시아의 에너지 마피아가 유럽 사회를 초긴장 상태로 내몰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한국에 에너지원 확보를 위한 치열한 경쟁이 미칠 파고가 어디까지 이를 것인지는 상상을 불허할 것이다.

물은 에너지와 달리 국내에서 자급자족하고 있다. 그러나 거의 100%에 이르는 통신과 에너지의 보급률에 비해 상수도 보급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특히 농촌 등 군 단위 보급률이 33%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간이상수도나 우물에 의존하는 농어촌 지역의 수질은 심각히 오염되어 있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개발과 공급 위주의 국가 정책은 국토를 유린하였고, 물이라는 동맥을 썩어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듯 에너지 산업이 어떠한 에너지원을 어떻게 공급해야 할 것인가 하는, 친환경적 에너지 체제 전환이라는 근원적 과제를 안고 있는 것처럼 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과 에너지를 상품화하여 보편적 공급권을 박탈하고자 하는 민영화 정책을 막아내는 것은 우리의 인권을 지키는 최소한의 교두보가 된다. 그러나 에너지원의 안정적 수급을 위한 자립, 친환경적 재생 가능한 에너지 체제 전환을 위한 에너지 전원 구성의 다변화, 에너지 저소비를 위한 효율화 정책 등 중장기적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 자원의 보존과 수질 관리 역시 중요하며 물을 과소비하고 오염시키는 현재의 소비구조, 그리고 산업 구조를 재편하기 위한 고민이 시급하다. 물과 에너지를 인권으로 인식하는 확장된 의미의 사회공공성 쟁취 투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덧붙임

송유나 님은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사무처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