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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즐거운 물구나무] 우리 정규직 되면 결혼하자?

지난 주 깊은 밤을 넘어 새벽을 향할 즘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허겁지겁 달리기를 한 결과 지하철 5호선 동대문운동장역 승강장에 도착했다. 습관처럼 의자에 앉아 전철을 기다리는데 커다란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문제의 포스터

▲ 문제의 포스터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등 18개 단체의 이름이 수록된 '비정규직 개악 저지에 관한 포스터'. "우리 정규직 되면 결혼하자"라는 문구를 보는 순간 내 마음과 머리에 스며드는 것은 '이성애 중심의 결혼관'에 관한 불편함이었다. 호주제 폐지 이후 새로운 국가신분등록제도를 만들기 위한 운동을 하면서, 가장 대적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가족에 관한 국민정서'이다. 국가보안법 투쟁에는 '국가안보'라는 넘어야할 산이 있고, 비정규직 투쟁에는 '국가경쟁력'이 건너야할 강이라면, 대안적인 공동체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골수에 깊이 박힌 가족에 관한 '국민정서'를 극복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골수 깊이 박힌 이성애 가족 중심성은 결혼과 혈연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로 한국사회 전반을 꽁꽁 묶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가족'은 시장과 국가정책에 두루 관통되고 있다. 시장은 남성가장이 가족을 부양한다는 모델에 기초해 '가족임금체계'를 만들어 놓았다. 이 구조에서 여성과 아동, 노인 노동은 부차적인 존재로 남겨지고 동일한 가치의 노동에 따른 동일한 임금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또한 정규직 남성의 갹출(기여)에 근거해 만들어진 사회보험 체계에서 여성과 아동, 노인은 남성가장의 연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정규직 가장남성이 없는 여성, 아동, 노인은 공적부조로 가거나 빈곤의 늪으로 빠져야 한다.

비혼, 독신, 이혼이 증가하고, 결혼제도에 진입조차 할 수 없는 성소수자의 고통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의자에 앉아 결혼을 기약하는 남녀의 모습은 다른 형태의 삶을 추구하는 개인을 배제시킨다. 배제라는 용어에는 물리적 재화에 대한 접근의 차단뿐만이 아닌 이른바 '그 사회 주류 가치'로부터 겪는 심리적 소외감도 포함된다.

파업을 선동하는 포스터조차 이성애 가족과 결혼을 매개로 이어진다는 느낌이 들자, 그 견고함은 마치 깰 수 없는 장벽처럼 보인다. 그 장벽에 균열을 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포스터에 등장하지 못하는 한국사회 다양한 소수자를 주인공으로 한 파업포스터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지하철 막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내내 떠나지 않는 고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