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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청년, ‘세대’가 아니라 삶의 조건을 살피자

지난 4월 7일 서울과 부산 시장을 뽑는 재보선 선거가 있었다. 두 지역 모두 국민의힘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과보다도 더 주목받은 것은 2030이라 불리는 청년세대의 투표 결과, 그 중에서도 특히 20대의 표심이었다. 방송3사 출구조사에 따르면 20대 남성은 60대 못지않게 국민의 힘을 지지했다. 20대 여성도 큰 폭으로 민주당 지지가 줄었지만, 차이가 있다면 그 표가 국민의힘이 아닌 기타정당을 향했다는 점이다. 성별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 표심은 보수와 진보, 반(反)페미니즘과 페미니즘이라는 키워드로 이어졌다.

어떻게 해석하고 무엇을 물어야 하나

선거를 열흘 남짓 남겨둔 시점 서울시장 후보였던 박영선은 20대 지지율이 떨어지는 이유를 “역사 경험치가 낮아서”라고 말해 청년에 대한 비하라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재보선 결과가 나온 뒤 M-Z세대(1980년대생부터 2000년대생까지)는 진보도 보수도 없다는 분석, 이념을 따지지 않는 ‘개인’이 탄생했다는 비평이 이어졌다. 두 평가는 사뭇 다른 표현처럼 보이지만 결국 청년세대의 정치의식을 대상화하며 기존의 관점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평가다. 청년세대의 정치 성향을 정치와 사회의 조건이 아니라 세대의 특성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가 사회적 문제를 드러내고 조정하는 과정이라면, 지금 청년세대를 통해 어떤 문제가 드러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청년세대의 정치성향이 짧은 시간동안 크게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은 청년세대 보수화의 증거가 아니라, 기존 거대 양당의 정치 이념이 청년의 현실을 보편적인 정치 의제로 해석하는데 실패하고 있음을 반증할 뿐이다.

이 실패는 결국 청년세대를 불완전하거나 유별난 존재로 남겨둔 채 표면적인 결과만으로 정권심판론이나 민주당에 대한 반성 촉구라는 해법을 향해간다. 이미 2019년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에서 이미 ‘20대 남성지지율 하락요인 분석 및 대응방안’을 제출해 “할당제 등으로 역차별을 당하는 남성들의 입장을 헤아려 신중하고도 절제된 표현을 사용하도록 지침 설정이 필요하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청년 여성이 결집하면 말로만 페미니즘을 표방하다가, 청년 남성의 지지율이 하락하면 표현을 절제하겠다는 답을 내놓는 식이다. 원인은 그대로 둔 채 잘못된 대책만 반복하는 것이다. 지금 살펴야 하는 것은 청년‘세대’가 지닌 특성이 아니라 청년의 삶이 놓여있는 사회의 조건이다.

청년세대 정치의 출발점

86세대로 불리는 1960년대생이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갈 때 도시 근로자의 월평균 소득은 두 배로 증가했다. 1970년대생이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갈 때 소득 증가율은 1.5배에 그쳤다. 현재 2030세대의 노동시장은 평균소득의 증가율로 설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청년세대 중 소수는 안정된 노동시장으로 진입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노동시장에 제대로 진입조차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1년 3월 통계에 따르면 청년 실업률은 10%를 넘고, 잠재 구직자와 초단시간 취업노동자를 포함한 청년체감실업률은 26%에 육박한다. 그나마 정부의 단기 일자리 정책으로 틀어막고 있지만, 실상 청년의 1/4이 실업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여기에 청년 노동자 중 비정규직 비율이 40%를 넘어섰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청년세대는 노동시장으로의 진입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서 진입을 하더라도 불안정 일자리로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정부는 업종별, 분야별 노동자 지원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고용관계부터 분명치 않은 청년 노동자에게 명확한 고용 관계나 전년도 소득을 증명해야하는 조건 앞에서 지원 대책은 미끄러지기 마련이다. 청년 노동자에게 노동시장은 노동자가 뭉쳐서 확장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같은 조건의 경쟁자와 파이를 두고 승리해야 할 링이 된지 오래다.

당연하게도 이 링 위에서 청년세대에게 승자의 자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취업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싸움의 룰은 기업이 정한다. 결국 청년 노동자들이 이 싸움의 링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하는 방식은 투자다. 2019년 말 3000만 개가 채 되지 않던 주식계좌가 1년 남짓 만에 4천만 개를 넘겼다. 이 중 절반가량이 20대와 30대가 개설한 계좌다. 동시에 직장인 대상 비대면 신용대출의 비중 역시 2030의 비중이 절반을 차지하며 소위 ‘영끌’이라고 말하는 청년층 투자 열풍 분위기를 짐작케한다. 빚을 내서라도 투자시장에 뛰어들어 노동 시장에서 반복되는 패배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론 투자 시장의 위기를 버텨낼 수 있는 자산도, 투자의 경험도 없는 20대의 투자 수익률은 마이너스다.

청년세대가 놓인 사회적 조건이자 정치의 출발점은 여기서 만들어진다. 안정된 직장에서 소득을 올리는 것도, 투자를 통해 불안정을 탈출하는 일도 실패하기 십상인 삶의 조건에서 정치라는 이름으로 룰을 움직이는 행위는 불공정한 개입에 불과하다. 청년세대를 위한다며 시혜적인 ‘청년’ 정책을 내놓아봤자 일부에게 특권이 부여되는 ‘불공정’일 뿐인 것이다. 청년이 공정성에 더욱 민감하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불안정한 노동 시장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규칙이 공정성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뿐이다. 

성별 차이가 작동하는 방식

같은 사회경제적 조건임에도 성별에 따른 정치적 진폭의 방향성이 달라진 데는 청년 여성이 지닌 정치적 주체화의 경험의 차이가 있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거치며 터져나온 생존에 대한 요구부터, 이번 재보궐 선거의 배경이기도 했던 일터에서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의 흐름, 고용, 임금, 승진을 포함하여 노동의 전 과정에서 차별이 아니라 평등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모아내기까지, 일련의 정치적 경험은 청년세대 여성에게 페미니즘이 단순한 학문이나 사상을 넘어 정치적 구호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오프라인에서 시위에 나서고, 온라인에서 화력을 집중한다. 그렇게 정부의 답변을 끌어내고, 제도를 바꿔냈으며, 성차별 기업에 사과를 받아냈다. 일상의 안전도, 경제적 안정도 해소하지 못하는 사회를 바꿔나가는 정치적 개입의 언어로 만들어가는 경험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이 힘이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선 정당을 등장시켰고 이번 재보선에서 20대 여성은 그 소수 정당에 대한 15% 이상 지지를 보냈다. 청년 여성이 페미니즘이란 구호 아래 정치 세력으로 모이는 과정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문제는 20대 남성의 반페미니즘 정서가 만들어진 이유다. 보수언론이나 강성 민주당 지지자들의 말처럼 정부와 민주당이 지나치게 페미니즘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20대 남성이 반페미니즘정서를 지니게 되었을까? 앞선 언급처럼 페미니즘의 요구는 여성의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라는 요구였음에도 집권여당인 민주당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우대’하는 방식으로 응답했다. 정확히는 응답하는 ‘척’만 했다. 여성들이 성차별적 구조를 지적하며 성평등한 세상을 요구할 때 민주당은 정책의 일부 수혜를 여성에게 '할당'하는 방식으로 성평등을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며 문제를 왜곡시켜온 것이다. 승자 없는 파이 싸움은 그만하고 새 판을 짜야한다는 요구 앞에서 파이 부스러기 한 조각 떼어주며 달래는 대책으로 페미니즘의 요구를 수용한다고 표방한 꼴이다. 청년 여성들이 페미니즘이라는 요구로 직접 행동에 나서며 정치적 경험을 쌓는 동안, 정부와 민주당의 왜곡된 정책으로 인해 파이 부스러기 한 조각이 아까운 사회경제적 조건에 놓인 2030 남성에게는 반페미니즘 정서에 불이 당겨진 것이다. 정작 청년세대 젠더 갈등의 국면을 펼쳐놓은 ‘민주당표 페미니즘’은 제대로 실현조차 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갈등의 판을 만든 당사자들은 문제의 원인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페미니즘 정책을 탓하거나, 청년세대의 유별난 '젠더 갈등'으로 취급하고 있다. 여기에 청년의 삶의 조건을 달라지게 할 비전이 없기는 민주당과 매한가지인 국민의힘에선 이 대립 구도를 몰아간다. 2030 남성의 표를 얻기 위한 표 장사를 벌린 것이다. 그 결과가 이번 재보선에서의 20대 남성의 지지였다. 청년 남성의 반페미니즘 정서는 ‘민주당표 페미니즘’이 너무 지나친 페미니즘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왜곡된 페미니즘이자 실패한 정치였기 때문에 생겨나고 확장되어 왔다.

무능한 정치를 바꿔낼 운동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하고, 90년대 생이 온다며 호들갑을 떨던 정치세력이 정작 청년세대의 삶을 읽어내는 데조차 실패하고 있다. 불안정한 노동구조는 건드리지 않은 채 내놓은 청년 정책의 실패, 성차별적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 없이 일부 몫을 할당하려는 시늉으로 구성된 ‘민주당표 페미니즘’ 정책의 실패가 현재 20대의 극명하게 갈린 투표결과를 만들었다. 기존의 통념을 깨는 투표 결과에서 우리는 청년세대의 특성이 아니라, 현재 청년세대에게 한국 사회의 불안정한 노동 구조를 견디고 맞설 사회적 자원이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 청년세대에 필요한 것은 공정함이라는 유일한 규칙에 목매지 않을 수 있도록, 규칙을 스스로 바꿔나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일부에게 시혜적인 혜택을 주는 정책이 아니라 청년/여성이 정치적 주체가 되어 불안정한 노동 세계와 성차별적 구조를 바꿔내는 경험으로 말이다. 지금까지 정치가 제대로 답해오지 못했다면, 정치가 제대로 응답하게 만들 운동이 시작되어야 한다. 노동 세계를 바꾸고 차별을 철폐하는 운동이 곧, 현 상황을 ‘세대 갈등’이나 ‘젠더 갈등’으로만 해석하는 무능한 정치를 바꾸는 운동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