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대선 ‘이후’를 주목하게 하는 건 단연 개혁신당 이준석이다. 이준석의 정치적 역량과 행보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41.15%로 선전한 국민의힘 김문수 지지율이 보여주듯 이준석의 8.34%대 득표율은 ‘반계엄’ 보수를 흡수할만한 토대가 아직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숫자다. 하지만 2030 남성의 지지(20대 37.2%, 30대 25.8%)는 이재명-더불어민주당을 대안으로 삼지 않는 집단을 중심으로 확장될 가능성 또한 품고 있다. 이준석은 개혁신당이 총선과 대선을 완벽하게 완주한 정당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내년 지방선거를 목표로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이어갈 것을 예고했다. 한 가지 분명히 확인한 것은 이준석이 이번 대선에서 자신의 극우적 세계관을 보다 뚜렷하게 드러냈다는 점이다. 사회에서 ‘잊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자의적으로 구획하고, 사회공통의 정의 감각과 상식을 ‘잊혀진 자’의 위치에서 만들겠다는 정치적 실천과 선동이 보다 노골적으로 등장했다. 이준석의 ‘초라한 성적표’에 안위할 수 없는 이유다.
‘잊혀진 자’를 호명하는 이준석의 정치
“우리나라에서 잊혀진 사람들(The forgotten men and women)이 잊혀지는 일은 더는 없을 것이다.”
트럼프의 지지기반을 상징하는 건 쇠락한 중부 공업지대(러스트벨트)와 남부 시골(레드넥)로 대표되는 백인 노동자다. 2017년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트럼프가 호명한 ‘잊혀진 사람들’은 정확하게 이들을 지칭한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 뉴딜((New Deal) 정책을 추진하며 ‘경제 피라미드 구조에서 밑바닥에 위치한 잊혀진 사람(The forgotten man)’을 이야기했던 건 루즈벨트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루즈벨트가 노동자 및 사회적 약자의 권리에 무게를 두었다면, 트럼프의 차용은 정확히 그 반대의 효과를 노린다. 현대의 잊혀진 사람들, 대변되어야 하는 이들은 흑인․이주민․여성․성소수자가 아니라 성실하게 일했지만 소외된 백인 노동자다. 트럼프의 세계관에서 상식이란 후자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소수자 혹은 소수자를 위시하는 정책으로 인해 무너져왔다는 위기 감각이다. 그에 따라 소수자의 평등권을 배격하는 것도, 소수자들을 향한 차별․혐오도 쉽게 정당화된다. 이를 ‘거침없이’ 제기하는 극우 정치는 반민주적인 국가 권력으로 여겨지기보다 정치적 올바름(PC)이라는 “빨간 선”1을 넘어서는 저항으로 의미화 된다. ‘모든 시민들의 권리를 평등하게 보장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 원리가 부식되고 극우가 대중화되는 과정은 현재 전 세계가 겪고 있는 현실이다.
“내일을 준비하는 대한민국이 당신을 빼놓지 않도록”은 2021년 국민의힘 당대표에 출마할 당시 이준석이 내걸었던 구호다. 이 구호가 개혁식당으로 대선에 출마한 2025년에도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준석이 호명하는 ‘잊혀진 당신’이 ‘2030세대 남성’이라는 건 쉽게 떠올릴 수 있다. 2019년 출간한 『공정과 경쟁』에서는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가 남겨 놓은 대책 없는 부채들”로 젠더 불평등을 지목했고, 이에 대한 책임이 없는 젊은 세대들이 ‘부채’를 상속하지 않도록 더 강하게 투쟁하겠다는 다짐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젠더․세대 분할을 통해 이준석은 ‘2030세대 남성’의 인식에 언어를 안겨줬고, 2021년 국민의힘 최연소 당대표가 됐다. 2025년에도 이준석은 ‘이의 있습니다’를 외친 노무현을 전유하며 ‘배제된 청년’으로 자신을 위치시키고, 기득권의 위선을 전면에 내세워 “세대교체, 이제는 우리!”를 선언한다.
물론 이것은 새로운 전략이 아니다. 『K를 생각한다』의 저자 임명묵이 과거 이준석과 그 지지층의 위기를 평가한 바대로 그들은 여전히 ‘기존 세계관의 부정' 외에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준석에 대한 기대, “‘산업화나 민주화’가 아니라 지금의 시대에 맞는 지금의 서사와 대안을 갖고 오라는 강력한 요청”2에 이준석이 화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번 대선은 민주주의의 위기와 극우의 준동이라는 시대적 조건을 포착하고 이에 걸맞은 정치를 내세운 것에 가깝다. 이준석은 현재를 전통적인 진보 vs 보수 구도에서 해석될 수 없고, 왼쪽 vs 오른쪽 이념 경쟁도 무의미한 시대라고 선언한다. 극렬 지지층 외에는 확장가능성이 낮다고 평가받았던 이준석에게도 ‘세계관 상실의 시대’는 생명연장의 조건이 된다. 민주주의 규범에 의해 억압받았다는 이들을 무대에 세우고, 민주주의 규범을 만들어온 집합적 실천을 낙후된 것으로 치부하고, 구조적 대응을 개인주의(엘리트 되기)로 대체하는 정치가 더 힘을 얻는 조건이 됐다. ‘백래시(backlash)에 올라타기'(신경아)는 이준석뿐만 아니라 이준석 식 시대 진단에 조응하는 누구에게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와 우리 아닌 타자를 정의하는 힘
이준석을 트럼프, 극우, 포퓰리스트로 ‘딱지’ 붙이는 것이 부정확하거나 과도하다는 평가 또한 반복되어 왔다. 대체로 해외에서 극우를 규정해온 요소들은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불신과 공격, 이민자나 비백인계 민족에 대한 극단적인 배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혐오 선동이다. 이준석도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고 애국 마케팅을 즐기는” 집단이 극우라며, 자신을 극우로 지목하는 평가에 반발해왔다. 물론 ‘새로운 보수’를 자임할 수 있었던 배경이 있다. 이준석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부정주의와 선을 그었으며, 박근혜 탄핵이 정당했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등 기존 보수와과 다른 인식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계엄 세력과는 손잡을 수 없다’며 윤석열 비상계엄과 이를 옹호하는 국민의힘을 대하는 태도는 민주주의와 법치를 존중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전후 반공 집단이나 극우 개신교 세력, 일부 정치인들의 부정선거 음모론에 대해서도 격렬하게 비판했고, 정교분리의 필요성 또한 반복 강조했다.
하지만 정치학자 카스 무데가 지적하듯이 대의민주주의와 정당 정치의 위기 속에서 극우의 정치적 주장들은 이미 주류 정당에 의해 추진되고 있으며, 극단적 사고체계를 가진 극우와 주류 정당의 보수주의를 구분하는 경계는 모호해졌다.3 오늘날의 극우는 자신들이 민주주의 체제에 위해를 가하는 세력이 아니라는 인식을 만드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삼으면서 변모해왔다. 특히 디지털 기술, 언론과 온라인 환경의 변화 속에서 젊은 대중에게 호소하는 정치적 수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전복하려는 극단적인 형태보다, ‘진짜 대중’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회적 타자를 지목하고 이들이 아닌 ‘진짜 대중’이 민주주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극우의 핵심으로 꼽히는 민족주의․배외주의는 그 대상과 형식을 넘나든다. ‘동성애 척결’과 같이 국가․공동체의 순수성을 해치는 집단을 제거해야 한다는 절멸주의(exterminationism)4를 내거는 세력은 여전하다. 하지만 보다 익숙한 건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취업에 특혜를 준다면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역차별”이라는 언설이다. 이번 대선에서 김문수가 ‘차별 대우’의 대상, ‘평등주의’ 조치가 필요한 집단을 점유하는 역차별 담론을 제기한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민족주의 선동이 없으면 극우라고 할 수 없는 게 아니다. 극우의 핵심은 ‘우리 vs 타국민’이라는 분할을 넘어서 ‘우리 vs 우리 아닌 타자’로 피아(彼我) 구도를 정의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전제에 도전한다. 전통적인 반공․반북뿐만 아니라 반페미니즘․반동성애․반이주민․반중․반노조 정서가 국면에 따라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확장되는 배경이다.
이번 대선에서 이준석은 2030세대를 향한 전략뿐만 아니라, 반중-반이주민-반기후 담론을 적극 활용하며 극우 정치인의 면모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기후위기의 대안인 신재생에너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공약도 없이 기후정의 정책들에 대해서는 ‘환경 PC주의’, ‘환경카르텔’이라는 전형적인 ‘그린래시(greenlash)’를 이어갔다. 온라인에서 심심치 않게 반중 정서를 선동했던 행보의 연장선에서 풍력발전이 ‘중국을 위한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도 굽히지 않았다. 해외 진출 기업의 생산시설을 다시 국내로 복귀시키는 ‘리쇼어링(reshoring)’ 공약은 제조업 강화와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그럴듯한 전망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실상 그 내용은 인종주의에 기반해 이주노동자의 최저임금을 박탈하는 것에 불과하다. 세대 간 형평성 확보를 명목으로 한 신-구 국민연금 분리, 지방자치 실질화를 명목으로 한 지역별 최저임금 차등, 건강보험 적자 완화를 명목으로 한 본인부담차등제 및 외국인 가입자 부양자 인정기준 상향은 모두 일관된 방향을 가리킨다. 바로 사회적 연대를 기초로 한 사회공공체계에 대한 불신과 조롱이다. 하지만 이준석은 이것이 세대․지역․집단 갈라치기가 아니라 ‘상식’에 기초한 자율화 내지 불공정 바로잡기라고 주장한다. 극우의 ‘복지 쇼비니즘’이 이민자를 공적 복지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자의적으로 ‘자격 없는 자국민’을 설정하고 배제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5는 이미 현실이다. 젠더 불평등이 기성 세대의 ‘부채’일뿐인 그의 세계관에서 시민은 “낸 만큼은 반드시 받는” 납세자 혹은 소비자로서만 민주주의 주체가 된다.
이준석의 안티페미니즘, 극우 대중화의 토대
윤석열과 이재명이 격돌했던 20대 대선은 한국 정치에서 ‘젠더’가 핵심 전장으로 등장한 최초의 선거였지만, 이번 21대 대선에서 성차별은 ‘젠더 갈등’으로조차 등장하지 못했다. 강고한 정권교체 구도 속에서 보수 양당의 전략은 각자의 진영을 결집시키면서도 최대한 많은 중도층과 무당층을 포섭하는 안정화였다. 페미니즘을 모든 정책의 기본 가치로 제시한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를 제외하고, 이러한 안정화 전략에서 의도적으로 비껴 선 후보가 바로 이준석이었다는 사실 또한 많은 걸 시사한다. 윤석열 파면에도 불구하고 이준석은 정부부처 효율화를 내세워 ‘여성가족부 폐지’를 1호 공약으로 걸었고, 급기야 3차 대선 후보 토론회의 전략으로 성폭력 도구화를 적극적으로 ‘선택’했다. 이번 대선에서 투표를 가른 핵심 요소가 젠더 혹은 페미니즘이 아니었다고 해서, 이준석 극우 정치의 토대가 안티페미니즘이라는 해악이 상쇄된 건 아니다. 시사인이 정확하게 짚었듯이 이번 대선에서 이준석이 보여준 행보는 그의 강력한 준거 집단이자 그를 지지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현실 인식을 반영한다. 바로 신재생에너지, 페미니즘, 소수자 권리 등을 주장하는 정치는 모두 “정치적 올바름주의(PC주의)의 일종”이라는 것이다.6
최근 ‘전통적 남성성’에 20대 남성의 인식이 변화하고 있으며, 성평등 인식 또한 다른 세대 남성에 비해 높거나 비슷하고 동세대 여성들과 견주어도 큰 차이가 없다는 여러 연구결과들이 발표되었다.7 많은 언론에서도 이를 주목하며 보도한 바 있다. 하지만 해당 보도들이 주목한 건 현실 진단의 일면일 뿐이다. 남성성․성평등 인식 외에 성차별주의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적대적 성차별주의’는 모든 연령대에서 보편화되어 있고, 특히 연령대가 낮을수록 안티페미니즘 인식이 높게 나타난다는 결과 또한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 성평등 인식이 낮지 않고 성평등 정책에 우호적임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에 반대하거나 ‘관심이 없다’는 비율이 높게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연구결과들이 함께 진단하는 건 바로 성평등 의식이 ‘상대적으로’ 높은 젊은 세대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고서도 성차별에 반대하거나 성평등 정책에 동의할 수 있다는 점이 보여주는 현실은 무엇인가? 바로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가치이자 규범이라고 합의해왔던 평등, 자유, 인권, 반차별, 다양성, 사회정의, 공정성 등과 페미니즘이 주창하는 ‘그것’은 다르다 혹은 옳지 않다는 인식이다. 여성학자 김수아는 젊은 세대 남성들에게서 나타나는 변화는 성차별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혐오와 관련된 반응이거나 개인주의 성향의 발로일 수 있다는 점을 이미 짚은 바 있다. 남성 내부의 모순을 그저 비일관성으로 결론내리기보다는 민주주의 근본 개념들인 '평등'과 '차별'의 왜곡이 왜 일어나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8
이준석이 안티페미니즘을 자기 정치의 핵심 토대이자 전략으로 삼는 문제는 단순히 여성과 남성 집단을 갈라치기 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후기자본주의 경장사회에서 이준석은 차별과 평등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어 있는 조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지금의 안티페미니즘 또한 여성과 성평등에 대한 단순한 거부감이 아니다. 바로 성차별에 저항하면서 불평등한 젠더 질서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집합적․사회적인 ‘실천’이자 ‘운동’으로서 페미니즘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로서 등장한다. 이준석 혹은 그 지지 세력의 안티페미니즘은 그저 선동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진전을 저지하려는 반동적인 실천이자 운동이다. 극우의 대중화가 한국사회 앞에 놓인 민주주의 위기라면, 이준석의 안티페미니즘이 바로 민주주의의 전제를 무력화시키고 위기를 넘어서려는 운동 자체를 기각시키는데 동원되어 왔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하지만 윤석열의 비상계엄을 비호하는 ‘신남성연대’나 극우를 자임하는 ‘자유대학’, 아스팔트 극우와 달리 이준석은 합리적인 보수우파의 위치를 점해왔다. 이는 온전히 이준석의 전략적 거점이 아스팔트가 아니라 주류 제도정당이기 때문에 발생한 효과인가? 여성학자 권김현영이 지적한 바대로 극우를 누구로, 무엇으로 규정하는지에도 “위계”가 있다.9 한국사회에서 여성혐오는 민주주의에서 용인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기보다 상수이거나 합리적인 의견이거나 ‘그럴 수도’ 있는 허용선 안에 머물러왔고, 안티페미니즘 “하나의 사상에 대한 반대”로 여겨질 뿐이다. 이러한 사회적 허용선에 대한 비판적 봉기로서 2010년대 중반 ‘페미니즘 리부트’로부터도 벌써 10년이 흘렀고,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세운 윤석열도 파면됐다. 그럼에도 다시 여성가족부 폐지에 이어 이준석이 들고 나온 것이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언어성폭력이다. ‘이준석 현상’은 단순히 혐오정치인 한 명의 성공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위기를 보여주는 현실의 표지이며, 이준석의 정치를 용인하는 상태로 ‘극우의 대중화’를 막기란 불가능하다.
이준석의 퇴출, 이준석 정치에 대한 기각
“강력한 결단과 혁명적인 제도변화가 필요했던 시대와 달리” 현재의 페미니즘은 시효가 만료했다는 현실인식, 이를 기반으로 한 반동적 세계관이 이준석만의 것은 아니다. 사회 변화보다 자기 정진이 현실적 대안이라고, 구조적 차별과 불평등을 변화시키려는 열망은 무능력자들의 변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행동하는 시대다. 여성혐오가 사회구성원 ‘일부’를 모욕하고 혐오하고 공격할지언정, 그것이 사회 전체 혹은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지는 않는다고 믿는 사회다. 게다가 페미니즘의 ‘페’자도 입에 올리지 않고서 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민주당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세상이다. 집권 세력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스스로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를 파괴해왔다는 사실은, 이준석이 대안적 세계관을 제시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반사이익을 얻으며 생존할 수 있을 것이란 암울한 전망을 가능케 한다.
대선 이후 희망이라면 최소한 이준석의 전략적 선택을 ‘상식’으로 용납할 수는 없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3차 대선 후보 토론회 이후 ‘이준석 의원의 의원직 제명에 관한 청원’은 60만을 향해 가고 있다. 이준석이 자폭했다고 하기도 어려운 대선 결과 앞에서 폭력․차별․혐오를 정치적 정당성의 수단으로, 안티페미니즘을 대중 동원의 전략으로 삼는 정치인에 대한 심판은 중요한 분기점이다. ‘페미들 후드려 패는 것에 대한 원초적 감사함’으로 이준석에 동조․환호하는 극우 안티페미니즘 세력은 저절로 사라지거나 약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준석의 후예를 자처하는 청년 정치인의 등장을 바람만으로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준석에게 면죄부를 남발하며 셀프-사면하는 기성 정치도 마찬가지다. 이번에야말로 이준석은 정치에서 퇴출되고, 이준석 식의 정치는 기각되어야 한다. 이준석이 말하는 “실력 혹은 능력이 있는 소수”가 아니라 페미니즘과 같이 ‘우리’와 ‘연대’의 범주를 계속 확장시키는 민주주의 정치가 이 사회를 진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고통을 개인화하지 않고 함께 싸울 때 세상이 나아질 수 있다는 걸 반복해서 보여준 온 이들과 함께 할 때, 페미니즘이 민주주의 핵심 가치로 자리매김 될 때, 우리는 민주주의 위기를 벗어나는 길목에 서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1 이졸데 카림 저, 이승희 역, 『나와 타자들』, 민음사, 2019.
2 임명묵, 「이준석이 실패한 이유… 그가 외면한 진실」, 〈소셜 코리아〉, 2022. 10. 6.
3 카스 무데 저, 권은하 역,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위즈덤하우스, 2021.
4 정용택, 「한국 극우 개신교의 절멸주의적 혐오 정치에 대한 기독교사회윤리적 비판」, 『신학과 사회』 39(2), 2025.
5 윤홍식, 「극우는 어떻게 복지국가를 위협하는가? 타자화하는 복지정치」, 〈월간복지동향〉, 2025. 4.
6 「이준석이라는 갈라파고스」, 시사인, 2025. 6. 5.
7 마경희 외, 『성불평등과 남성의 삶의 질에 관한 연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보고서, 2018; 최종숙, 「‘20대 남성 현상’ 다시 보기 : 20대와 3040세대의 이념성향과 젠더의식 비교를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 제125호, 2020; 추지현, 「청년 남성들의 젠더 인식 다층성」, 『한국여성학』 제37권 4호, 2021.
8 김수아, 〈2019 변화하는 남성성을 분석한다 - 성평등 정책의 확장을 위해〉 토론문,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9. 4. 18.
9 권김현영, 「내란과 극우 앞에선 사회운동의 고민들」, 참여연대 좌담회, 2025. 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