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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뉴질랜드 외교관 성희롱 사건’에 책임지는 국가의 모습은?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해결 과정이 필요하다

‘국격’이라는 철 지난 단어가 난데없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서 한 발언 때문이다. 2017년 말 뉴질랜드 주재 한국 대사관 소속 외교관이 현지 남성 직원을 상대로 수차례 성추행을 저지르고, 뉴질랜드 경찰 조사 과정에서 외교관 면책 특권을 내세워 조사조차 받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2018년 2월 해당 외교관은 임기 종료로 뉴질랜드를 떠난 뒤 필리핀 총영사로 재직한 바 있다. 외교관에 대한 처벌이라고는 2018년 외교부 감사에서 내려진 감봉 1개월의 경징계가 전부였다.

이후 2020년 7월 28일, 문재인 대통령과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의 전화통화에서 아던 총리가 사건을 언급했고, 파장이 커지자 국회 외통위에서도 사건에 대한 질의가 등장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상민 의원이 성희롱 피해자에게 사과해야 하지 않냐고 질문하자 강경화 장관은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지겠지만 다른 나라에 대해 사과하는 것은 국격의 문제이다”라며 사과를 거부했다. ‘나라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서 사과할 수 없다는 강경화 장관의 말은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한국 외교부는 무엇에 사과했어야 했나

몇 년이나 지난 사건이 문재인 대통령과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의 전화 통화를 계기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사건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건 문재인 대통령과 한국 국민에게 사과하면서도 정작 뉴질랜드와 피해자에게는 국격을 언급하며 사과할 수 없다는 강경화 장관의 발언 때문이었다.

외교부는 억울함을 말한다. 국가 정상 간의 회담은 사전에 어떤 주제의 이야기를 어떻게 나눌지, 회담의 모든 과정을 사전에 양국 외교부끼리 논의하지만, 이번 통화에서 한국 외교관의 성추행 사건은 의제로 등장할 예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던 총리에 의해 언급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윤건영 의원을 비롯한 이들이 뉴질랜드에 대해서 ‘외교적 결례’, ‘과도한 요구’와 같은 불만을 제기하는 배경이다. 해당 사건은 결국 외교관 개인이 저지른 일이라는 점에서 사건 자체에 대해서 국가가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외교관은 재외공관의 책임자이자 한국을 대표해서 파견되었다는 점에서 외교관이 저지른 성추행 사건을 그저 개인의 일탈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게다가 사건 발생 이후 2년 반이 넘도록 외교부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아왔고, 그만큼 피해자의 고통은 가중되어왔다. 뉴질랜드에서는 해당 외교관의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대질 심문과 사건이 있던 대사관의 CCTV 영상 제공을 요청해왔으나 한국 외교부는 면책 특권과 국가 주권을 말하며 거부해온 바 있다. 뉴질랜드 외교관 성희롱 사건이 국가 정상 간의 전화통화에서까지 의제로 등장한 것은 지금까지 사건 해결의 책임을 방기한 외교부가 만들어낸 결과에 가깝다. 외교부는 국격과 국가 주권을 이유로 사과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대신, 몇 년이 지나도록 사건 해결을 위한 의지를 보이지 않은 점에 대해서 사과했어야 했다.

 

성희롱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

성추행 혐의를 받는 외교관은 "나는 동성애자도 성도착증 환자도 아니다, 내가 어떻게 나보다 힘이 센 백인 남자를 성추행할 수 있겠느냐"고 억울해하는 중이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국회 외교통상위원장은 “친한 사이에 남자끼리 배도 한 번씩 툭툭 치고, 엉덩이도 한 번 치고 그랬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마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성적인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면 성희롱이 아니라는 식이다.

그러나 성희롱은 성의 문제일 뿐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며, 성희롱에서 중요한 것은 가해자가 성적인 의도를 지녔는지 여부가 아니라 성과 신체를 매개로 발생하는 폭력의 발생 여부이다. 직장 내 성희롱의 가해자의 대부분은 피해자의 상사나 상관 등 상급자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성희롱이 발생하더라도 문제를 공론화하거나 법적인 절차를 밟는 것 자체가 어렵다. 높은 성희롱 상담 건수에 비해 턱없이 낮은 신고 건수가 이를 증명한다. 뚜렷한 상하관계로 구성된 군대, 직장과 같은 조직에서 성희롱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것을 보면 더욱 확실하다. 사건의 피해자가 "나보다 힘이 센 백인 남자"라는 외교관의 말, “덩치가 나만한 사람”이라는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의 말은 성희롱을 성의 문제이자 물리력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시각에서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의 키나 덩치를 이유로 성희롱의 발생 자체를 부정하는 언급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 권력을 성찰하지 않는 태도가, 권력에 의해 발생하는 성희롱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정부와 국회가 던지고 있는 메시지

박근혜 정권 초기 윤창중의 미국 순방길 성추행부터 칠레, 캄보디아, 일본 등 외국에서 고위 공직자의 성비위 사건이 문재인 정권에서도 끊이지 않아왔다. 대사관이라는 좁은 세계에서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는 외교 고위공직자들의 권력은 그들이 부여받은 직위를 넘어서는 지위로 작동한다. 이렇듯 권력 차이가 존재하는 외교 공관에서 성희롱이 발생했을 때, 책임부처인 외교부가 문제 해결을 위해서 더더욱 피해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해결 과정을 조력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외교 고위공직자 성비위에 대한 대책은 솜방망이 처벌이나 문책, 보직 변경에 그쳤다. 이러한 징계로 무소불위의 권력은 사라지지 않고, 따라서 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하고 변화를 만들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번에 밝혀진 뉴질랜드 외교관의 성추행 사건에는 문제적인 개인의 책임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수없이 발생했던 외교 고위공직자의 성추행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온 외교부와 한국 정부의 책임이 크다.

또한 사건에 대해서 사과하지 못하겠다고 선언한 외교부와 성희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드러낸 국회 외통위원장의 태도는 한국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을까. 국가 기관과 같은 공공기관과 사기업, 작은 사업장을 가리지 않고 직장 내 성희롱이 만연해 있다. 직위에 따른 명백한 상하관계로 구성된 권력의 차이 때문에, 안 그래도 직장 내 성희롱은 공론화와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 거기에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모친상에 조문한 수많은 정치인들,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치러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장례식과 같이 성희롱과 성폭력을 저지른 자들을 감싸고 도는 정부와 국회의 모습에서 직장 내 성희롱은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절망감만 늘어간다. 여기에 더해 이번 외교관 성희롱에 대해서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 한국 정부의 모습은 곧 젠더에 기반한 폭력을 해결할 의지가 없다는 메시지가 되고 있다.

 

책임지는 국가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외교관 성희롱에 대해서 책임질 일이 있다면 책임을 지겠다고 반복해서 말했지만, 국가 간의 문화 차이나 외교적 관례 운운하며 국격의 문제라는 입장만을 내세울 뿐 정작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다. 이미 2017년 외교부 차원에서 성희롱 대처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지만 그 내용도 일벌백계나 무관용 원칙 등 문제가 있는 개인을 처벌하겠다는 것일 뿐, 성희롱을 방지하고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제대로 해결해나가겠다는 의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현재 뉴질랜드에서 요구하고 있는 대질 심문과 CCTV 영상 제공을 거절하고 있는 외교부의 모습을 보면 대체 무엇을 책임지겠다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현재 피해자는 외교부에 당사자 간 중재를 요청하고 있다. 외교부가 정말로 자신들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다면 피해자의 요청에 대해서 “검토 중”이라는 말만 하지 말고 실질적인 해결과 피해자 조력을 위해 힘써야 한다. 반복되는 성희롱 사건에 정말로 책임지는 국가의 모습을 보이려면, 무엇보다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위로가 선행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강경화 장관이 말한 ‘책임’을 다하는 외교부의 태도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