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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단어장] 애도

애도마저 훔쳐간다

A: 벌써 6월 말이네. 한 해의 절반이 갔어.
B: 더위는 길고 시간은 빠르고. 둘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더위는 빨리 가고 시간은 더디 가고. 하루가 일 년처럼 길어졌으면 좋겠다.
A: 왜, 나이 먹기 싫어서?
B: 그건 늘 그런 거고. 정부가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6월 30일자로 강제 종료시키려 한다네.

A: 정말? 언론에선 조사 기간 연장해야 한다고 얘기들 하던데.
B: 정부가 법에 보장된 기간도 안 지키고 중단시키려는 건데 연장이란 단어를 쓰는 게 경우에 맞는 걸까? 본 게임도 안 마쳤는데, 연장전 얘기하는 거야? 법에 1년 6개월의 조사기간이 보장 돼 있는데, 10개월 만에 ‘조사기간 끝났으니 짐 싸라’고 정부가 떠밀고 있어. 우격다짐도 정도껏 해야지.

A: 세월호 특별법도 미적거리다 만들고, 조사 위원들도 늑장 임명하고, 예산도 인력도 안주고 훼방 놨잖아? 그런데 이젠 집달리처럼 들이닥쳐서 방 빼라고 행패부리는 거네.
B: 국회 앞에서 유가족들이 ‘진상 조사 보장하라’고 얘기하는 데 경찰이 피켓 뺐고 유가족을 패대기치더라. 뙤약볕 아래서 눈물을 흘리시는데 내 속에선 땀인지 눈물인지 뭔지 모를 것이 범벅이 돼서 울화가 치솟는 것 같았어.

A: 애도도 하지 말라는 명령이구나.
B: 그러게. 경찰 방송차가 ‘국회 앞에서 정치적인 행동은 금지돼있다’고 고래고래 윽박지르더라. 자기들은 애도를 금지하는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 유족 등에겐 정치적 행위를 하지 말라니. 국회 안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이 더 이상 조사활동 안된다고 국회의원들 앞에서 뻗대고 있는데, 그곳에서 그것에 관계된 얘기를 하지 말라니. 뭔가 강도 만난 느낌이 들더라.
A: 강도가 위협해서 훔쳐갈 때는 뭔가 노릴만한 것이니까 노리는 거겠지. 우리에게서 도대체 뭘 노리는 걸까?
B: 애도 그 자체인 것 같아.

A: 애도가 뭐라고. 그간의 숱한 참사 피해자들, 이 시스템의 억울한 희생양들을 애도하는 게 뭐가 어때서, 그걸 훔치려 들까?
B: 애도와 관련된 어떤 미묘한 힘이 있는 것 같아. 그런 힘을 느끼는 게 싫고 두려워서 아닐까? 혼자 슬퍼하는 것 말고 정치적‧사회적 참사의 피해자들의 죽음을 애도할 때는 서로 연결되려 하잖아.
A: 그치. 각자의 골방에서 나와 애도하는 서로의 얼굴과 느낌을 나누고 싶어 하지.
B: 그런 연결된 느낌을 방해하고 싶고 분리된 느낌을 안고 살아가라는 것이 저들의 바람일거야.
A: 그럴수록 이 힘의 불씨를 지켜야 할 텐데. 서로 딴 세상에 사는 것 같던 사람들이 애도를 통해 우리 삶을 짓누르는 폭력에 대항할 힘을 찾으려는 데 애도의 힘이 있는 걸 거야.

세월호 특별법 개정을 요구하면 세월호가족협의회는 6월 25일부터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다.(사진 출처-카톨릭뉴스 지금 여기)

▲ 세월호 특별법 개정을 요구하면 세월호가족협의회는 6월 25일부터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다.(사진 출처-카톨릭뉴스 지금 여기)


내 마음의 진상 조사

B: 왜, 너나 나나 그냥저냥 살다가 누군가의 장례식에 갈 때면 마음이 복잡해질까?
A: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리는 취약함을 절감하게 되잖아.
B: 영화 <대부>에서 딸을 잃은 알 파치노가 절규하는 장면 기억나? 그 냉혹한 마피아의 대부조차 상실 앞에서 무너져 내릴 때 인간이면 누구나 얼마나 취약한지를 느낄 수 있어. 하지만 그건 딸이라는 깊은 관계 때문에 그러는 거지. 모든 사람에게 그런 상실의 슬픔을 느끼는 건 아니잖아.
A: 맞아. 친밀함에 따라 아주 다른 강도의 슬픔을 느끼게 되지.

B: 그런데 사회적‧정치적 참사로 인한 죽음에는 그런 개인적 애착과 관계없는 다른 차원이 있는 것 같아.
A: 다른 차원?
B: 나는 그런 죽음들을 접할 때 뭔가 잃어버린 것 같아. 근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 내가 뭘 잃은 것인지 두리번거리게 돼. 내 마음의 진상 조사를 하고 있다고 할까.
A: 나도 그래. 그냥 슬프기도 하지만 계속 찜찜한 게 있잖아. 죽은 이들이 나에게 뭔가 요구하는 것 같은데 내게도 어떤 책임을 묻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잘 잡히지 않는 찜찜함.
B: 뭔지 잘 모르겠는 내 마음의 진상조사를 계속 하는 게 애도가 아닐까 싶어. 나는 도대체 그 사람들과 무슨 끈으로 연결돼 있는 걸까, 그걸 찾아보는 진상조사…….

A: 전화벨이 계속 울리는 데 받을지 말지 망설일 때 느낌 같아. 전화를 받고 안 받고는 내 의지인 것 같지만, 타전과 발신은 어디선가 이미 오고 있어.
B: 나도 모르게 죽은 이와의 관계, 연결된 끈을 찾게 되고, 그 관계 속에서 뭔가 그 죽음에 대해 드러내어 말할 것을 찾고 싶은 그런 맘이 도대체 뭘까?
A: 고인의 유족들에게는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그게 슬픔을 느끼더라도 나와 다른 점일 거야. 하지만 나도 뭔가 잃은 게 있거든.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 왜 이리 허전하고 뭔가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 같고 자주 울컥하게 되는지.
B: 잘 모르겠으니까 겸손해지고,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묻게 되고, 드러난 잘못에 대해선 비판하게 되고, 뭔가 바꾸자고 요구하게 되는 게 애도를 공적인 사건으로 만드는 걸 거야. 그러니까 그런 사건을 만들기 싫어하는 권력자는 우리가 애도하는 걸 싫어하고 훔쳐가려는 거겠지.

삶의 박탈, 애도의 박탈

A: 우리가 살아온 질서가, 또 그 질서를 쥐고 있는 권력이 문제라는 걸 우리가 얘기하기 시작하는 게 싫어서? 근데 우리도 그 질서의 일부잖아. 그 질서 속에서 먹고 살아왔고.
B: 그래. 아프지만 나도 그 질서의 구성요소지. 그런데 참사의 피해자를 애도하면서 내가 그 질서의 일부인 걸 회의하게 돼. 뾰족한 길이 없더라도 말이야.
A: 뾰족한 길이 하루아침에 보이겠니? 그러니 애도를 대충 빨리 끝낼 수 없는 거지.

B: 그런데 왜 빨리 해소하라고 몰아대는 걸까? 충분히 들어보지도 않고 소모적이라고 격하하거나 애도의 요구를 무시하려고만 들까?
A: 존중이 아니라 무시라는 점에서 산 자들이 처한 정치나 죽은 자들이 처한 정치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B: 올 상반기만 해도 진짜 가슴 아픈 죽음들이 이어졌잖아. 죽어서도 이름을 불리우지 못하고, 문전박대당하는 이름들. 살아서는 존중받지 못하고 죽어서는 애도 받지 못하고…….
A: 세월호 피해자 중에는 기간제 교사였다고 순직조차 인정 안 되는 분도 있고, 피해자를 도운 일로 몸도 맘도 다친 분들이 많잖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들도 계시고.
B: 노동자들도 소속의 인정을 거부당했어. 하청노동자라고 또 파견노동자라고 원청에선 관계 없다고 손을 내저어. 여성 피해자는 피해자임에도 모욕적인 이름으로 불리고 묘사되고. 그건 사후의 차별이기에 앞서 이미 삶에서 벌어진 문제잖아. 존중하지 않는 삶, 인정하지 않는 삶, 비인간화가 먼저 있었기에 그렇게밖에 죽음을 표시하고 대우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A: 잘못 표시한 게 아니라 이미 그런 식별이 있었다는 것, 그걸 바로잡지 않고서야 죽음의 비극성을 잠시 강조하다가 무뎌지는 반복밖에 없는 것 같아.
B: 피해자가 무구한 약자이고 사연이 비극적이어서 애도해야 한다는 게 아니야. 무구함과 비극성의 아우라가 없더라도 애도는 필요해. 피해자에 대한 게으른 고정관념을 갖지 않는 것도 애도의 윤리일거야.

애도는 부인의 반대말

A: 난 인연이란 노래 참 좋아해. “인연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특히 그 부분.
B: 인연! 나도 좋아해. 애도란 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들어와 있는 타인과의 끈, 인연을 발견하는 것 같아. 그 타인이 물리적으로 사라졌음에도 사라졌다고 할 수 없는 것, 그걸 부인하지 않는 것 아닐까?

A: 내가 정말 부인하고 싶은 건, 빨리 부인하고 벗어나라는 강요야.
B: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독촉은 어떻고.
A: 뭐가 일상일까? 빨리 치우고 같은 방식으로 입시 공부를 하고 빨리 치우고 같은 방식으로 지하철을 운행하고 빨리 치우고 같은 방식으로 기계를 돌리는 게 일상으로의 복귀일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산다고 해서 그 일상이 예전 그대로의 일상일 수 있을까?
B: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관계가 지속되는 일상이어야겠지. 사람의 인격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존중된다는 신뢰가 있어야 일상을 살아갈 맛이 나지 않겠니?
A: 내가 바뀌었다. 우리의 관계가 바뀌었다. 그게 애도가 아닐까? 죽은 이의 부재 속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분명 모두 바뀌었어. 각자도 바뀌었고 서로의 관계도 달라졌지. 죽은 이는 그런 우리 속에 같이 앉아서 우리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B: 죽은 이들이 신성하게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과연 잘 살 가치가 있을까를 묻게 돼. 우리가 자주 앉았다 실수하던 긴 의자 있잖아. 모두가 자리를 잘 잡고 앉아야만 균형이 잡히는 의자. 누군가 갑자기 일어서버리면 기우뚱 넘어가던 의자, 마찬가지로 죽은 이의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우린 기우뚱거릴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권리와 애도

A: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런 말은 죽은 이를 떼어내야 살 수 있다는 것 같은데. 죽은 이의 억울함을 들어주지 않고서 산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까? 산 사람의 권리와 죽은 이의 권리가 상관없는 것일까?
B: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권리를 갖는다’는 말이 점점 더 별로야. 갖는다는 게 ‘내 것, 네 것’ ‘내 자리, 네 자리’에 선을 긋는 것처럼 들리거든. 오히려 서로간의 연결 속에서 관계로 엮인다는 것이 권리에 어울리는 것 같아.

A: 애도조차 방해받는 삶에는 이미 그 삶을 파괴한 폭력이 있었어. 그 삶을 공적으로 애도하는 것을 금지하는 폭력과 매 한가지의 폭력이야.
B: 그러니까 내 권리라는 게 나만의 것일 수 있을까? 나는 나를 지키고 생명을 보존해야 돼. 근데 나의 보존이 누군가에 대한 폭력과 박탈, 아무개의 위험과 죽음에 연관돼 있어. 내가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내가 이런 방식으로 계속 살면 누군가를 해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존해.

A: 사는 건 어차피 그런 거라는 속삭임이 나의 의무를 면제해주진 않아. 때론 내가 느끼는 양심의 가책이란 게 내 속 편하자고 갖는 자기애에 불과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
B: 내 개인적 가책이 내 맘 편해지자는 데 머무르지 않고 뭔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게 애도의 정치일 텐데. 이 사회에서 과연 누가 취약함을 강요받고 있는가, 그걸 고려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우리의 애도는 어디선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