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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대선, 놓치지 말아야 할 질문들

총선 시기 인권운동의 대응을 고민하며

선거가 큰일이긴 큰일인가 보다. 올해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운동도 술렁거리고 있다. 보수 정치권이야 어차피 집권을 자신의 최종 목표로 설정하고 있으니 선거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원래 그런 거니까. 그런데 올해는 시민사회운동 진영에서도 유난히 많은 말이 오가는 것 같다. 2000년 혜성같이 등장했던 낙천·낙선운동이 올해도 역시 진행되지만, 사실상 더 ‘핫(hot)’한 이슈는 ‘어느 단체에 있던 누가 어느 당 후보로 나온다더라’와 같은 ‘소문’들이다. 또 가끔은 그런 ‘소문’들이 언론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권운동도 선거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논의도 있다. 나름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또 다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선거를 통해 세상이 바뀐 적이 있나? ‘좋은(인권적인)’ 사람이 정치인·국회의원이 되면 민주주의 인권 사회 실현할 수 있나?

2012년은 ‘정치의 해’?

올해는 ‘정치의 해’라고들 한다. 20년 만에 총선과 대선이 한 해에 치뤄지다 보니 ‘정치의 해’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선거가 있다고 해서 규정되는 ‘정치의 해’가 과연 우리의, 혹은 나의 ‘정치’가 되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선거에서 투표를 할 수 있게 된 이후로 적지 않은 선거를 거쳤지만, 선거가 나에게 ‘정치’적으로 여겨졌던 적은 별로 없었다. 그나마 약간의 예외가 있다면, 2004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치뤄진 총선에서, 비록 반응은 미미했지만 국민발의제·국민소환제 도입을 제기했었던 것 정도. 그리고 2002년 대선은 아쉽게도 내가 직접 지켜보지 못했으므로 뭐라 말할 수가 없다. 내가 일종의 ‘정치적 사건’으로서 기억하는 이런 선거의 공통점은 선거 자체보다는 선거 시기에 커다란 대중운동적 흐름이 있었다는 점인 것 같다. 2002년에는 미군 장갑차 사건으로 인해 우리 사회 최초로 거대한 촛불시위가 시작되었고, 2004년엔 대통령 탄핵으로 인한 대중집회가 연일 벌어졌다. 아마 2008년에도 선거가 있었다면 분명 커다란 ‘정치적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좀 더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4.19 혁명이나 87년 6월 항쟁도 선거와 더불어 일어났던 사건이지만, 선거만이 아니라 대중운동적 흐름과 선거가 겹쳐서 정치적 사건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거 자체보다는 오히려 선거에 선행한 대중운동적 흐름이 선거를 정치적 사건으로 만들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 같다.

그런데도 올해가 ‘정치의 해’가 될 것으로 기대하게 되는 점들이 있다. 2008년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반대한 촛불집회 이후 현실/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용산 참사, 희망버스, ‘나꼼수’ 등을 계기로 커다란 흐름으로 이어져온 것 같다. 그 사이에 있던 선거에서는 -어찌되었건 간에- 한나라당이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 또 전세계적인 경제위기 상황에서 보수 정치권이 고수하고 있는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 패러다임으로는 도저히 대안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점도 있다. 선거를 앞두고 어느 당이고 할 것 없이 지금이야 ‘복지 경쟁’을 하고 있지만, 이런 복지 정책으로 전세계적인, 그리고 우리 사회의 깊은 위기 상황을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 복지 정책이 일부 확대되면, 말도 안 되게 열악한 노동 환경이 개선되고 가난한 사람이 줄어들까. 이런 상황에서 올해 선거를 앞두고 대중들의 불만이 투표만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정치적 실천으로 터져 나온다면, ‘정치의 해’가 될 것도 같다.

어떤 ‘정치’인가

올해 현실/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정치적 실천으로 폭발된다고 하더라도 선거가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그러한 정치적 실천이 선거와 투표로 조용히 수렴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선거 시기 빠짐없이 등장하는 “투표로 심판하자”와 같은 류의 구호가 그러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불안정하고 열악한 노동, 빈곤의 확대, 경쟁의 심화 등과 같은 현실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투표로 심판하면, 그래서 새누리당(전 한나라당)이 당선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있을까. 진보정당 후보가 당선되면 정말 해결해줄 수 있을까.

[출처: 참세상]

▲ [출처: 참세상]


이와 관련해 “대의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 자본주의 정치에서 진보진영의 전망은 제도권 바깥에서 제도권의 틀을 어떻게 깨트릴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한 정병기(2011)의 주장이 눈에 띈다. 그는 서구의 정당 정치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서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서구의 역사에서 정당 정치는 왕권과 부르주아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는 계급정당이 출현하는데, 이후 계급투쟁으로 인한 사회 복지의 확대에 따라 계급정당은 계급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국민정당화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부르주아 정당 역시 자신의 계급성을 숨기기 위해 모호하게 국민정당화된다. 국민정당은 계급적 이익이 아니라 포괄적이고 모호한 ‘국민’들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책적 방향성을 상실하고 득표만을 최고 목표로 하는 포괄정당이나 선거전문가정당으로 변모한다. 이 결과 현대 정치로 올수록 계급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계급정치가 사라지고 의회를 통한 과두제화와 카르텔 정당체제화 현상이 정당 정치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정당 활동의 목적이 당원과 지지자들의 이해관계 혹은 공공의 이익에 기반을 두지 못하고 자신들의 집권만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는 특정 정치 세력(정당)만의 독점적인 영역이 되고(과두제화),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카르텔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카르텔 정당체제화). 이러한 정당 정치에 대해 대중들의 불신이 높아짐으로써 정당 정치의 위기가 고조되는데, 제도권으로 진입한 진보정당도 이러한 정당 정치의 위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최근 서구의 진보정당(영국 노동당이나 독일 사민당, 프랑스 사회당 등)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이것으로 충분한 설명이 될 리가 없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정병기(2011), 「정당 정치의 위기와 진보 정치 운동의 전망」, 『진보평론』 50호, 메이데이 참조.)

우리 사회에서는 계급정당·정치가 제대로 출현한 적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 분명 서구의 역사적 조건과는 다르지만, 의회를 통한 과두제화와 카르텔 정당체제화가 현 시기 정당 정치의 지배적 현상으로 그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이 고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의 상황은 서구의 정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보 정치를 제도권/정당 정치로만 한정하지 않는다면, 진보 정치가 추구해야 할 ‘정치’는 어떠한 정치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선거를 통한 국회 의석 확보에만 매달리는 정당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나. 더불어 이번 기회에 시민사회운동의 정부 참여 및 의회 진출 등과 같은 소위 거버넌스(공치/협치)에 대한 입장도 사회적으로, 아니 진보진영 내에서만이라도 제대로 평가되고 논의되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선거에 개입하는 모든 활동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방법론적인 차원에서만 보자면, 선거에 후보로 나간다든가, 낙선/당선 운동을 한다든가, 정책을 제안한다든가 하는 등의 모든 활동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구체적인 활동의 방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방법이 어떠한 지향과 목표를 토대로 배치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 중요할 것이다. 지향과 목표, 방식이 동의된다면 어떠한 형태의 선거 활동이라도 나 역시 열심히 참여하고 박수칠 생각이다.

원론적이고 뻔한 이야기 - 대중들의 자기조직화(임파워먼트)를 옹호하는 인권의 정치

결국 또다시 원론적이고 뻔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렇더라도 근본적인 지점을 확인하지 않으면 어디에선가 오해와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확인하면, 대중운동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저항주체로 인식하도록 대중들의 자기조직화를 독려하고 옹호하는 것에 있다는 점이다. 그 다음의 논의는 이러한 목표를 지향으로 삼아 올해와 같은 ‘정치의 해’에 어떻게 더욱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권리 주체로 인식하고 그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나설 수 있을까 하는 점이 될 것이다. 다만 우려되는 점은 자칫 ‘정치의 해’를 선거와 당선을 중심으로만 생각하면서 사람들을 권리 주체로 세우기 위한 목표가 아니라 사람들을 투표에 동원하기 위한 전술만으로 한정시키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현대 사회에서 직접민주주의는 불가능한 이상처럼 이야기되지만, 그럼에도 한계적일 수밖에 없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넘어서 직접민주주의로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은 중단될 수 없다. 국민발의제나 국민소환제와 같은 제도를 통해서도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는 일정 정도 극복될 수 있겠지만, 역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직접민주주의적 실천이다. 대중들의 정치가 거리와 공공장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집회·시위의 자유와 사람들의 적극적인 선거 참여를 보장할 제한 없는 표현의 자유가 아닐까.
덧붙임

박석진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