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으로 읽는 세상

코로나19와 애도의 부재

세월호 6주기를 앞두고, 재난을 기억하며 추모하는 이유

다시 4월이 오고, 세월호 6주기가 다가온다. 코로나19 대응에 모두가 온 힘을 기울이는 상황에서 세월호를 추모하는 목소리가 뒷전으로 밀릴까 노파심이 든다. 그러나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 외쳤던 구호가 생생한 만큼, 추모와 남아있는 과제에 대한 책임이 여전하다. 특히 사회 전체가 재난을 경험하는 지금, 세월호가 한국 사회에 남겼던 재난 참사의 추모와 애도의 의미를 더 묻게 되는 세월호 6주기이다.

 

재난의 개인화와 애도의 부재

코로나 방역과 경제 위기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넘쳐나지만 코로나로 사망한 분들에 대한 애도는 잘 들리지 않는다. 사망자에 대한 애도가 부재한 자리를 감염자에 대한 분노가 채운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싸돌아다녀서’, ‘숨겨서’, ‘해외에 다녀와서’, ‘모여서’ 비난받는다. 정부와 지자체는 한술 더 떠 자가격리와 신고 의무를 어길 경우 형사처벌 및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싶은 사람도, 병에 걸리고 싶은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가려지고, 병에 걸릴 만큼 자기관리를 못한 사람들이라는 비난이 넘쳐난다. 이들이 재난의 1차 피해자라는 사실은 쉽게 잊힌다.

1만 명이 넘는 확진자와 2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코로나19는 그 영향이 공중보건을 넘어서 전 사회적 변화를 강제하면서 사회적 재난이라는 명명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게 됐다. 방역 대책으로 제시된 ‘사회적 거리두기’는 모두의 일상 자체를 바꿔버렸고, 그에 따라 멈춰버린 경제가 미칠 사회적 충격은 이제야 진행 중이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도, 감염되지 않은 사람도, 함께 코로나라는 재난을 겪고 있다. 그러나 감염자에게 가해지는 강한 제재와 형사 처벌 등의 조치는 다시 재난의 원인과 해결책을 일부 사람들에게 전가한다. 감염자와 사망자는 공지된 숫자와 공개된 몇 가지의 정보로만 이해된다. 바이러스 감염자가 느낄 고립감과 불안함에 대한 공감은 사라지고, 사망자에 대한 애도 역시 이루어지지 못한다. 재난을 개인화하는 정부 정책이 낳은 효과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감염자를 배제하고 타자화할 때 모두가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언제 나 또한 배제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감염자를 포함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재난에 함께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서로 평등하게 연결될 때 우리는 더욱 안전해질 수 있다. 각자도생하는 안전을 넘어 권리로써 안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재난 피해자들이 멀리 있지 않다는 감각, 우리가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필요하다. 코로나19 확진자에 대한 공감과 희생자에 대한 애도는 서로의 연결을 확인하는 계기로써, 재난 이후가 아니라 재난 과정에 동반되어야 한다.

 

사회적 애도가 변화를 만든다

한국 사회는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재난 희생자에 대한 사회적 애도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가 희생자와 유가족만의 안타까운 사건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가진 문제를 드러냈기에 우리는 희생자의 지인이 아니더라도 세월호 희생자를 애도하고 기억한다. 재난을 만든 사회에 희생자와 내가 함께 살아왔다는 연결점을 확인할 때, 재난을 만든 사회 구조에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난다. 재난이 사회적인 만큼 애도 역시 사회적이다. 희생자에 대한 애도는 재난을 겪고 있는 사회에 대한 애도이기도 하다. 애도하는 과정은 ‘피해자’와 ‘제 3자’라는 구분을 넘어, 함께 재난을 겪어내는 사회 구성원이라는 공동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이 된다.

나아가 사회적 애도는 사회를 바꾸기 위한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애도는 그저 슬퍼하기와 같은 정적인 행위일 수도, 상실의 원인을 파헤치고 잘못을 바로잡는 동적 행위일 수도 있다. 상실에 따르는 깊은 애도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한 행동이 시작된다. 끊이지 않는 노동안전재해와 고성 산불과 같은 ‘자연 재해’까지, 반복되는 재난은 한국사회가 위험사회임을 알린다. 재난 이후의 사회는 달라야 한다고 외쳐오면서 한국 사회는 크고 작은 변화를 계속 경험하고 있다. 변화의 종착점이 어디일지는 모르겠지만, 변화의 시작점은 재난 희생자에 대한 애도로부터 출발한다.

 

재난 피해자가 바꿔온 세상

이를 확인하기 위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앞서 재난 피해자들이 바꿔온 세상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는 일은 중요하다. 대구지하철 화재 이후 지하철 내부가 불연내장재로 변했고, 비상 인터폰이 설치됐다. 장성요양병원 화재 이후에는 요양병원에 스프링클러 의무 설치라는 정책적 변화를 가져왔다. 현재 전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의 코로나 방역 시스템 역시, 메르스 이후 변화한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에 생명과 안전이라는 화두를 무겁게 던졌고, 정부 발의 헌법 개정안에 생명권이 포함되기도 했다. 정부 산하의 특별조사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검찰 특별수사단이 출범했다.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의 목소리로부터 시작된, 지난 6년 동안 생명과 안전의 가치를 외쳐온 싸움이 만들어 온 변화이다.

재난 피해자의 권리에 대한 감각도 변화했다.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모욕, 유언비어는 2014년부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몇몇 후보는 생명안전공원을 ‘납골당’이라고 칭하며 망언을 내뱉었다. 이번 총선이라고 다르지 않다. “세월호 징하게 해쳐먹는다”고 말한 미래통합당 차명진 등 유가족을 모욕했던 수많은 후보들이 버젓이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변화는 분명히 있었다. 막말과 모욕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정치인들에 대해 시민들이 함께 분노하고 맞서 싸워왔다. 차명진 후보는 또 다시 막말을 한 끝에 미래통합당 제명 대상이 됐다. 재난 피해자의 싸움이 세상을 바꿔왔고, 세상은 재난 피해자의 곁에서 함께 싸워왔다. 코로나19라는 재난을 겪고 있는 우리가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다시 기억하고 추모하자

‘코로나 위기’를 잘 넘긴 뒤를 기약하며 사회 전체가 버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시점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코로나 위기를 넘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2015년 메르스 당시 마지막 감염자의 사망과 동시에 전염병 종식 선언이 이뤄졌다. 유가족은 “온 사회가 남편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이 사라지면 코로나 위기가 끝날 것처럼 생각할 때, 재난의 개인화는 심화된다. 바이러스는 사라져도 바이러스를 겪은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기억을 개인화하면서 사회가 망각할 때, 재난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변화하지 않게 된다. 코로나 이후를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떤 사회를 만들어나갈지가 더욱 중요하다.

재난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곧 재난에 대응하는 사회의 역량이기도 하다. 재난을 제대로 알고 기억할 때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재난이 남긴 상처와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 없이 사회는 결코 ‘회복’될 수도 ‘변화’할 수도 없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한국 사회가 변해왔듯이,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사회는 달라져야만 한다. 세월호 6주기를 앞두고, 코로나19를 겪어내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기억과 애도를 제안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