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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비혼 출산이 던진 질문

‘정상가족’ 규범을 바꾸어나갈 국가의 책임

정자은행을 통한 비혼 출산 소식이 알려지며 용기 있는 선택에 대한 축하가 이어졌다. 그간 한국사회에서 임신과 출산은 결혼 이후에나 가능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성애중심주의 아래에서 결혼, 임신, 출산을 하나로 묶으며 당연히 순차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이라 여겨온 통념을 깨뜨린 이번 소식에 국회가 유독 빠르게 반응했다. 정부여당은 “다양한 가족 형태를 존중하는 열린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며 제도 정비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고 차별을 없애자는 요구는 시민사회가 오랜 시간동안 외쳐온 바이기도 하다. 분명 환영할 만한 발언인데도 찜찜함은 가시지 않는다. 정부여당이 말하는 ‘다양한 가족 형태를 존중하는 사회’가 시민사회에서 요구해온 것과는 전혀 다르리라는 짐작 때문이다.

누구를 위한 비혼 출산 지원인가

소식이 알려진 이후 가장 먼저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정자은행을 통한 비혼 출산의 불법 여부였다. 명백한 불법까지는 아니지만 혼인한 상태가 아니면 사실상 보조생식술에 접근이 불가능한 법적 공백을 메우겠다며 국회는 제도 개선에 의지를 보였다. 함께 언급되곤 하는 통계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혼외출산율은 OECD 국가 평균 40.7%인데 비해 한국은 2.2%에 그친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 보조생식술은 ‘난임 부부’를 위한 정책으로 제한되었으며, 법적 혼인 관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임신을 위한 의료 접근과 지원이 막혀 있었다. 국회는 제도를 정비해 비혼 출산의 문을 넓힐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정말로 비혼 여성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의 재생산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일까?

“임신한 여성의 안위가 곧 태아의 안위”라는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낙태죄 개정 시한이 12월 말로 다가왔다. 그런데 정부는 여성의 재생산권을 보장하기는커녕 낙태죄에 대해 처벌 조항을 존치하며 국가가 여성의 몸을 통제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형법 개정안을 내놓았고, 지난 24일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여당 내에서 자체적으로 추진해온 낙태죄 전면 폐지안은 동참하려는 의원이 없어 발의조차 못하고 있다. 이러한 국회가 정작 비혼 출산을 위한 제도 개선에 나서는 것은 혼외출산율 증가를 저출산 ‘문제’의 ‘해법’ 쯤으로 바라보며, 비혼 출산 보장을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취급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지원을 혼인관계에 국한하지 않도록 확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국가가 임신과 출산을 하는 몸으로써만 여성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선별적으로 지원하거나 금지하는 관점을 바꾸지 않은 채 그저 비혼 여성이 출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 개선에 그쳐서는 안 된다. ‘낳을 권리’와 ‘낳지 않을 권리’는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아있다. 국가의 기준과 잣대에 따라 낳지 않을 권리를 통제하거나 낳을 권리를 지원하는 것은 여성의 재생산 권리 보장이 아니라 여성의 몸을 더욱 촘촘히 도구화 하는 일일 뿐이다.

정상가족이라는 규범

가족정책의 기반이 되는 건강가정기본법은 ‘가족’이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지며, ‘가정’은 ‘가족구성원들의 부양·양육·보호·교육이 이루어지는 단위’라고 규정한다. 또한 모든 국민은 혼인과 출산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하며, 국가는 가족해체를 예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가족의 상은 언제나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다. 2017년 1인 가구의 수가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가구를 추월하며 이제 전체 가구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코로나19 재난지원금 지급에서 더 이상 주된 가구가 아님에도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정상가족의 잣대로 4인 가구를 기준으로 하고 세대주만 신청할 수 있도록 한 것에 비판이 뒤따르기도 했다. 최근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며 인구 감소가 국가경쟁력을 저해할 것이라는 우려 속에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대책이 논의되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출산억제를 위해 국가 정책 차원에서 피임시술이 이루어지고 임신중지는 권장되었으며 다자녀 가족은 불이익을 받았다. 이렇듯 재생산 권리는 국가의 필요에 따라 관리되었으며 가족의 구성과 형태는 다양한 억압과 통제를 당해왔다.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정상가족이 더 이상 일반적인 형태가 아닌 현실이지만, 필요에 따라 재생산 영역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여전히 국가는 재생산을 담당하는 단위로서 가족을 규정하며 정상가족이라는 규범을 고수한다. 부부와 자녀로 구성되는 ‘정상가족’의 양성을 목표로 국가는 신혼부부 및 다자녀 가정에 금융·부동산·세제 등의 혜택을 주거나 지원해왔다. 이러한 정상가족의 틀에서 벗어난 한부모 가족, 조손 가족, 다문화 가족 등은 특별히 더 보호가 필요한 취약집단으로 보면서 별도의 지원 규정을 마련하고 그 범위를 조금씩 확대하는 식이었다. 정부여당은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한 인정을 말하지만, 정작 정상가족 규범과 그로부터 출발하는 국가의 재생산권 통제의 문제를 건드리지는 않는다. 지금 우리가 들여다봐야 할 것은 수많은 정책과 제도를 뒷받침하며 한국사회에서 강력하게 작동하는 정상가족 규범 그 자체이다.

여성에게 전가된 굴레 

정상가족이라는 규범은 현실의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가린다. 가족으로부터 돌봄 받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탓으로 돌려지며 나아가 이러한 정상가족 규범 하에서 여성에 대한 통제와 수탈은 쉽게 은폐된다. 어느 정부건 일과 가정의 양립을 내세우고 성평등한 지원 정책을 펼치겠다고 하지만, 여전히 결혼과 출산은 여성이 일할 수 없는 조건으로 작용한다. 가족이라면 응당 해야 할 역할로 규정되는 육아, 자녀교육, 가족 돌봄의 역할은 언제나 여성에게 전가되어 왔다. 돌봄에 대한 공공의 영역을 확대하겠다고 하지만, 필요에 따른 접근이 아닌 취약성, 긴급성을 평가해 선별된 일부에게만 주어지는 방식이며, 각자의 형편에 따라 필요한 돌봄은 민간의 영역에서 소비하거나 포기하게끔 하는 형태로 방기한다.

가족을 유지해 가는데 필요한 아내이자 엄마로서 사는 여성의 삶은 ‘모성’이나 아름다운 ‘희생’으로 포장되곤 하며, 여기에 일까지 하는 여성은 ‘슈퍼맘’이라 칭송된다. 친밀한 울타리라는 가족은 여성에겐 무료노동이 강요되는 굴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구조는 외면 받으며, 결혼하지도 출산하지도 않는 비혼 여성은 이기적이라고 비난 받거나 결혼과 출산 가능성을 끊임없이 질문 받으며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상태로 취급되곤 한다. 예기치 않은 임신·출산으로 양육할 조건이 안 되는 여성에게는 비정한 모성을 탓하며 무책임하다는 말이 따라붙는다. 여성들에게 전가된 돌봄과 양육이 정상가족 규범을 떠 받들어 왔다. 이러한 구도에서 국가는 손해 볼 게 없으며, 여전히 정상가족 규범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

국가는 정상가족이라는 규범을 고수하지만, 이미 현실에서는 규범을 넘어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실거린다. 지난 10월 통계청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사실상 배우자임에도 이성애 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되는 인구주택총조사가 여전히 현실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 즈음 동성혼 배우자를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등록했다는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자마자 건강보험공단에서 바로 취소 통보를 하는 일도 있었다. 함께 돌보며 지내온 관계여도 규정상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망 후 ‘무연고’로 처리되는 상황을 자주 접하기도 한다. 법적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간 함께 일궈온 관계가 부정되고, 가장 가까운 사람임에도 그를 위해 아무런 결정을 할 수가 없는 기존 가족 규정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생활동반자법 제정 논의가 2014년부터 제기되었으나 지난 19대, 20대 국회에서 발의조차 된 적이 없다.

이러한 사례들은 그저 안타까운 사연이 아니라 혼인과 혈연을 기반으로 한 가족 개념에 의문을 가지는 경험으로, 가족 규범에 따라 국가의 인정과 지원체계가 작동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인식으로 쌓여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상가족 규범에 질문을 던지며, 혼인과 혈연에 기반한 기존 가족 규범에 편입되지 않고 서로 돌보는 평등한 관계이자 친밀한 공동체로서 새롭게 가족을 구성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점점 더 많이 들리고 있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고, 부양하지도 부양받지도 않고, 이혼하고, 혼자서 자녀를 돌보며, 친구랑 살며, 동성커플끼리, 반려동물과 함께 등등 내가 원하는 관계를 맺고 꾸리면서 삶을 일구어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누구라도 ‘비정상’이 될 수 있는 정상가족 신화의 허구를 드러낸다. 이는 곧 성애적 관계 위에서 돌봄과 부양의 의무를 덧씌우던 가족을 넘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평등하게 함께 돌보고 친밀함을 형성하는 관계로서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구성하는 실천이다. 이렇듯 다양하게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보장하고 차별 없이 지원하라는 요구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정상가족’ 규범 안으로 포섭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포섭과 배제를 통해 재생산권을 통제하고 가족의 형태를 규정해온 정상가족 규범 자체의 해체를 겨냥한다.

규범을 향한 질문과 변화로

정부여당이 이야기하는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한 존중이 기존의 정상가족 규범과 공존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정상성에서 벗어난 것을 결핍이라 여기며 약자로 위치 지우고 잔여적으로 인정과 지원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넘어설 때 변화는 시작될 수 있다. ‘용기 있는 선택’이라는 응원의 물결은 누구라도 비혼 여성과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특별히 더 용기내지 않아도 되는, 스스로 선택하여 다양하게 일구어가는 가족-공동체가 온전히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자는 이야기로 이어져야 한다.

이번 비혼 출산 소식에 대한 관심과 의지가 정상가족이라는 규범을 향한 질문과 변화로 이어지길 바란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르며 위계를 만들고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정상가족의 범주 안으로 포섭해나가는 방식이 아닌, 이미 존재함에도 배제되거나 가려져온 다양한 가족-공동체의 자리를 만드는 구체적인 제도의 변화를 요구한다. 지난 9월 발의된 건강가정지원법 개정안은 제정 당시부터 차별과 낙인을 조장하고 다양한 가족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비판받아온 법안의 명칭을 바꾸고 가족의 정의를 삭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법 개정을 비롯해 혼인이나 혈연 외에도 서로 돌보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를 인정하고 권리를 보장하는 생활동반자법에 대해서도 진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다양한 가족을 존중하는 열린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국가의 책임이 그저 비혼 출산을 위한 제도 정비에 그쳐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