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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한국사회 노동권 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HIV/AIDS와 노동 세계(HIV/AIDS and World of Work)의 현실

<편집자 주>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는 노동하면서 살아가는 일이다. 노동이 임금노동으로 이해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절한 임금과 적절한 노동조건에서 생활하는 것은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지던 1945년과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이 만들어진 1976년에 이미 인간의 기본 권리여야 한다는 문서상의 국제합의가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노동에 대한 권리는 한 나라에서 기득권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박탈되고 있으며, 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 및 HIV/AIDS 감염인 등 사회적 소수자의 노동권은 보장되고 있지 않다. 특히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로 노동권은 심하게 위축되고 있다.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빈곤에 처한 현실과 노동소득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한국의 상황은 노동에 대한 권리는 생존에 대한 권리이기도 하다. 이번 기획연재에서 논의되는 노동권은 정부와 기업 정책에 나타난 한국사회 노동권 현실이다.

그러나 노동에 대한 권리를 임금노동에 대한 권리로 한정하여 해석하는 것은 일할 권리를 협소하게 만들거나 노동을 거부할 권리를 배제할 수도 있다. 따라서 기획연재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 중 임금노동과 관련된 내용이 다수인 까닭은 현실을 반영할 것일 뿐이지, 임금노동을 절대화시키거나 한정하여 노동권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점을 주지하길 바란다.

기획연재에서는 최근 부각되고 있는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최저임금제도, 비가시화된 사회적 소수자의 노동권 등을 다룰 예정이다.

지난 6월 3일부터 개최된 국제노동기구(ILO) 총회에서는 ‘HIV/AIDS와 노동 세계’를 주요 의제로 채택, 권고안을 최종 도출하였다. 이번 국제노동기구의 ‘HIV/AIDS와 노동 세계’ 권고안 도출은 HIV/AIDS에 있어 중요한 전기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이번 권고안 도출을 통해 2001년에 제정된 ‘국제노동기구의 HIV/AIDS에 대한 실천 강령(ILO Code of Practice on HIV/AIDS)’의 원칙과 세부 실천 사항이 국내 및 국제 수준에서 실천 규약화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각국의 노동 관련 대표 기구들이 규약 제정에 참여함으로써 국내 HIV/AIDS 관련 전략 이행에 있어 이들 기구들이 주요한 파트너로 참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권고안이 최종 채택되면 국제노동기구 내 협약 및 권고안 전문가 위원회에 의한 일반 조사와 추후 조사 과정을 진행할 수 있어 각 국에 실질적 효력을 미칠 수 있다는 점 또한 기대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HIV/AIDS와 노동 현장에 어떤 관련성을 맺고 있는지 이해가 부족한 우리로서는 본 권고안의 핵심 정신을 공유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아직 국내에서는 HIV/AIDS 감염인 숫자가 소수이며 이번 권고안 도출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아프리카 국가들과는 사정이 다른 부분들이 많다. 그러나 본 권고안에서 천명하는 주요 원칙들과 권고안이 도출된 배경들을 살펴보는 것은 국내 HIV/AIDS 문제와 노동과의 관련성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번에 민주노총 대표단이 ILO 총회 내 HIV/AIDS 위원회에 참여한 것은 HIV/AIDS와 노동에 대한 이해에 있어 중요한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HIV/AIDS 이슈, 노동세계와 만나다

이번 권고안의 문제의식 중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선 HIV/AIDS 이슈에 대한 대응을 단순히 정부 내 보건 담당 부서나 작업장 차원으로 한정 지을 수 없고 노동 경제에 참여하는 구성원 전반을 포괄하는 노동 세계(world of work) 차원에서 대응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는 HIV/AIDS 유행이 노동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심대하다는 점(직업 능력의 손실, 노동 가구의 파괴 등)과 노동 세계 내 주요 대표 기구(노동조합, 사용자 단체)의 협력을 통해서 적절하게 HIV/AIDS 유행에 대해 대응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일례로 각국 내 비공식 경제에 종사하는 인구의 HIV/AIDS 문제가 심각하나 이에 대해 국가 차원의 노력만으로 영향을 미치기에는 한계가 있을 경우 이들 대표 기구의 협력이 절실해진다.

또 하나는 HIV/AIDS에 관한 대응을 실행함에 있어 마땅히 준수해야 할 사생활보호나 인권 보호 및 증진의 원칙, 차별금지의 원칙 등을 국제 규약 수준의 원칙으로 준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ILO에서는 이미 실천 강령을 통해 이들 원칙을 천명한 바 있으나 각국의 입법은 반대 방향으로 되는 등 실효성이 의문시 되는 상황이었다. 본 권고안 도출을 통해 이들 원칙이 작업장 수준에서도 관철되어야 할 원칙임을 분명히 하였고 권고안 이행을 통한 보다 포괄적인 원칙 실현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권고안 채택만으로 이들 원칙이 관철될 거라 볼 수는 없겠지만, HIV/AIDS 문제나 감염인 인권과 관련하여 국제적으로 정착된 기준이 있고 각국에 실효성 있는 대책의 준거점이 마련되었다는 점만으로도 그 효력은 크다 하겠다.

ILO 홈페이지 중 에이즈감염인 노동권 부분

▲ ILO 홈페이지 중 에이즈감염인 노동권 부분


국내에서의 문제

그렇다면 국내에서 HIV/AIDS 문제에서 본 권고안이 어떤 효력을 가질 수 있을까? 아직 2001년 HIV/AIDS 실천 강령의 존재조차 생소하고 번역된 적도 없는 국내 상황에서 국제 사회의 권고안 채택만으로 국내의 현격한 변화가 있을 거라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현재 국내 법규정 상 HIV/AIDS와 노동 관련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곳은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의 2008년 3월 21일 개정 조항, ‘사용자는 근로자가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근로관계에 있어서 법률로 정한 것 외의 불이익을 주거나 차별대우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조항이 유일하다. 이조차도 국가인권위원회가 2007년 3월에 의견을 밝혔듯이, 차별 행위 관련한 금지 규정을 적시하지 않아 한계가 분명하다. 또 법 조항 유무와 별개로 현재 대부분의 감염인들은 신병상의 이유나 주변에 감염사실이 드러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직장을 그만두거나 애초에 노동 시장 진입을 포기한 채 상당수 기초생활수급권자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HIV/AIDS 감염인 노동권, 소수화와 배제를 넘어야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HIV/AIDS가 단순히 공중 보건 상의 소수 의제나 잉여적 이슈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 노동의 의제, 핵심적 이슈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문제 의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재 HIV/AIDS가 현재 노동에서 의제로 여겨지지 않거나 소수 의제에 머무르는 것은 단순히 HIV 감염 유병률 때문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HIV/AIDS 환자가 발견된 지 불과 5년도 채 안 되어 가장 먼저 후천성면역결핍증방지법이라는 HIV 감염인을 사회적으로 배제, 격리 조치하는 법률을 제정한 국가이다. HIV/AIDS 문제가 우리 안, 심지어 노동조합 내에서 의제로 인지되지 못하는 것은 HIV/AIDS 초기에 보였던 ‘소수화와 배제의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는 HIV/AIDS 활동을 비롯한 공중 보건이 소수자 배제 및 격리의 방법으로만 이루어졌던 결과이기도 하다.

노동조합이 앞장서서 낙인을 줄여야

국제 HIV/AIDS에 대한 대응에서 노동조합 및 사업장을 주요한 활동 파트너로 삼았듯이 우리 또한 노동조합 등 기본 노동 단위에서 HIV/AIDS 감염인의 인권을 주요 인권 이슈로 인지하고, HIV/AIDS 관련 대응에서 노동조합이 주요 활동 파트너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국제 기준은 HIV/AIDS 감염인이 사업장에서 차별받거나 HIV/AIDS란 이유로 고용을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으나 이것이 개별 노동조합 내에서 구현 가능한 기준이 되기 위해서는 이들 감염인이 더불어 살아가는 노동 식구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함께 생활하는 정도로는 전염이 되지 않는다는 과학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감염인을 같은 노동 식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 공포, 낙인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만연한 공포와 낙인을 줄이기 위해서도 노동조합과 개별 사업장의 역할이 크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는 기존 산업 보건 마인드로부터의 전환 또한 필요한데, 작업장 내에서 병리적 현상을 찾아내 제거, 격리하는 것을 넘어서 노동 사회 내의 조절을 통해 소수자로서의 환자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그들과 공존 가능한 지점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 HIV/AIDS에 관해서는 시야가 협소한 우리로서는 이번 국제 사회 논의에 참여함으로써 HIV/AIDS 뿐 아니라 여성 차별, 모성 보호, 이주 노동자, 비공식 경제 종사자 등의 의제로 확대하여 시야를 넓힌 측면이 있다. 그만큼 HIV/AIDS와 노동의 상관성은 다채로운 주제이기도 하면서 본 주제를 통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면들이 드러난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 아래 이주노동자들을 배제하는 논리와 HIV/AIDS 감염인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논리가 놀랍도록 닮았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배제된 노동들이 어떻게 자본주의의 악순환 구조를 지탱해 왔는지를 그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할 권리와 노동에 참여할 권리를 얼마나 협소하게 이해해왔던 걸까.
덧붙임

토리 님은 진보신당 성정치기획단에서 활동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