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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멀고 먼 '인권경찰'의 길

경찰청, '인권보호 종합추진계획' 발표

허준영 경찰청장 취임 이후 '인권경찰'을 표방한 경찰이 이번에는 '인권보호 종합추진계획'을 발표해 "인권수호의 선도자가 되겠다"고 나섰다.

4일 경찰청은 피의자 인권보호를 위해 △심야조사는 원칙적으로 자정까지로 제한하고 △여성, 노약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특성에 맞는 조사환경을 조성하고 △사인조사관, 범죄분석팀 등 전문요원을 확보해 증거중심의 과학수사 역량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또 경찰청은 유치인 보호체계를 인권친화적으로 개선한다면서 △신축 경찰서부터 부채꼴 구조인 통제·감시 위주의 유치장 구조 대신 "친인권적 구조"로 설계하고 △현시설은 먼저 여성·외국인 전용 유치실을 시범 운영하고 유치실내 화장실의 차폐시설을 보완하면서 단계적으로 개선하며 △무죄추정 원칙에 부합하도록 유치실내 준수사항과 계구사용의 한계 등을 명확히 하도록 했다.


경찰, '인권경찰'로 거듭나나?

이밖에도 경찰은 △조사 과정에서 신고자나 피해자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화상대질조사실을 만들어 피해자가 가해자와 직접 대면하지 않도록 하고 △신변보호의 기준과 단계별 세부절차를 규정한 신변보호 프로그램을 마련하며 △범죄 피해자의 '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예방을 위해 범죄 현장에서부터 임상심리사 등 전문가가 포함된 위기개입팀을 단계적으로 운영하고 △범죄정보관리시스템(CIMS)과 연계해 사건의 접수·배당·진행·이송·수사결과 등을 피해자에게 문자메시지(SMS)로 보내도록 했다. 또 피해자의 경찰서 출석으로 인한 2차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현장에서 한번에 피해자 조사를 끝내는 '원-스톱(One-Stop) 조사제'를 단계적으로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또 외부로부터의 감시와 참여를 위해 △국가인권위·인권단체 등과 협력체계를 유지하고 △15명 내외의 순수 민간인권활동가로 '인권수호위원회'를 구성해 경찰청의 인권시책에 대한 자문과 권고 기능을 수행하며 △인터넷 공모와 시민단체 추천으로 10명 내외의 '시민인권보호단'을 지방청별로 구성해 경찰활동 전반에 걸친 인권침해를 감시하고 △인권수사 매뉴얼과 지속적인 인권교육을 통해 일선 경찰관들의 인권감수성을 향상시키겠다고 밝혔다.

이번 발표에 대해 인권활동가들은 전반적으로 환영하면서도 '수사권 독립을 위한 이벤트성 기획'일 가능성을 경계했다. 인권운동사랑방 박래군 상임활동가는 "예전에도 비슷한 방안이 화려하게 발표되었지만 실현되지 않고 말로만 그쳤다"며 "원-스톱 조사제나 임상심리사 도입 등은 경찰의 마인드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좋은 방안이지만 전체적으로 예산과 인력이 뒷받침되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밝혔다. 또 "최근 검찰도 여러가지 인권보호 방안을 발표하는 등 경찰과 검찰이 서로 인권 경쟁을 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실현되지 않는다면 수사권을 둘러싼 '인권 팔아먹기' 경쟁에 불과하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경찰 재량에 맡겨진 '심야조사'

한편 세부방안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먼저 심야조사는 원칙적으로 자정까지로 제한하면서도 "체포기간 내 구속여부 판단을 위해 신속한 조사가 필요할 때"는 예외로 해 경찰의 판단만으로도 심야조사를 계속할 수 있도록 뒷문을 열어놨다. 현행 형사소송법 제200조의2 제5항은 "체포한 피의자를 구속하고자 할 때에는 체포한 때부터 48시간이내에…구속영장을 청구하여야 하고, 그 기간내에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피의자를 즉시 석방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48시간 안에 구속영장을 청구할 수 있을만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경찰의 판단만으로도 심야조사는 계속될 수 있게 됐다. 박 상임활동가는 "체포 전에 과학수사를 통해 증거를 확보해야지 일단 체포부터 한 후 피의자를 다그쳐 자백을 받아내는 수사관행을 바꾸지 않는다면 심야조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피해자의 편의를 위한 문자메시지 통지제도도 도마에 올랐다. 박 상임활동가는 "의도는 좋지만 피해자의 개인정보 등 민감한 정보를 수집해 데이터베이스로 축적시키면 언제든 유출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며 "명확한 원칙을 가지고 진행하지 않으면 안하느니만 못한 피해를 발생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시혜가 아니라 장애인이 보장받아야 할 권리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친족 등 보호자를 선정해 조사과정에 적극 참여하도록 권유하는 방안도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박숙경 인권팀장은 "장애에 대한 경찰의 편견과 장애로 인한 의사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무고한 장애인이 가해자로 몰리거나 피해자인 장애인이 가해자로 둔갑하는 경우가 허다해 장애특성에 맞는 조사환경 구성은 절실하다"면서도 "경찰에 의한 보호자 선임은 보호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자칫 장애인 본인에게 적대적인 보호자가 선임될 수도 있다"고 경계했다. 그는 "경찰이 '보호자'를 선정할 것이 아니라 장애인 스스로가 '보조인'을 선택하도록 해야 하며, 굳이 보조인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장애인에게는 본인 의사에 따라 다른 의사표현 수단이 지원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각장애인의 경우 문자를 읽어주는 컴퓨터 음성보조 프로그램, 뇌병변 등 언어장애의 경우 컴퓨터 모니터를 통한 진술제도 등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는 것.

이어 박 인권팀장은 "장애인의 특성에 맞는 조사환경은 이른바 '정상인'에 대한 '예외'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며 "경찰 재량에 맡기게 되면 현장에서는 지침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으므로 수사과정에서 '장애인의 요구사항'과 '경찰이 취한 조치'를 의무적으로 기록하고, 요구사항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진술은 재판과정에서 증거능력이 부인되도록 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방안에 대해 박 상임활동가는 "전반적으로 경찰서 안에서의 인권침해를 개선하려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지만, 경찰서 밖에서 지금도 자행되는 불법 불심검문이나 집회·시위 과정에서 경찰관의 불법행위 등 인권침해 또한 감시되고 해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