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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기후정치가 가능한 조건

자본의 요구에 응답하는 기후정치와 단절하자

체감의 크기가 나날이 커지는 기후위기의 현실을 반영하듯 22대 총선을 앞두고 거대 보수 정당들도 기후위기 관련 공약을 제출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이 기후위기 앞에 절박함을 호소했던 것에 비해 기후 의제가 주요 정치 현안으로 다루어지지 못해온 현실을 고려하면 이번 총선에서 기후를 둘러싼 정치의 풍경이 사뭇 달라진 것 같다. 과연 22대 국회는 ‘기후정치’를 담는 공간이 될 수 있을까?

‘기후정치’의 (재) 등장

선거 시기마다 기후 의제를 정치의 문제로 만들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2020년 21대 총선 당시 ‘기후위기비상행동’으로 결집한 기후운동은 각 정당과 후보들에게 기후관련 정책에 관한 질의와 약속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정당에 공약을 요구하고, 답변 내용에 점수를 매겨 유권자들로 하여금 기후정치를 펼칠 의지가 있는 정당과 후보에게 투표할 것을 요청했다. 2022년 대선에서는 전국의 기후 투쟁 현장의 목소리를 모아내 정치에 반영하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하지만 21대 국회는 삼척의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 중단을 위한 5만 국회 입법청원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대기업의 사업권과 이익을 침해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석탄화력발전소와 핵발전소는 물론 신공항 건설 추진에도 물러서지 않는 윤석열 대통령 역시 기후악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기후위기를 정치의 영역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시민들의 요구는 정치권의 무능과 무응답에도 불구하고 더 커지고 있다. 연구자, 예술인, 환경단체 활동가 중심으로 결성된 ‘기후정치 시민 물결’은 <기후정치 원년 시민선언>을 발표하며 더 이상 개인적 실천 차원의 기후위기 대응만이 아니라 기후를 전면으로 내세운 정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기후정치바람’은 전국 17,000명을 대상으로 <기후위기 국민인식조사>를 진행했다. 이 조사는 33.5%의 유권자가 자신의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기후 공약에 투표할 의사가 있다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에 기후정치바람은 22대 총선에 참여하는 모든 정당이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기후위기비상행동은 이른바‘기후정치 씨앗’을 모집해 전체 유권자 중 1.5%의 기후유권자가 선거 이후에도 기후정치를 펼쳐질 수 있도록 (가칭) ‘기후시민 정치세력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런 시도는 기후위기를 정치적 의제로 만들기 위해 시민의 기대나 고민을 조직하고, 구체적인 기후정치를 위한 로드맵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과거에 비해 더 적극적인 행보다. 이처럼 기후위기 대응을 정치에 기입하기 위한 다양한 흐름이 등장하고 있다.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초당적인’ 기후정치?

문제는 기후정치의 방향이다. ‘기후정치 원년’을 선포한 기후정치 시민 물결은 22대 국회에 더 많은 기후정치인이 진출시키기 위해 “정당과 정파를 넘어 기후위기 대응에 의지가 있는 정당, 기후위기 해결에 열의가 있는 정치인에게 투표하자”고 촉구하고 있다. 기후정치를 요구하는 흐름 속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이야기다. ‘기후 후보’를 자임하는 정당의 정치인들도 기후위기야말로 여·야,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접점을 찾아낼 수 있는 초당적 의제라고도 말한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물론 국민의힘과 같은 거대 보수정당에서도 기후공약을 내놓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기후위기를 초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사실상 지난 수년간 보수 양당은 신자유주의 기조 아래 이미 기후위기 문제를 초당적으로 대응해 왔다. 문재인 정부는 재생에너지를 늘린다는 명분으로 에너지 민영화 법안을 제도화했다. 그 결과 재생에너지 사업자는 한국전력을 통하지 않고 전기를 대기업에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흐름을 이어받은 윤석열 정부에서는 지역별 에너지 불균형 문제 해결하겠다며 지역에너지 산업과 계획을 사기업에 맡기는 ‘분산에너지 특별법’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기후위기 대응이란 명목 아래 재생에너지라는 새로운 산업을 자본의 새로운 이윤 추구 수단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전체 재생에너지 중 90%를 민간 자본이 생산하는 지금과 같은 에너지 생산 체제에서 공공성의 개념은 찾아 볼 수 없다. 결국 이런 방식으로 재생에너지 생산을 늘려간들 이 에너지는 다시 자본의 이윤 축적을 위한 동력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

에너지 생산 분야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제적인 탄소 규제 압박 속에서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등 수출 중심 분야의 대기업이 앞장서서 RE100을 선언하며 생존전략을 짜고 있다. 거대 양당은 이런 자본의 전략에 맞춘 공약을 기후정치로 둔갑시키고 있다. 당장 이번 총선이 그 증거다. 국민의힘은 기후 대응 기금을 5조로 확대하고, 청정 수소 생산단지 짓겠다고 나섰고, 민주당은 농촌을 재생에너지 산업단지로 만들며, 녹색 금융을 지원하겠다고 한다. 이는 기후위기를 만든 자본주의 체제는 그대로 둔 채 자본의 겉모습만 녹색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자본의 요구에 맞춘 기후위기 대응책은 지구의 온도를 낮추기는커녕 최소한의 탄소배출도 줄이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 진실이다. 22대 총선을 앞두고 보수 양당이 내놓는 기후 공약은 기후위기라는 체제의 문제를 정치로 풀어내야 한다는 시민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 시대 자본의 생존 전략에 발맞추는 정책을 내놓고 있을 뿐이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탄소중립 정책과 기후 후보를 내세우는 동시에 개발과 토건 사업과 같은 공약에 어떤 철회도 약속하지 않는 모순적 행보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균열을 내는 ‘기후정치’를 위해

그간 정치권이 보여온 기후위기 대응은 과연 기후위기가 초당적 협력이 부족한 까닭에 해결되지 않은 것일까. 기후위기가 단지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사회의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결합한 결과라면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정치의 자리는 그 자체로 당파적이고 첨예한 정치적 갈등의 장소이다. 그래서 기후 정치의 장소는 초당적 연합의 자리가 아니라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균열을 내는 투쟁의 장소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기후위기를 정치의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는 요구는 착취당하는 자연과 생명에 책임감을 느끼며 지금과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투쟁 주체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 목소리에 대한 응답을 고작 자본의 기후 대응을 위한 기후공약으로 답하는 것은 기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자.

정부가 녹색성장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위해 기업에 수조 원의 혜택을 주고, 기업은 생산 종목을 바꾸는 동안 노동자는 계속해서 불안정 노동으로 내몰리는 현실, 누구의 것도 아닌 바람과 태양을 에너지 상품으로 개발하고 그 비용을 시민에게 전가하는 현실, 자연을 무한정 착취하는 자본에 대한 아무런 통제권도 갖지 못한 채 피해는 기후위기 최일선의 당사자가 고스란히 떠안게 되는 현실. 이런 현실을 바꿔내는 정치야말로 시민들이 요구하는 기후위기 대응이고 정의로운 기후정치이다. 이 정치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를 응답하기 위해서라도 자본의 요구와 결탁하는 정치와 단절하고 기후 시민들이 만드는 공공적이고 생태적인 세상을 위한 정치의 장을 만들어 나가야한다. 22대 총선이 ‘기후정치의 원년’이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인간답고 존엄하게 살아가기 위한 그런 기후정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