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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권리를 중심으로 노동을 새로 쓰는 투쟁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복직투쟁의 의미

얼마 전 서울시의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이하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에서 해고된 노동자들과 간담회를 하기로 했다. 곧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어쩐 일인지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지하철역의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난 탓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역사는 몇 년 전 휠체어 장애인의 추락사가 있었던 곳이었다. 고장 난 엘리베이터는 바로 그 사고 후 설치된 엘리베이터였다. 휠체어로 역사 밖에 나오기 위해 돌고 돌아야 했다. 저상버스가 올 때까지 여러 대의 버스를 보내고, 다시 저상버스를 여러 번 나누어 탄 끝에 도착했다. 10분 거리였던 목적지에 한 시간여가 더 걸린 것이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에서 이들의 주요 노동이 저상버스 확충이나 역사 내 엘리베이터 설치를 요구하는 활동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며, 그날의 역경은 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가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노동이지를 역설하는 것만 같았다.

국가가 공공일자리를 취급하는 방식

공공일자리가 100만개가 넘는 시대다. 고용확대의 일환으로 노동시장 바깥 혹은 그 경계에 있는 청년, 여성, 노인, 장애인, 홈리스 등 이른바 ‘취업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일자리 정책 속에 공공일자리 규모는 계속 커져왔다. 대부분은 저임금 노동이다. 일자리는 시장이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는 ‘돈이 안 되는’ 사회서비스 부문에 집중되어 있거나, 반실업 또는 실업 상태에 놓인 ‘잉여’ 노동을 자본시장에서 활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운영되고 있다. 보육 보조교사, 노인맞춤돌봄서비스, 아이돌보미, 장애인활동지원 등 돌보고 살피며 사회에 필요한 노동에 특정 소수자 집단을 저렴하게 배치하면서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보조적인 수단으로 공공일자리를 활용해왔다. 시장경제 민간 주도 일자리를 강조해온 윤석열 정부가 취약계층 일자리를 더 적극적으로 알선하겠는 공언이 가능한 이유다. 저렴하게 취급하며 시장경제의 보조수단으로 배치하니 공공일자리 노동에 대한 사회 인식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처럼 자리 잡았다. 그로 인해 그 노동도, 그 노동을 하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도 격하되어 왔다. 다른 한편, 이러한 공공일자리 정책은 취약계층 때문에 부담하는 사회적 비용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연초 윤석열 대통령이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이 다시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돌보고 지원하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때문에 정부 재정 형편에 따라 공공일자리의 예산은 정치권의 쉬운 공격의 대상이 되며 일자리 수가 감소되는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공일자리를 늘리는 결정도 쉽다. 특히 고용전망이 어두워지면 그 가능성은 높아진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라 취업자로 분류되는 주당 1시간 이상 일하는 일자리이기 때문인데, 역설적으로 늘어난 일자리는 그만큼 불안정 노동이 더 늘었다는 의미다. 과거 여당 시절 노인공공일자리를 나쁜 일자리라고 비판하던 현 정부여당은 출범 직후 줄곧 기업 성장에 의한 민간 주도 일자리 확대를 강조해왔지만, 떨어지는 고용률 앞에 공공일자리를 늘리는 것으로 정책방향을 선회했다. 국가가 공공일자리를 한낱 고용지표 개선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거나 한시적으로 생계를 복지차원에서 ‘지원’하는데 머무르며, 노동권을 가로막는 적극적인 행위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셈이다. 일자리의 개수나 취업률을 높이는 방식이 아니라, 차별 없이 노동의 권리를 보장하며 일의 세계에 누구나 함께 살아가도록 하는 전망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 공공일자리는 나쁜 일자리라는 공식이 깨지기 어렵다. 시민의 자리는 없고 국가와 자본의 자리만 있는 게 공공일자리의 현주소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가 연 새로운 노동 세계

그동안 장애인 일자리 정책은 대부분 경증 장애인을 대상으로 추진되어 왔다. 이런 현실에서 다른 가능성을 연 것이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2017년 말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점거 농성을 시작으로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1만 개’ 쟁취 투쟁을 진행해 왔고, 그 결과로 2020년 하반기 서울시에서 가장 먼저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을 시작했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안에서 중증장애인들은 ‘권리옹호’ ‘문화예술’ ‘인식개선’ 활동을 통해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의 내용을 실질화하기 위한 노동을 해왔다. 장애인 권리 현실을 알리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모두를 위한 공공시설 확충이나 대중교통 접근권을 높이기 위한 집회 시위를 하기도 하고, 관공서 앞에서 거리 캠페인도 벌였다. 그런데 이제 서울시는 “권리중심 일자리가 캠페인 위주의 선전·선동 활동에 편중되었다”고 공격하고 “시민의 세금이 투입되는 공공일자리가 오히려 시민의 불편을 초래했다”며 이 일자리 전부를 ‘개선’하겠다고 한다. ‘장애유형 맞춤형 특화일자리 사업’이 그 방향이다. 청각장애인에게는 시각을 활용할 수 있는 인공지능 데이터 라벨링을, 중증 근육장애인에게는 불법 저작권 침해 콘텐츠 모니터링, 발달장애인은 택배 상하차 보조업무를 맡기는 식이다. 또 다시 국가가 ‘중증장애인이 할 법한 일’을 정하며, 노동의 의미와 권리를 확장해온 것을 후퇴시키는데 팔을 걷어 부치고 있는 것이다. 특정한 집단에 더 적합한 역할 내지는 장애의 특성을 중심으로 일자리를 배분하면서 오히려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과 대우를 강화해온 과거의 역사로 퇴행하겠다는 의미다.

기존의 공공일자리가 일방적으로 정한 일자리에 사람을 끼어 넣었다면,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일자리를 사람에게 맞추며’ 일의 목록을 새롭게 구성했다. ‘갇힌 삶’을 강요 받아온 중증장애인이 모두를 위한 저상버스 보급률을 높일 것을 요구하는 다양한 실천들을 하고, 장애인 권리를 예술활동으로 알리는가 하면, 공공시설의 배리어프리 여부를 모니터링하며 실제로 접근가능한 장소를 만들었다. 이 일의 자리가 만들어온 변화에는 무엇보다도 관계의 변화가 있다.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는 위치에만 머물러왔던 이들이 인생 첫 월급을 받고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는 경험, 일의 자리가 있는 사람들이 소소하게 누리는 구체적인 경험이 중증장애인에게도 쌓이기 시작했다. ‘자부심’, ‘자존감’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경험은 일의 세계에 함께 하면서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관계를 확인케 한다. 끊임없이 장애 극복을 요구하고 오로지 효율과 속도 경쟁에 기반해 생산하는 이윤만이 노동의 유일한 가치척도인 세계에서 중증장애인이 스스로 노동자로서 사회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사회와 관계를 맺으며 “무엇이 사회에 유용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서울시가 폐지하려고 하는 것은 중증장애인 노동자의 일할 자리만이 아니다. 노동의 의미를 재사유화하고 새로운 노동의 세계를 열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는 것이다.

‘권리’를 생산하는 노동의 의미

<오세훈 서울시장,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최중증장애인노동자 400명 해고 철회 및 원직복직 투쟁을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는 이윤이 아닌 권리를 생산하는 활동인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서울시와의 긴 싸움을 예고하고 있다. ‘권리를 생산’한다는 개념은 마냥 생소하지 않다. 이미 현실의 많은 위태로운 일자리의 노동자들은 공공부문을 민영화하려는 시도에 맞서 고용불안정의 문제 넘어 공공성 투쟁을 제기해왔다.

그러한 투쟁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기후위기 시대 석탄발전노동자들이 발전소 폐쇄를 요구하며 안전하고 생태적인 공공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기본 골자는 발전노동자들의 고용 보장과 함께 재생에너지를 공공적으로 생산하고 공급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공공기관이 에너지를 생산한다고 해서, 혹은 에너지를 생산하는 노동자가 정규직이 된다고 해서 에너지가 권리가 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발전노동자들이 열심히 에너지를 생산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만들어진 전기로 달리는 지하철에 탈 수 없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에너지는 권리라고 할 수 없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가치있는 노동의 목록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일하는 사람의 권리’를 중심으로 일자리를 조직하자는 주장을 넘어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이윤 생산 노동을 ‘권리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탈환하자는 제안이기도 한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해고노동자 복직 투쟁이 사람들의 삶을 더 평등한 방향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권리중심으로 조직된 여러 노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구조를 만드는 투쟁이 되기를 바란다. 더 이상 자본이 아닌 권리를 중심으로 노동을 새로 쓰는 투쟁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