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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세계인권선언의 현재적 의미

떠날 뿐만 아니라 어디에나 갈 자유까지

[세계인권선언의 현재적 의미] 제13조 이전과 거주의 자유

<편집자주> 세움터에 연재되던 [세계인권선언의 현재적 의미] 연재를 이번호부터는 매주 게재합니다.


1. 모든 사람은 각국의 영역 내에서 이전과 거주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2. 모든 사람은 자국을 포함한 어떤 나라로부터도 출국할 권리가 있으며, 또한 자국으로 돌아올 권리를 가진다.


당연한 자유?

80년대 민주화 요구 시위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시위에 반대하는 한 아저씨가 시위대를 향해 소리쳤다. “난 이전과 거주의 자유가 있다구. 그러면 민주주의고 자유지, 이전과 거주의 자유 말고 뭔 놈의 민주주의와 자유가 더 필요해?”라고 목청을 높이시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그 분의 말처럼 ‘이전과 거주의 자유’는 민주사회의 필수적인 권리로 여겨진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지만 말이다.

자유로운 이동의 권리가 없으면 다른 권리들이 위협받는다. 직업이나 교육의 기회가 막힐 수 있고, 정치적·경제적 억압으로부터 피난처를 구할 수 없으며, 스스로 선택한 종교를 신봉하지 못하거나 여타의 기본적 권리를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

“이동을 할 수 있어야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이동을 할 수 있어야 직장도 구할 수 있으며, 이동을 할 수 있어야 사람도 만나고 결혼도 하고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이동을 할 수 있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지 않습니까?”라는 장애인 이동권의 외침이 공감을 얻은 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이동에 담긴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성격을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전과 거주의 자유’는 모든 사람의 인권으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오늘날 심각한 인권문제를 유발하는 주요소 중의 하나는 바로 ‘이전과 거주의 자유’의 제약성이다. 선언 13조는 이어지는 14조(망명의 권리), 15조(국적을 가질 권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13-15조를 연결하는 요소가 무엇인가하면 소위 ‘비시민’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이전과 거주의 자유’가 거대한 장벽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13조의 침묵

그런데 13조를 들여다보면 ‘비시민’들이 간절히 원하는 이전과 거주의 자유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먼저 1항에서는 “각국의 영역 내”에서의 이동을 말하고 있다. 2항에서는 ‘자국민’이 “자국”으로 돌아올 권리를 말할 뿐이다. 즉, 이전과 거주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한 국가 영역 내에서의 권리이며, 자국민은 떠났다가 돌아올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은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권문제로 중요시되는 문제, 즉 누구든지 어떤 나라에든지 들어갈 권리(immigration)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들어가는 것이 봉쇄돼 있기 때문에 설령 들어갔다 할지라도 그 국가 영역 내에서의 자유로운 이전과 거주는 실현되기 어렵다.

선언 기초자들이 생각한 13조에서의 이전과 거주의 자유는 자국 정부와 개인 시민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현대 세계에서는 옛날에 땅에 속박됐던 농노처럼 이동의 자유를 박탈하는 일이 있을 수 없고, 이전과 거주에 대해 당국의 허가를 강제하는 일은 독재정권이나 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이런 정도로 이동의 자유를 바라봤기에 13조의 내용은 선언기초자들에게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떠날 자유는 약간 논란이 됐다. 당시에 베를린 장벽이 있었기 때문에 반대하는 편의 논거가 됐다. 그러나 대다수 나라에서 떠날 자유는 당연시 됐기에 통과됐다. 떠날 경우에는 여권을 요구하지도 않는 나라들도 있다. 돌아올 자유는 폐위된 왕족, 이전 정부의 수반이나 그들의 측근, 추방됐거나 정치적 이유로 쫓겨난 사람, 외국에서 태어난 국민이 대규모로 돌아오는 것 등이 문제시됐다. 어쨌든 결론은 자국민이 떠나고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는 해당 정부가 이유를 묻지 않고 제약도 가하지 않겠다는 것이 13조의 원칙이다.

누구에게나 ‘떠날 자유’가 있다면, 그리고 그 자유가 의미가 있으려면 ‘떠나서 어디에나 갈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선 어디에나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각 국가는 국경을 통제할 권리를 갖고 있다. 결국 현실에서 갈 곳을 마련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떠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내몰림이고 재난이 될 수 있다. 선언은 앞서 말한대로 자국민이 아닌 사람의 입국의 권리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고, 선언 이후 13조와 관련된 국제기준은 대개 난민과 무국적자에 대한 것이다. 여전히 입국의 권리를 말하는 국제기준은 전혀 없지만, 가장 밀접한 것은 강제송환금지(non-refoulement) 원칙이다. 어느 누구도 박해의 위험이 있는 곳으로 돌려보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14조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끝없는 수난

이전과 거주의 자유 제약으로 인한 인간 수난을 보기 위해 멀리 타국의 난민촌을 봐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바로 지금 한국 사회에서 숱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서울 시내 곳곳에 둘러쳐지는 재개발과 뉴타운의 깃발은 거주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더욱 더 나쁜 거주지로 옮겨갈 자유가 자유라면 그런 자유는 넘쳐나고 있다. 단속에 쫓기던 이주노동자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사경을 헤매고, 짐 챙기고 작별 인사를 할 기회도 주지 않을뿐더러 국가인권위의 권고도 무시하고 강제 출국시키는 일이 매일의 뉴스다.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이유로 수많은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 권리를 박탈당하고 반강제적으로 수용생활을 해야 한다. HIV/AIDS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앞뒤 따지지 않고 출입국을 봉쇄한다. 『파리의 택시운전사』로 유명한 홍세화씨가 정치적 탄압 때문에 20여년을 망명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나, 37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송두율 교수가 ‘해방 이후 최대간첩’으로 매도됐다가 무죄판결을 받은 것도 최근의 일이다. 외국에 있는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과거 숱한 조작사건의 관련자라는 이유로, 소위 반정부 활동(지금은 민주화운동이라 부른다)을 이유로 자국에 돌아올 권리를 박탈당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 조선적이란 이유로 자유롭게 한국을 방문할 수 없는 재일동포들이 부지기수고, 북한출신 이주자나 중국에서 온 조선족들의 국내에서의 처지는 13조에 담긴 소극적인 수준의 권리조차 아까워하는 냉대에 가깝다.

인권으로서의 이전과 거주의 자유

‘시민권’속에서 이전과 거주의 자유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권’으로서의 이전과 거주의 자유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둘의 외관은 비슷하지만, 핵심적인 차이가 있다. 시민권은 특정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로 권리를 주는 것이고, 인권은 구성원 자격과 권리를 떼어내는 것이다. 즉 특정 사회(국가)에서 갖는 지위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니까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대접을 하는 것이다.

시민권이나 인권 모두 더 많은 사람들에게로 확장돼온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민권은 특권이다. 특정 국가의 구성원만 써먹을 수 있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고정돼 있는 게 아니다. 누가 국민이고 외국인인가를 정하는 조건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국민 중에서도 누구를 권리로 대접하고 누구를 무권리로 팽개치는 지도 달랐다. 그리고 이건 앞으로도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과거 생계를 잃고 시골을 떠나 도시로 이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상황이나 오늘날 가난한 나라에서 산업국가로의 이주는 비슷한 상황이다. 맨몸 맨주먹으로 도시로 상경했던 사람들은 소유한 것이 없었기에 시민 대접을 받지 못했다. 지금도 재산은 시민권의 주요한 근거이다. 이들이 시민 대접을 받기 위해 어떤 수난과 싸움을 겪었는지를 기억해 보자.

앞서 살펴본 ‘수난’의 예에서처럼 이전과 거주의 자유는 자국민과 외국민을 구분하지만 자국민 내에서도 끊임없이 구분을 한다. 정치적·영토적·경제적·문화적 배타성에 근거한 시민권으로서의 이전과 거주의 자유는 도대체 누구에게 득이 되는 것일까를 생각해보자. ‘구성원이 될 자격을 꼭 지금 같은 구분선속에서 그어야 할까’ ‘상품과 서비스는 자유롭게 왔다갔다해야한다고 하면서 왜 사람은 안된다고 하는가’는 현재 인권 논의의 주요한 쟁점이다. 자본과 기업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자유로운 이동과 거주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 사회보장제도 등에 있어서 차별을 없애는 것, 내외국인 노동자가 같은 지위를 누리는 그런 모습을 그려볼 수는 없는가, ‘이전과 거주의 자유가 민주사회의 기본’이라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기본은 아닐까.

덧붙임

*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