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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공정이 아니라 경쟁이 문제다

이준석 후보가 국민의힘 당대표로 선출됐다. 주요 정당 사상 30대 당대표는 처음이다. 청년들과 함께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겠다는 그의 포부에 많은 이들이 호응한 결과다. 세대교체와 법조계, 경제계 인사들의 정치권 데뷔는 한국 정치가 낡은 정치를 새로운 정치로 포장하는 전형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준석 현상’은 다르다. 이준석에 대한 지지여부를 떠나, 적어도 그가 지금 한국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어떤 분노’에 기반하고 있다는 데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이준석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 갈래다. ‘공정한 경쟁’을 부르짖지만 그 역시 자수성가한 흙수저가 아니라 엘리트 출신이라는 점, 왜곡된 젠더 갈등을 이용하고 부풀리는 ‘낡은 정치인’이라는 점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준석을 비판하기 전에 그가 발 딛고 선 대중들의 ‘분노’가 무엇인지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준석의 정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이 아닌 낡은 정치의 실패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줄어든 일자리, 극심해지는 경쟁, 불공정한 사회

 

97년 외환위기 이후 전면화된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노동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비정규직’이라고 통칭되는 불안정 노동의 일반화였다. 이는 삶을 계획할 수 있는 안정적 일자리의 대폭 축소와 이러한 일자리에 진입하기 위한 경쟁의 격화로 이어졌다. 대기업과 공기업을 중심으로 한 공채시험과 공무원 시험에 몰리는 사람들, 스펙 쌓기의 일환이 된 대학 편입학과 전문직 자격증 획득 경쟁, 언제나 사상 최고치라는 ‘청년 실업률’은 지난 20여 년 동안 일상이 되었다. ‘0세 사교육’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쟁을 제외하고 청년세대의 삶을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현재 청년세대만 지난 20여 년을 살아온 건 아니다. 갑자기 얼어붙은 취업시장에서 인턴과 비정규직을 반복했던 과거의 청년들, 퇴직금으로 자영업을 시작한 해고 노동자들, 유통 서비스업과 돌봄노동이라는 저임금 일자리로 불려 나온 여성들 모두 불안정 노동과 일자리 경쟁에 내몰리며 신자유주의 노동세계를 살아내고 있는 ‘기성세대’다.

 

경쟁에서 낙오되면 삶에서 낙오되는 한국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이 청년세대에게만 중요한 가치일리 없다. 20대 남성 마이너리티 정체성을 여론조사 통계로 주장했던 2019년 시사인 조사 에서도 공정과 경쟁은 세대와 성별을 불문하고 중요한 가치로 나타났다. 혈연, 학연, 지연으로 얽힌 사회에서 빽 없는 사람들은 손해를 본다.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만드는 경쟁 자체가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승자독식의 보상체계는 불평등을 강화한다. 그런데 불공정하기까지 하다면, 도저히 그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 승자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자기희생 속에서 경쟁을 견뎌온 이들은 그 보상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의 노력이 부정당하는 불공정을 느낀다.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공정해야 한다. 문제는 경쟁이건만 다들 원하는 건 공정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경쟁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공정하다고 생각했던 채용형태인 ‘시험’이 사라지고 있다. 주요 대기업들은 신입사원 공채가 아닌 경력직 채용으로 옮겨가고 있다. 조국사태, 정유라 사건과 같은 권력층에 의한 불공정이 자행된다. 소득 불평등은 켜켜이 쌓여 주식, 부동산과 같은 자산격차로 이어지고 지난 몇 년 동안의 주식, 부동산 폭등은 ‘공정’에 대한 대중의 감각을 우주 너머로 날려버렸다. 극심한 경쟁이 기본값이 되니, 사회변화의 상상력은 공정한 ‘경쟁’을 벗어날 줄 모른다. 부풀려진 젠더, 세대 갈등에서 시선을 돌려보면, 각자도생의 경쟁 속에서 공정함에 대한 요구는 세대와 성별을 가로지르는 시대적 보편이다. 경쟁이 당연하고 기본값인 세상에서 공정을 훼손하는 것은 ‘권력’이다. 이준석은 바로 이 지점에 적극 호응한다. 기득권 권력에 맞선 ‘공정한 경쟁’이 지금 이 세계의 폭력과 부당함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줄 대안처럼 떠오른다.

 

이렇듯 경쟁의 심화, 불평등, 양극화의 문제들은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그 연원이 분명한 ‘사회 문제’였지만, 역대 그 어느 정부도 이러한 경제 구조를 개혁하거나 자본의 전횡에 맞설 수 있도록 노동자의 권리를 사회적으로 확립하고 증진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한 것은 아니다. 불안정 노동을 확산시키고 노동의 위계와 차별을 강화하는 자본의 전략, 이를 뒷받침하는 산업정책, 경제정책의 문제를 특정 ‘인구집단’의 문제로 뒤바꿔버리는 온갖 ‘취약계층’ 지원책을 반복했다.

 

정치의 실패를 특정 인구집단의 문제로 뒤바꾸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며, 정부와 자본이 만들어낸 불안정 노동세계에는 ‘취약계층’에 대한 정부의 지원책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취업과 실업의 반복과 열악한 노동조건은 최소한의 소득보전과 일자리 알선을 위한 ‘노동복지’를 요구하게 된다. 그렇게 노동자의 권리를 제한하고 축소하는 ‘노동유연화’ 정책과 ‘노동복지’는 신자유주의 노동정책 패키지로 등장했다. 전체 고용 축소의 일차적 영향은 신규 채용의 축소였고, 이는 ‘청년 실업’의 만성화로 드러났다. 서비스 산업, 돌봄 산업의 팽창은 ‘여성인력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저임금 일자리를 여성에게 할당하는 정책으로 이어졌다.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는 제도 폐지를 요구하는 시기를 지나, 이제는 청년, 여성과 함께 ‘노동취약계층’을 대표하는 사라질 수 없는 ‘인구집단’이 되었다. 여러 지원정책의 현실적 필요성을 명분으로, 노동세계의 구조적 문제를 특정 인구집단이 갖는 고유의 취약함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자활근로, 장애인 고용 정책이 오랫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노동세계의 위계와 차별을 만드는 것은 노동착취를 위한 자본의 고유한 전략인데, 청년, 여성, 이주민, 비정규직이 실업률이 높거나 불안정 노동 영역에서 일하는 게 이들 집단의 인적 속성 때문인 것처럼 만든다. 높은 청년 실업률은 청년들이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 해서고, 이주민들은 험하고 힘든 일도 서로 하려고 나선다며 극심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정당화한다. 여성들의 육아와 무상 돌봄노동이 당연시되니 돌봄 노동은 계속 저평가되고, 경력단절로 인한 저임금과 차별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된다. 도입 초기 비정규직 차별은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는데, 외주화와 일자리 경쟁 20여 년을 경과하면서 이제는 경쟁에서 패배한 결과로 정당화된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대한 반발은 정부정책이 만들어온 결과인 것이다.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지 않도록 노동세계의 제도와 규범들을 만들어가도 모자를 판에 차이가 ‘합리적 차별’처럼 되도록 적극 활용한 것이다.

 

공공 부문(국회의원, 공무원, 공기업)을 중심으로만 제한적으로 작동하는 ‘할당제’도 마찬가지 한계를 갖는다. 사실 한국의 할당제는 노동세계의 평등보다는 공적 시민성의 민주적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는 게 적절하다. 그럼에도 공공부문이 최고의 일자리가 된 현실은 ‘할당제’를 ‘공정경쟁’의 최대 장애물로 만들었다. 이준석이 파고든 지점도 이 부분이다.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서 모든 할당제를 폐지하겠다며 할당제는 여의도에 익숙한 권력집단의 카르텔이라는 비판을 던진다. 비슷한 구도가 공공부문 일자리로 확장된다. 공공부문을 정점으로 한 노동세계 피라미드가 확고하고 좋은 일자리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인서울 대학졸업장이 중요 스펙이 되고 여성노동에 대한 저평가와 비장애인 중심의 능력주의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을 때 할당제는 권력이 부당하게 개입한 특권의 산물이 된다. 일반적인 청년, 여성, 장애인이 겪는 노동 현실과도 동떨어지게 된다. 할당제는 노동세계의 차별을 해소하고 평등을 실현해가는 과정에서의 잠정적 조치다. 할당제는 이러한 맥락과 운동의 과정 속에서만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각자도생이냐, 노동세계 재구성을 통한 새로운 민주주의냐

 

이준석의 정치는 간단하다. 정치는 더 이상 시장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니, 정치 자체를 공정한 경쟁을 통한 ‘정치 시장’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시장을 만든 게 정치다. 97년 이후, 엄청난 속도와 강도로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치는 현재의 노동세계를 완성했고 이제는 금융화를 통해 자산시장과의 강력한 연결고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노동복지’와 ‘할당제’는 강력한 노동위계구조와 무한경쟁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노동세계 문제의 원인과 책임을 정부나 자본이 아닌, 특정 인구 집단에 전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니 노동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수십, 수백 가지 정책이 등장하지만 우리가 겪는 현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공정한 경쟁’을 바라는 마음은 어차피 이런 노동세계는 바뀌지 않을테니, 세상이 강요하는 경쟁이라도 공정하라는 요구일 터다. 이준석이 화답한다. 어차피 각자도생인 삶, 공정하게 하자고 한다. 그는 정치인이지만, 함께 만들어갈 공동의 시민성 따위는 안중에 없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국민들을 갈라 치고 파이 싸움을 하게 만든다고 비판하지만 자신도 마찬가지다. 시민은 사라졌다. 오로지 ‘개인’들의 공정한 경쟁을 표방한 각자도생만 있을 뿐이다.

 

노동세계를 둘러싼 낡은 정치가 실패한 지점에 우리는 서 있다. 이준석도 마찬가지다. 그는 제안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 정치가 개입하지 않으면 노동시장은 공정한 경쟁의 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번지수가 틀렸다. 사람들을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불공정이 아닌 경쟁이다. 이 악무한의 무한경쟁체제 속에서 정말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이제 자본이 지배하는 노동세계 자체를 재구성하는 정치에 나서야 한다. 더 이상 성장도, 일자리도 약속할 수 없는 자본주의를 넘어, 서로 기대어 먹여 살리는 활동으로서 ‘노동’을 통해 서로 연결되고 ‘시민’으로 서는 상호 관계적 활동의 장으로 노동세계를 새롭게 만들어갈 정치를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