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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수치심’과 ‘저항 여부’에 가로막혀온 성폭력 피해 경험

성폭력과 피해를 판단해온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몇 년 전 집회에서 연행된 적이 있다. 유치장에 들어가기 전 신체검사를 받는데 경찰이 브래지어 탈의를 요구했다. 자살이나 자해 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당황했고, 불쾌했고, 모욕적이었고, 화가 났다. ‘여성’이라서 의도적으로 행사했을 부당한 공권력을 비판하고 싶었고 더는 이런 일이 없는 사회를 만들고 싶었다. 국가인권위 진정을 했고,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이들과 함께 국가배상청구소송을 진행했다. 그런데 진정과 소송을 위해서는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호소해야 했다. 그 때 난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감정인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겪은 인권침해를 공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성적 수치심을 통해서 이야기해야만 했다. 내가 느낀 감정과 성적 수치심이라는 표현 사이의 간극에서 헤매는 시간이 이어졌다.

 

성폭력 피해는 누구의 관점에서 규정되나

성폭력이 수사와 사법 등 공적 영역에서 다루어질 때 함께 등장하는 말이 성적 수치심이다. 성범죄 관련 법제도에서 성적 수치심은 성폭력을 규정하는 주요 개념으로 자리잡아왔다. 이는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의 서사에 가려지는 피해자의 경험을 드러내는 매개가 될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성폭력을 무죄로 만들고 피해를 인정하지 않는 근거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2018년 레깅스를 입은 여성을 불법 촬영한 사건에 대해서 1심에서 벌금형이 선고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형이 무겁다는 피고인의 항소로 열린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에 대한 촬영이 아니며, “기분이 더러웠다”는 진술을 볼 때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판단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해당 재판부는 판결문에 불법 촬영된 사진을 실어 비판받기도 했다. 피해자 몰래 일방적으로 불법 촬영을 한 사실이 인정되어도 ‘특정 부위’가 강조되지 않았고 ‘노출’된 부위가 적으니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며, 이로 인해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기에 무죄라는 재판부의 판결은 철저히 남성의 관점을 대변했다.

수사과정과 사법절차에서 성폭력 사건을 다룰 때 가해자의 성적 침해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꼈는지가 성폭력을 규정하고 유무죄를 가르는 준거가 되곤 한다. 피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조사하는 경찰과 검찰, 유무죄를 판단하는 판사의 입장에서 볼 때 ‘피해자가 정말 성적 수치심을 느낄 만하다고 승인할 수 있는지 여부’가 범죄와 피해 여부를 판가름 해왔다. 사법기관은 피해자의 나이·결혼 여부·직업 등의 조건을 따지며 성적 수치심을 호소할 만한지 판단하고 피해자의 ‘자격’을 묻는다. 강제추행으로 해임된 교사의 징계처분 취소소송에서 ‘피해자가 사회경험이 풍부한 60대 여성이기에 성적 수치심은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재판부의 판단은 성적 수치심이 누구의 관점으로 재단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수치심’에 갇히지 않는 피해 경험

왜 성적 수치심이 성폭력 피해자가 느끼는, 혹은 느껴야만 하는 감정으로 제시되어 왔을까. 형법에서 성폭력에 관한 장의 제목은 95년 ‘강간과 추행의 죄’로 개정되기 전까지 ‘정조에 관한 죄’였다. 성폭력 자체를 범죄로 보는 게 아니라, 성폭력으로 여성의 정조를 해쳤기 때문에 범죄로 여겼다는 뜻이다. 시간이 흐르고 법제도도 변화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성폭력 피해를 성적 수치심에 따라서 규정하는 법과 제도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을 피해자에게 강요하고 있다. 피해자가 겪을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삭제하며 성적 수치심으로서만 피해를 명명하는 것은 성적 ‘대상’인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려는 남성 욕망에서 기인한다.

성폭력 경험과 그에 따른 감정을 피해자가 제대로 마주하고 드러낼 수 없도록 가로막아온 사회를 향해, 성폭력 경험을 드러내며 성적 수치심이 아닌 ‘성적 빡치심’을 느꼈다는 여성들의 말하기가 이어졌다. 이러한 말하기는 ‘예뻐서’, ‘딸 같아서’, ‘좋아하기 때문에’ 등 가해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남성 욕망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 승인해온 사회와 규범을 흔들어왔다. 지난 수년 한국사회는 언제든 누구라도 일상에서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경험과 감각을 쌓아왔고, 여성들은 이를 토대로 그간 남성/권력의 관점에서 성폭력과 피해를 인정해왔던 현실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연말, 대법원은 레깅스 사건에 무죄를 선고한 원심의 파기환송을 결정하면서 성적 수치심을 해석하는 관점을 제시했다. 성적 수치심은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분노·공포·무기력·모욕감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이를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이 표출된 경우만으로 한정하면 피해자가 느끼는 다양한 피해 감정을 소외시키고, 피해자로 하여금 그러한 감정을 느낄 것을 강요하는 결과가 될 수 있”기에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성적 수치심을 ‘부끄러운 감정’만으로 협소하게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이번 판결은 이후 성폭력 사건에 대한 판례를 다르게 써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기기에 반갑다. 또한 해당 판결을 통해서 ‘성적 수치심’을 폭넓게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성/권력의 관점에서 ‘성적 수치심’을 통해 재단해온 성폭력과 피해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인식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성폭력을 ‘동의 여부’로 판단한다는 것은

성폭력은 ‘동등한’ 개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고’가 아니다. 일터, 학교, 가정, 일상 어느 곳에서나 성별·나이·직급·경제력·장애유무 등으로 작동하는 ‘권력’의 차등 안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성폭력을 규정하는 형법 ‘강간과 추행의 죄’가 오히려 성폭력을 제대로 발견하거나 대응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현행법상 강간이 범죄로 구성되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폭행 또는 협박’이라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 피해자가 거절과 거부 의사를 밝혔다 하더라도 이는 고려되지 않는다. 물리력과 직접적인 영향력이 행사되었는지, 그에 맞서 ‘죽을 만큼’ 저항했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강간죄로 처벌할 수 있다. 가해자가 심각한 수준의 폭행·협박을 행사했거나, 피해자가 도망치거나 강하게 저항해야만 비로소 강간은 죄가 된다.

2017년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상담한 성인 강간 피해 사례 124건 중 강간죄의 구성 요건을 충족한 경우는 15건(12.1%)에 불과했다. 성폭력을 판단하는데 강제성과 그에 따른 저항 정도를 잣대로 하면서 성폭력이 성관계로, 가해자에게 물어야 할 책임이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비난으로 왜곡된다. “피해자가 충분히 반항하지 않았으니 성폭력이 아니”라는 식의 판결은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경험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어왔다.

2018년부터 이어져온 미투(#Me Too) 운동은 여러 위력과 위계가 작동하는 권력구조와 관계 속에 성폭력이 발생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성폭력을 판단할 때 ‘강제성과 그에 따른 저항 정도’가 아니라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삼는 법 개정은 결코 법조항 하나를 신설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그간 인정받지 못한 여성들의 성폭력 경험을 제도에 담아내는 시도이며, 성적 대상으로 취급되어온 여성의 위치를 성적 주체로 전환하는 일이다. 동의 없는 성적 행동이 곧 성폭력이라는 말은 그간 남성/권력의 관점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과 피해가 판단되고 인정되어온 사회를 바꾸자는 요구다.

 

피해가 피해로 인정되는 사회를 향해

나의 경험을 ‘성적 수치심’이라는 말 안에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경험한 폭력과 침해를 ‘문제’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그 간극에서 헤매며 스스로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미끄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 탓이 아니었다. 피해자의 경험과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게 만드는 법제도,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나의 경험과 감정을 정해진 틀 안에 짜 맞춰야 하는 사회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었다.

레깅스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서는 ‘성적 자유’에 ‘성적 대상화 되지 않을 자유’를 명시했다는 의미가 함께 회자됐다. 지금 국회에는 성폭력 사법 처리 과정에서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형법에 비동의 강간죄를 신설하는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어떻게 규정되는지, 그 피해가 어떻게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는지, 성폭력은 여성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부정의의 문제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외쳐온 목소리가 이끌어온 변화다. 성폭력과 피해를 남성/권력이 규정해온 틀 안에 가둬왔던 사회로부터 전환하기 위한 걸음을 뗄 때다. 피해를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회, 피해를 피해로 인정하는 사회로 나아갈 책임이 지금, 국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