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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녹보라, 우리 지금 만나] 탈핵, 노동 운동과 환경 운동이 함께 가야할 길

여섯 번째 이야기 : 적과 녹이 만드는 이야기

후쿠시마 원전 사고 소식을 들었던 날이 기억난다. 단 한 번도 바다의 색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던 검은 바닷물이 한 도시를 삼켜버리던 그 날.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참혹하게 변해버린 그 잔해더미의 후쿠시마보다 우리를 더욱 공포에 떨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후쿠시마 원전들이었다. 2호기, 3호기, 1호기, 카운트 다운하듯 원전들은 뜨거워지고 있었고, 냉각 장치는 이미 수리 불능 상태였다. 급기야 바닷물이 통째로 원전들에 들이부어졌다. 그로부터 다섯 달이 지난 지금. 이제 일본 원전 관련 소식들은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과연 이래도 괜찮은 것인가?

이번 가나다 토론회에서는 기후변화와 반핵 문제를 연구해 온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소장이자 동국대 교수인 박진희 님과 발전노조와 공공연맹 위원장을 거쳐 현재 발전노조 조합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호동 님이 함께 만나, 적과 녹이 만나온, 혹은 만나야 할 반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탈핵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베를린에 가다

박진희 님은 실제로 탈핵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독일의 베를린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사실 에너지 전환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실제 실행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갈등이 기다리고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탈핵 논의는 그 무엇보다도 실제 당사자인 시민들의 논의가 절실하다고 한다. 그래서 독일은 탈핵 논의를 위해 관련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합의를 만들어나가는 과정들에 집중하고 있다.


한 예로 독일의 주요 도시들에서는 100명의 주민을 선발해 탈핵에 관한 시민회의를 소집한다. 이 회의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시민 각자가 지불해야 할 전기 요금이 올라가더라도 에너지 전환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지, 실제 어떤 기술적 대안이 가능한지 등을 전문가들과 함께 토론한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정책 시행 이전에 다양한 시민 참여 프로그램들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고, 합의하는 과정들을 밟고 있다고 했다. 박진희 님은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독일에서 탈핵과 에너지 전환은 단지 선언적인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안까지 연결되는 과정이며, 정책 입안 과정에서부터 이미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밟아오고 있다는 것이 의미 있게 느껴졌다고 했다. 한국의 탈핵 논의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는 부분이다.

노동 운동 속에서 환경 문제를 만나다

박진희 님의 이야기에 이어 이호동 님은 평생 노동 운동가로서 살아온 자신의 삶 속에서 탈핵과 같은 환경 의제들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다. 88년 한국전력에 입사한 이호동 님은 대기오염의 주범이었던 울산 화력발전소에서 노조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환경운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에 한전 직원이라고 밝히고 환경운동연합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 방문이 의아하게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당시에 노조 민주화 투쟁만으로도 굉장히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환경 문제에 깊게 개입할 여력은 없었지만, 그래도 울산이라는 곳에서 살아가다보니, 환경 문제와 연을 맺지 않을 수는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만나 무언가를 함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후 한전 민영화 문제가 불거졌던 발전 파업 때 노동 운동과 환경 운동은 만날 수 있었다.


당시 환경 단체들은 노조가 탈핵문제와 환경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을 전제로 발전노조 파업 지지 선언에 참여했다. 하지만 파업 이후 이호동 님은 수배 생활을 하게 되었고, 환경 단체와의 약속을 바로 지킬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2004년 3월까지 위원장직을 수행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 원자력 발전소 문제로 워크숍을 진행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고 했다. 물론 그런 과정들이 쉽지는 않았는데 당시 노조 분위기가 환경 단체와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별로 탐탁치 않아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에너지 산업 분야가 필연적으로 환경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것에 일부 사람들이 공감하는 정도였다.

2005년 6월에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가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적과 녹이 만나 에너지 공공성 문제를 가지고 연합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물론 탈핵 논의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민주 노조들이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공유된 의미 있는 방향 전환이었다고 이호동 님은 평가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도 전에, 이명박 정권 이후 구조조정이 가속화되고, 노동 운동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관련 논의는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민주노총이 다른 환경 단체들과 함께 기후정의연대를 꾸려 활동하면서 노동운동과 환경운동 사이에 새로운 국면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호동 님은 결국 노동운동은 노동운동 진영대로, 환경운동은 환경운동 속에서 에너지체제 전환을 위한 공동 노력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이 문제는 노동 운동과 환경 운동이 힘을 합해 정부와 자본에 대항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노동운동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에 노동운동이 얼마나 환경 문제에 개입할 지 지금은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올해부터는 민주노총에서 환경 관련 담당자를 정하고, 기후정의연대도 함께 창립하는 등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박진희 님은 노동운동이 탈핵 문제에 적극 개입하는 것은 독일 사례에서 보듯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독일에서 80년대 중반에 노동계에서 탈핵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단계까지 나아갔지만, 실제 탈핵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내는 데 있어서 노조의 역할은 크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노동 운동이 탈핵 논의까지 나아가는 것이 힘든 작업이라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독일에서 탈핵 논의는 주로 시민운동과 지역 차원에서, 아래로부터의 시민운동 방식으로 주로 이루어졌고, 결국 에너지 체제 전환은 지역을 기반으로 일상의 변화와 지역 차원의 시스템 변화를 같이 가져갈 때 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 탈핵과 에너지 체제 전환 문제를 고민할 때 적녹 연정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에 대해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한국의 에너지 다소비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이호동 님은 결국 에너지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핵발전소 비중을 얼마나 줄일 것인가이고, 결국 현재의 에너지다소비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미래 생존을 기획하기 어려운 단계에 왔다고 보았다. 사실 이미 많은 에너지 자원들이 이제 몇 십 년 안에 한계치에 도달할 것이고, 이제는 에너지 문제를 수급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과 소비구조 전체를 바꾸는 문제로 가야한다고 보는 것이다. 후쿠시마 사건은 계속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고,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충분한 고민과 시간을 가지고 합리적 대안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현재 구성된 민주노총, 해당 노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기후정의연대 틀 속에서 계속 이야기를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박진희 님도 환경 단체 입장에서 원자력 발전소 확장 전면 중단을 외치고 있지만, 동시에 탈핵 논의가 원자력 노동자 일자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한국 정부가 2030년까지 원자력 발전소 14기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결국 탈핵 논의는 현 원자력 관련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련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고민 없이 노동 운동에게 무조건 탈핵 운동을 주장하자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 원자력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기술을 가지고 다른 산업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들이 고안되어야 한다. 탈핵 논의와 함께 관련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일자리 문제까지 함께 고민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한 참가자는 에너지 절약이라는 구호가 현장 노동자들에게는 노동 강도를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어 현장 노동자들에게 에너지 체제 전환이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에 박진희 님은 사실 전기는 에너지 효율이 매우 낮은 에너지인데도 원자력이 출력을 조정할 수 없는 에너지원이기 때문에 심야 전력을 싸게 공급하고, 이 때문에 사실 낮에 해도 될 일들을 노동자가 밤에 일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대답했다. 따라서 불필요한 전기 설비들을 다른 방식으로 전환하고, 폐열 설비를 잘 마련해서 효율성을 높이는 방식들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산업 에너지 효율성 문제와 노동 강도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호동 님은 과거에는 ‘양질의 전기를 값싸게 공급한다’가 노동조합의 주장이었다면, 이제는 ‘과연 전기를 값싸게 제공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으로 시각을 달리해야 하는 지점에 놓여있다고 강조했다. 적정 요금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소비자의 이용 패턴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에너지 소비체제 전환 등 근본적인 재설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호동 님과 박진희 님은 에너지 다소비 구조에서 저소비 체제로, 화석연료 중심에서 재생가능 에너지 체제로, 공급 중심의 관리 정책에서 수요 관리 정책으로의 변화가 불가피한 시점에 와 있다고 강조하며 가나다 토론회를 마무리했다.

비록 토론회는 끝이 났지만, 탈핵이라는 결코 끝나지 않을, 그러나 반드시 해내야 할 과제는 우리에게 남아있다.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탈핵이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함께 해 나갈 길은 아직은 멀어보였지만, 지금의 에너지체제를 반드시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 전환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만은 모두에게 분명해 보였다.

* 9, 10월 가나다 토론회는 쉽니다.
덧붙임

이안지영 님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