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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움틈] 호주제 폐지 이후, 새판 짜야할 '가족담론'

가족관계의 배타성 넘어 다양하게 '연대할 권리'

지난 3월 2일 호주제 폐지 민법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반세기만에 성차별의 대명사 호주제는 2008년이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다. '호주제'는 폐지됐지만, 호주제를 뒤받침하고 있던 혈연·이성애 중심적인 '가족개념'은 호주제 폐지 민법개정안 속에, 대법원과 법무부가 제시하고 있는 호적을 대신할 '국가신분등록제도'에 그대로 녹아들어있다. 이에 맞서 인권·여성·소수자 운동단체들은 '목적별신분등록법제정공동행동'을 결성, 한국사회에서 가족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개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문제, 특정 가족형태를 '정상가족'으로 규정하는 문제를 사회적으로 제기해왔다. 이에 발맞추어, 입학·취업 시 불필요한 가족 정보를 요구하는 관행에 반대하는 운동이나, 가족관계를 증명해온 호적으로 인한 피해사례를 증언해온 운동은 정상가족의 중심성을 깨려는 소중한 몸짓이다.

인권운동이 '가족'에 주목하는 이유는 전통적인 가족이 아닌 독신·동거·별거 등을 선택하는 개인이 인구학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정상가족'의 경계에 도전하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재구성하는 운동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족에 기반을 둔 인권보장체계의 한계를 통해 개인이 중심이 되는 인권보장체계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존재한다.


"결혼 안하면 손해"

지난 수십년간 가족은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단위로 위치 지어졌고, 위기의 순간에 개인을 구출하는 구원자임과 동시에 개인의 출신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배경이 되었다. 운동사회 내에서도 '가족'에 대한 담론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존재한다. 가족의 문제를 가족 내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진영이 있는 반면, 배타적인 가족의 경계를 허물며 다양한 가족형태를 인정·지원하라는 운동을 전개하는 그룹도 있다. 또한 운동사회 내 존재하는 '가족주의'는 성소수자, 여성에 대한 차별을 야기하기도 한다. 얼마 전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제작·배포한 포스터에서 혈연·이성애 가족의 정상성이 모든 사람의 보편성으로 환원되어 성소수자와 인권단체들이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게다가 '결혼'을 통해 가족을 구성해야 비로소 한 사람의 '시민권'을 획득한다는 관념은 사회공공재를 이용하는 것은 물론 사회참여에 있어서 비혼자를 차별하기도 한다. 결혼을 통해 얻어지는 온갖 혜택을 떠올리면 "결혼 안하면 손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님을 실감하게 한다.


가족개념 하나로 규정할 수 없어…'정상가족'은 없다

최근 출산율 하락, 이혼 및 독신가구 증가 등 가족을 둘러싼 사회 인구학적인 변화는 '가족' 에 대한 기존의 정의를 변화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양부모와 미혼의 자녀로 구성된 전형적인 핵가족은 전체 가족형태 중에서 50%에 불과하다. 한부모 가족, 재혼가족, 맞벌이 가구, 자녀를 두지 않는 부부가족, 기러기 아빠로 칭하는 별거가족, 동거가족, 동성애 가구, 독신 가구 등 가족구성과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는 현실에서 가족의 범위나 경계, 내용과 성격을 규정하는 '하나의 가족 개념'은 존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지난 3월 2일 국회를 통과한 민법개정안에는 가족의 범위에 대해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생계를 같이 하는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규정은 이 범위를 만족시키지 못한 가족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낙인을 유발시킬 수 있고, 특정가족에게 과도한 특권을 부여하는 한편 그 외 가족형태는 어떠한 사회적 지원도 제공하지 않는 문제점을 야기한다. '정상가족'에 대한 특권은 역으로 그 범주에 포함되지 못한 가족에 대한 지원을 박탈함으로써 오히려 다양한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가로막기도 한다.


가족담론 재구성…배타성 딛고 동반자적 관계 지향해야

전통적인 '가족'의 경계를 넘어 다양하게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배타적인 가족관계를 딛고, 다양하게 사회적으로 '연대할 권리'를 지향하기도 한다. 이를 위해 여성학자 조주은 씨는 "일부일처제에 기반을 두어 배타적인 관계적 속성을 지닌 '배우자' 개념이 재정의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 씨는 '정상가족'의 폐해 중 심각한 문제는 가족의 폐쇄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공동체의 화합과 연대를 방해하는 반사회적인 성격(anti-social)이라고 지적하며 "전통적인 가족개념을 넘어서 동반자적 관계(partnership)-섹슈얼한 관계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일정한 기간동안 상호부양을 해온 친밀한 관계, 복수일 수도 있다-를 지칭하는 다른 개념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전망한다.


다양한 가족형태에 대한 지원체계 있어야

또한 특정가족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지원이 다양한 형태의 가족에게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즉 한부모 가족·공동체 가족·동성애 가족·독신가족 등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법적 제도적 정책이 뒤따라야한다는 것. 다양한 가족형태에 대한 지원은 혈연 가족중심성을 떠받치고 있는 제도의 변화 없이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이를 위해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실질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상속법과 세법이 개정되어야 한다. 조주은 씨는 "피를 나눈(?) 가족 안에서만 상속과 상호부양, 보호가 가능하도록 하는 상속과 세법, 사회복지법 등은 확대된(또는 재정의된) 배우자 개념정의와 함께 다양한 가족 안에서도 가능하도록 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상속과 관련하여 일정한 한도 이상의 재산이 생물학적 가족에게만 상속되어 계급이 재생산될 수 있는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확고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하고 일정한 기간동안 동반자적 관계를 해온 관계에서 상호 상속이 가능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가 개정되어야 한다는 것. 예를 들어, 장애인, 노숙인 공동체가 만들어질 경우 저렴한 주거비로 집을 임대할 수 있게 한다든지 배우자 수당을 법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파트너쉽을 유지하는 관계까지 확장하는 것을 고려해볼 수 있겠다.


가족이란 국가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회적 보호막?

한국 사회(국가, 학교, 기업 등)에서 가족은 과연 '가족'을 빼면 이 사회가 굴러갈 수 있을지를 의심하게 할 만큼 견고한 기제로 작동되고 있다. 학교는 아동·청소년을 지도, 교육한다는 미명하에 가족관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문제아로 찍히면 가족환경조사서를 본다. 개인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서류를 준비할 때도 기업에게 그 사람의 배경인 '가족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또한 시장은 남성가장이 가족을 부양한다는 모델에 기초해 '가족임금체계'를 만들어 놓았다. 이 구조에서 여성과 아동, 노인 노동은 부차적인 생계노동일 뿐이라는 가정 하에 더 적은 임금이 합리화되고 동일한 가치의 노동에 따른 동일한 임금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정규직 남성의 갹출(기여)에 근거해 만들어진 사회보장 체계에서 여성과 아동, 노인은 남성가장의 연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정규직 가장남성이 없는 여성, 아동, 노인은 공적부조로 가거나 혹은 빈곤의 늪으로 빠져야 한다. 기존의 사회보장권이 추구해온 가족모델은 가족에 포함되지 못한 개인을 배제하고 있다. 게다가 취약하기 짝이 없는 사회복지 정책 앞에서 호적상 가족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국민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될 수 없는 한편, 가족은 열악한 복지서비스를 보완해주는 일익을 담당하기도 한다. 공교육의 실종 앞에서 가족이 없으면 학비를 마련하기 힘들고, 독립적으로 주거비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평생을 참고 지내거나 시설과 쉼터를 전전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가족은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보호막이 되기도 하지만, 그 보호막이 갖는 배타적 속성은 역으로 국가가 제공해야 할 '공공적 사회적 성격'의 서비스나 재화를 '사인(私人)인 개인'에게 의존하게 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결국 사적 보호망 구실을 담당해줄 가족이 없는 개인은 사회적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다. 또한 인권보장체계에 있어서 가족주의 모델은 가족이라는 사인(私人)을 통해 인권이 증진되고 실현되는 방식에 기반 해 있어서 역시 가족을 매개하지 못하는 개인은 배제된다. 결국 가족단위가 아닌 개인단위에 초점을 맞추어야 인권 실현에 있어서 차별을 예방할 수 있다.

'정상가족'에 대한 도전과 대안 가족 혹은 공동체운동은 제도의 변화와 함께 문화적 차원의 관습과 인식 변화가 동반되어야 한다. 한국사회 가족에 관한 논의는 아직도 시작이며 그 과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