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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결사의 자유가 뭐길래

ILO 핵심협약 비준의 의미

"잠시 승차권을 확인하겠습니다."

오랜만에 KTX를 탈 일이 있었다. KTX 해고 승무원들이 복직된 이후 처음이었을 것이다. 무심코 차표를 건네다말고 KTX 승무원의 옷차림에 잠시 주춤거리게 되었다. 정장식 유니폼을 입던 승무원이 아니라 SR과 코레일을 통합하라는 철도노조의 구호가 적힌 조끼를 입은 승무원의 모습이 보였다. 공단의 노동자와 어떻게 하면 함께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며 활동하는 나에게도 구호가 적힌 옷을 입고 일하는 승무원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노동조합이 낯선 사회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면 종종 "너는 회사에 다니지 않아서 부럽다"는 말을 듣게 된다. 벌써 같은 업무를 수년째 하고 있지만 해마다 프리랜서 계약을 갱신하며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친구나 아무리 미리 약속을 잡아도 번번이 당일이 되면 급한 업무가 내려와서 회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친구의 하소연은 이제 놀라운 이야기도 아니다. 이른바 '갑질'에 시달리는 대부분 노동자가 겪는 어려움 중 한 가지 버전에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충분히 짐작 가능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새삼스러운 점은 직장에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그만 둘 생각은 해도 노동조합을 떠올리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이다. 노동조합의 활동에 대해서 지지하는 친구들임에도 말이다. 

이런 반응은 내 주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7년 노사관계 국민의식조사 연구에 따르면 노동조합이 필요하냐고 생각한 질문에 대부분의 응답자인 약 85%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실제 노동조합이 생기면 가입하겠다고 응답한 경우는 약 35%로 대폭 감소하는 응답을 보였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봐도 설문의 결과는 충분히 납득된다. 중소 규모 회사에는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도 거의 없거니와 있어도 소위 '회사 생활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별난 사람 취급받기 일쑤다. 언론에서 노동조합은 언제나 시민에게 피해를 입히고, 경제적 손실을 유발하며, 불법과 폭력을 일삼는 집단으로 등장한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조합은 좋게 말해 독특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특별한 조직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KTX 승무원이 일터에서 노동조합 구호가 적힌 조끼를 입고 있는 것을 낯설게 받아들이는 것도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다. 

물론, 모든 노동자에게 노동조합이 그저 낯설기만 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취직과 실직을 반복하는 청년 노동자, 학교에서 필수적이고 상시적인 업무를 담당하지만 계약직으로만 채용되는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와 기간제 교사, 원청에서 지시한 일을 수행하고 원청에서 월급도 받지만 사장만 따로 있는 설치·수리기사와 하청 노동자, 이 가게, 저 가게 사장님들이 콜은 부르지만 누구도 고용하지 않아 사업주가 된 배달 노동자 등.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을 꾸준히 이어왔다. 우리는 어쩌다 이런 노동자들의 결사를 낯설어하고 기피하게 되었을까? 

결사의 허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하 노조법) 2조를 살펴보면 노동자를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임금·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자"로 정의한다. 이 정의에 부합하는 사람이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면 맞는 말 같지만 이 정의로 배달 노동자, 학습지 교사, 화물 운전기사 등 250만 명의 특수고용노동자가 노동조합을 만들고 가입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 기업이 고용을 한 것이 아니라 개인 사업자와 계약을 해서 수수료를 지급하는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정부 역시 기업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노동조합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팔짱만 끼고 있다.

정부의 이런 행태가 가능한 건 노동조합 설립을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조합 설립 신고서를 노동부가 반려하는 풍경은 익숙해질 지경이다. 청년유니온은 구직자가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노동조합 설립이 5차례 반려되고 6번째 신고 끝에 노동조합 필증을 받았다.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역시 체류자격을 이유로 필증을 받는데 10년이 걸렸다. 기간제 교사 노조는 여전히 노동조합 필증을 받지 못한 상태다. 그 외에도 노동자의 권리를 가로막는 제도를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이란 이유로, 그렇게 비판을 하다가 해고당한 사람이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이런 저런 이유로 정부가 노동조합의 설립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결사만 허가 

노동조합이 설립된다 하더라도 상황은 녹록치 않다. 회사가 노동조합과의 교섭을 피하기 위해 온갖 꼼수를 부리기 때문이다. 2013년 삼성전자서비스 설치·수리기사들이 노조를 만들고 가장 먼저 할 수밖에 없던 일은 사장을 찾는 일이었다. 삼성전자서비스는 노동자에게 업무 지시도, 임금 지급도 하고 있었지만 근로계약은 각 삼성전자서비스 센터와 맺도록 만들었다. 노조의 단체협상요구에 명목상 사장인 센터는 자신들은 아무런 권한이 없다고 책임을 미뤘고, 진짜 사장이 있는 본사는 각 센터와 알아서 교섭하라며 노조의 교섭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노조가 사장 찾기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기어코 사장을 찾아 교섭하고 합의를 만들어도 회사는 피해가는 방법이 마련되어 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와 비슷하게 간접고용, 불법파견이 문제가 된 파리바게뜨 노조는 2018년 1월 어렵사리 본사 SPC와 합의를 만들었다. 하지만 SPC는 회사 내 한국노총 산하 다른 노조와 교섭을 이어가고 있다 밝히며 기존 합의를 무시했다. 한 회사에 복수의 노동조합이 있으면, 회사가 마음대로 지정한 노동조합과 교섭을 해도 된다는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를 통해 꼼수를 부리는 것이다. 

노동자에게 결사의 자유가 없다는 건 단체행동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동조합으로 인정받지 못한 노동조합의 파업은 그 자체가 불법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미 설립된 노동조합도 행동의 범위가 지극히 좁게 해석돼 단체행동이 쉽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최저임금 인상을 외치며 파업을 하거나,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도입에 반대하는 파업을 하면 법, 제도와 연관된 정치 파업이라며 불법 딱지가 붙는다. 일부 업종은 필수업무 유지라며 파업참가를 제한하거나 대체근로 투입을 허용한다. 기업은 노동조합의 단체행동이 손해를 끼쳤다며 수천만원부터 수백억에 이를 만큼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업무방해죄로 고소한다. 결사의 자유와 단체행동을 가로막는 정도를 넘어 삶 자체를 옥죈다. 

정부와 기업은 법, 제도, 권력을 모두 이용해 노동조합을 깨뜨리고 단체행동을 처벌하며 노동조합을 '불온'한 조직으로 만들어 왔다. 아직 결사를 시도하지 않은 노동자, 아직 단체행동에 나서지 않은 노동자에게 결사는 '자유'가 아니라 '장벽'에 가까워졌고 노동조합보다 퇴사가 손쉬운 선택지가 된 것이다. 모여서 싸울 수 없으니 노동조건은 더욱 열악해지는 악순환이다. 

ILO 핵심협약 비준에 나서겠다는 정부 

노동자가 모여서 조직을 만들고, 그렇게 만든 조직이 마음껏 목소리를 낼 수 없으면 노동자의 권리는 실현되기 어렵다. 그래서 국제노동기구(ILO)는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가 가장 근본적인 권리임을 선언했다. ILO 핵심협약인 결사의 자유 협약의 내용은 단순하다. 노동자와 사용자 각각 원하는 방식과 내용으로 단체를 만들어 대등하게 협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 권력과 지위를 남용하지 말라는 기본 원칙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ILO에 가입한지 30여 년이지만 지금껏 한국이 인정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기본적인 원칙이다.

5월 22일 노동부 장관은 결사의 자유 협약을 포함해 ILO 핵심협약 3가지를 비준하겠다고 발표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공익위원 권고안을 참고하여 ILO 핵심협약 비준을 준비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지금까지 ILO 핵심협약 비준을 미뤄온 정부가 앞으로는 달라지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하지만 공익위원 권고안을 살펴보면 정부가 달라진 것 같지 않다. 회사에 항의하기 위한 단체행동을 회사에서 못하도록 하고, 2년 마다 해 온 단체교섭 주기를 3년으로 늘리고, 기업이 노동조합 활동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는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처벌을 축소하자는 것이다. 이 권고안을 바탕으로 협약 비준과 노조법 개정을 동시추진 하겠다는 것은 ILO 핵심협약 비준의 의미를 깡그리 무시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정부는 ILO 핵심협약 비준을 문서에 도장 찍고 치적을 쌓는 일로 생각하는 것 같다.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 권고 수용부터 시작해야  

정부의 ILO 핵심협약 비준 추진은 ILO 가입 이후 무수히 받아온 결사의 자유 위원회의 권고를 존중하겠다는 선언이어야 한다. 국제 협약은 불이행에 대한 규제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협약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약속이 핵심이다. 협약의 실효는 정부가 의지를 가질 때 만들 수 있다.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겠다고 밝혔으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결사의 자유를 기본적 권리로 선언하고 이를 증진하기 위한 구체적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간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에서 권고해 온 사안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로드맵을 밝히는 일이 우선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본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제라도 정부는 핵심협약 비준과 노조법 개정 동시추진을 멈추고 제대로 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로드맵을 밝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