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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형사절차에서의 성 소수자 보호 지침 나왔다

성소수자관련범죄사건지원여성연대, 수사기관에 지침제정 제안

범죄피해를 당하고도 아웃팅 위험으로 신고조차 할 수 없는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보호를 위한 지침이 제안됐다. '성소수자관련범죄사건지원여성연대'(아래 사건연대)가 18일 '형사 절차 과정에서의 성적 소수자 인권보호지침'(아래 지침)을 발표한 것.

성소수자관련범죄사건지원여성연대 홈페이지(www.support-u.org)

▲ 성소수자관련범죄사건지원여성연대 홈페이지(www.support-u.org)



사건연대는 "성적 소수자(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관련 범죄사건의 형사 절차 과정에서…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아니한 채 일반 형사사건처럼 처리되거나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반인권적 수사관행이 반복되고 있"다며 성적 소수자 관련 범죄 사건의 특수성으로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제3자에 의해 성 정체성이 공개되는 '아웃팅'(outing) 위험 △수사 담당자의 편견과 무지 등으로 인한 인권침해적 수사관행 △성적 소수자 혐오범죄 등을 들었다.


아웃팅 위험으로 범죄에 노출

사건연대는 지침에서 "아웃팅은 가족 학교 직장 및 친지로부터의 철저한 배척과 소외 등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서의 모든 관계와 존재 기반 자체를 잃게 만들 수 있다"며 "성적 소수자 관련 범죄는 이같은 상황을 이용해 피해자를 아웃팅시키겠다고 협박하여 저질러지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사건연대가 이날 공개한 상담사례에 따르면, 2003년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입한 한 레즈비언은 "가입정보를 본 한 여자가 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와서는 500만원을 내놓지 않으면 내가 레즈비언이라고 우리 가족들에게 불어 버리겠다고 협박했다"고 털어놨다. 지침은 성적 소수자에게 아웃팅시키겠다는 협박과 함께 이뤄지는 각종 범죄행위에 대해 "성적 소수자의 존재기반을 말살시키는 심각한 가해 행위"이므로 재발하지 않도록 엄중 처벌할 것을 주문했다.

이런 사건을 접하는 경찰이 피해자의 성 정체성을 존중하기는커녕 오히려 놀림거리로 삼고 모욕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지적도 나왔다. 위 사건의 피해자는 "너무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경찰서에 신고했지만 경찰관들은 나를 보고 '니가 레즈비언이라고?' 하면서 레즈비언들은 섹스를 어떻게 하냐는 둥 신기한 듯 날 쳐다보며 자꾸 농담을 던졌다"며 "수치스럽고 당황스러워 더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경찰이 오히려 2차 가해

또다른 상담사례에 따르면 97년 대학선배에게 스토킹과 강간을 당한 한 레즈비언은 경찰에 신고했으나 수사과정에서 피해자가 레즈비언임을 알게 된 담당 형사에 의해 "미친년", "정신병자", "니가 그러니까 강간을 당하지" 등의 폭언을 당해야 했다. 피해자는 "경찰서에서 제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는데…핸드폰을 추적하는 과정에서…알게 되었나 봐요"라며 "더 이상 경찰서에 가는 것조차 무서워졌어요"라고 털어놨다.

2004년 동거 중에 애인에게 폭행·감금당한 한 레즈비언은 집에서 몰래 빠져나와 경찰서로 달려가 신고했으나 진술을 받은 경찰관은 "그러니까, 당신 그 여자랑 사귀었다구요?"라고 기막혀하면서 비웃고 동료 경찰관들에게 이야기하며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었다. 피해자는 "집으로 돌아가는게 더 막막한 상황이었지만…정말 모욕적이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며 "그 경찰관들을 처벌할 순 없나요?"라고 물었다.

이번에 제안된 지침은 수사과정에서 △성 정체성과 관계된 구체적인 사생활에 대한 질문과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질문을 지양하고 △당사자가 성적 소수자 단체나 신뢰관계가 있는 자의 동석을 원하는 경우 보조자의 동석을 허용하고 이를 미리 고지하도록 했다. 한편 재판과정에서 피해자가 원할 경우 재판을 비공개로 진행시켜 줄 것을 법원에 요청하도록 했다.

또 지침은 각종 교육프로그램과 자료집 및 정기간행물 등을 통해 경찰·검찰의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이해를 돕고 성적 소수자 관련 인권교육을 실시하도록 했다. 또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해 경찰서마다 성적 소수자 관련 범죄 사건 전담 경찰관과 전담부서를 정해 수사의 효율화와 전문화를 도모하도록 했다.


성 소수자의 존재조차 없는 수사지침

형사절차에서 성적 소수자들이 처한 상황은 심각하지만 수사관들이 지켜야 할 사항은 전혀 규정되어 있지 않다. 2003년부터 시행된 법무부 '인권보호수사준칙'(아래 준칙)은 '검사는 수사의 전 과정을 통하여 사건 관계인의 사생활의 비밀을 보호하고…명예 또는 신용이 손상되지 않도록 노력한다'(제6조), '심신 장애인 또는 청소년을 조사하는 경우에는 특히 그 보호에 유의한다'(제8조)고 추상적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 성적 소수자의 경우는 언급조차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준칙은 '검사는 피의자를 체포하거나 구속하는 경우에는 지체없이 그 가족 등에게 죄명, 체포하거나 구속한 일시와 장소, 범죄사실의 요지 등을 서면으로 통지한다'(제12조)고 규정해 가족에게 성 정체성을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 성적 소수자의 특수성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

이번에 제안된 지침은 성적 소수자의 의사에 반해 성정체성이 공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피해 및 가해사실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가급적 전화 등으로 직접 연락하고 △당사자가 원하는 경우 출장조사를 적극 활용하며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지 않는 장소에서 조사하고 △기소 전후에 사건이 언론 등에 공표되는 경우에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성 정체성과 피의사실 등 사생활의 비밀이 최대한 보장되도록 했다.


성 소수자 혐오범죄 엄단

지침은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이유 없는 편견과 차별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그 성격이 반사회적이고 반인권적이므로" "행위 자체는 경범죄라 하더라도 인권침해적 성격을 고려해 가중된 처벌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지침은 △동거 중인 성적 소수자 사이의 폭력사건의 경우 응급조치 및 상담소·보호시설 활용 등 '가정폭력사건 수사지침'에 따르도록 하고 △성범죄 사건의 경우 이성간 성폭력 사건과 동일한 기준과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고 범죄형량 등 재판에서도 동일한 기준과 원칙이 적용될 수 있도록 기소하며 △수사과정에서 부모나 동거인이 당사자의 성 정체성을 인지할 경우 편견과 무지로 인한 구타와 감금 등이 우려되므로 이들에게 관련 단체나 전문가와의 상담을 적극 권장하도록 했다. 또 피해자가 부모나 동거인으로의 인계를 원하지 않을 경우 보호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 공지훤 사무국장은 "경찰청 청문감사관실과 법무부 인권과, 검찰청 등을 방문해 지침을 전달하고 매뉴얼로 만들어 관련기관과 사회단체에 배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찰청, "8월 제정할 인권수사준칙에 반영"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한채윤 부대표는 "그동안 경찰관이 편견을 가지고 모욕적인 언사를 하는 경우나 본인의 동의없이 가족에게 수사내용을 알리는 경우가 많았다"며 "경찰이 수사내용을 다른 경찰관에게 알리지 않는 것은 물론 당사자의 가족과 친구에게도 성정체성이 알려지지 않도록 보호할 의무를 부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관계자는 "성적 소수자, 장애인 등 소수자 관련 단체의 의견을 모아 8월에 제정할 인권수사준칙에 반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형법개정, 구금단계 처우도 과제

정정훈 변호사(아름다운재단 공익변호사그룹 공감)는 "지침은 강제력이 약하지만, 일단 만들어지면 경찰청 청문감사관이나 검찰 인권보호관을 통해 이를 지키라고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면서도 "수사지침 제·개정과 함께 동성간의 성폭력 사건을 성폭력으로 보지 않는 형법의 개정도 과제로 남았다"고 말했다.

형법 제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해 강간죄의 피해자를 여성으로 한정하고 있다. 또 성폭력 범죄에서 생식기관이 삽입되지 않았을 경우 강간이 아니라 형법 제298조의 강제추행으로 처벌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남성이 피해자인 경우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여성인 경우의 동성간 성폭력 사건은 강간죄로 처벌할 수 없어 강제추행죄를 적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강제추행의 처벌은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강간보다 그 수위가 훨씬 낮다.

한편 형사사법절차에서 구금당한 성적 소수자들이 겪는 문제도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행형법 제11조는 "수용자는 독거수용한다. 다만, 필요한 경우에는 혼거수용할 수 있다"고 규정해 법률로는 독거수용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대부분 혼거수용하고 있다. 혼거수용의 경우 수용자의 △형기 △죄질 △성격 △연령 등을 감안해 거실을 구별할 뿐 수용자의 성 정체성은 고려대상이 아니므로, 좁은 거실에서 성적 소수자가 겪는 고통은 더 크다는 지적이다. 정 변호사는 "특히 트랜스젠더의 경우 유치장은 물론 구금단계에서 서류상 성별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혼거수용되는데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5일 발족한 사건연대에는 레즈비언인권연구소, 부산여성성적소수자인권센터, 이화레즈비언인권운동모임 변태소녀 하늘을 날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가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