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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세계인권선언의 현재적 의미

“이행되지 않는 인권은 실체 없는 그림자”

[세계인권선언의 현재적 의미] 제 8조 효과적인 구제를 받을 권리


세계인권선언 제 8조

모든 사람은 헌법 또는 법률이 부여하는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하여 담당 국가법원에 의하여 효과적인 구제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세계인권선언을 다룬 애니메이션을 본 일이 있다. 8조를 묘사한 장면은 이러했다. 한 사람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정말 억울한 일을 겪었다는 게 그 눈물에 흠뻑 녹아있다. 법정과 판사에게로 다가가 눈물로 뭔가를 호소한다. 잠시 후 두 손을 흔들며 활짝 웃는다.

두말 할 것 없이 권리 침해를 받았을 때 구제를 받을 권리는 아주 중요하다. 8조는 선언을 완성하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제안된 조항이다. 선언 기초자 중의 한사람은 “효과적으로 이행되지 않는 인권은 실체 없는 그림자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구제를 받을 권리’를 넣는 것에 대해 반대의견이 많았다. 반대자들은 다른 조항들은 ‘보장’받아야 할 권리들을 얘기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다 권리를 침해당했을 경우를 집어넣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선언의 목적 자체가 이행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선언은 무엇을 목표로 삼을 것인가를 얘기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이행의무를 부과하면 많은 국가들의 동의를 얻어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에서 ‘국제조약’이 아닌 ‘선언’의 형태를 취하기로 일찌감치 방향을 돌렸던 것이다.

어찌됐든 미약한 수준에서나마 선언에 구제 조항이 들어간 것은 다행이다. 선언 이후 다른 국제조약들은 구제 조항의 범위를 더 넓히고 구체화했다.

8조는 국가법원에 의한 구제, 즉 사법적 구제만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인권침해와 관련된 구제조치가 사법적 조치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이고 바람직한 구제 형태가 사법적 구제이고 그 가능성을 확대시켜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사법적 접근이 적절치 못할 때도 있다. ‘신속하고 효과적이고 비용이 덜 드는 구제절차’가 절실할 때가 있다. 선언 이후 다른 국제조약들은 사법 구제 말고도 ‘행정 또는 입법당국, 기타 권한 있는 당국’에 의한 조치를 말하고 있다. 인권침해를 부르지 않고 예방할 수 있는 또는 잘못된 입법행위를 뜯어고칠 수 있는 입법조치, 그리고 행정구제, 옴부즈만이나 국가인권위 등의 활동이 여기 해당한다.

8조는 “담당 국가법원에 의하여”라고 말한다. 즉 국내의 구제에만 머무르는 것인데, 자국 정부와 법률로부터 인권을 침해당한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하지 않는다. 선언 이후 국제인권보장체계의 발전 속에서 국내의 구제절차를 통해 구제받지 못한 경우 유엔이나 지역인권기구에 청원할 수 있는 제도 등이 마련됐다.

8조가 보장하는 권리 범위는 “헌법 또는 법률이 부여하는 기본권”으로 되어있다. 대개 다른 국제조약들은 ‘그 조약에서 인정된 권리들’에 대한 구제를 말하고 있다. 이와 비교할 때 선언은 선언이 보장하고 있는 권리뿐만 아니라 국내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권리들과도 관련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대조적인 해석이 있다. 하나는 선언에 열거된 권리들보다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국내법에 열거된 권리범위가 훨씬 넓기 때문에 8조가 포괄하는 권리범위는 어떤 조항보다도 넓다고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기본적 인권과 관련해서는 국제인권법의 기준들이 각국 헌법이 규정한 기본권보다 더 넓다고 보는 입장이다.

사법적인 권리구제에 대해서는 크게 3가지 요소를 말할 수 있다. 첫째, 누구나 권리침해를 당했을 때는 법원에 다가갈 수 있는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 둘째, 법원에서는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공정한 재판의 권리가 여기서 도출된다. 셋째, 구제조치가 결정됐다면, ‘집행’이 보장돼야 한다.

누구에 의한 침해인가도 문제가 된다. 다른 국제인권조약들은 ‘그 침해가 공무집행 중인 자에 의하여 자행된 것이라 할지라도’ 실효적인 구제조치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국가에 의한 행위는 당연히 구제조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더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기업에 의한 침해이다. 가령 FTA의 ‘투자자 국가 제소권’ 같은 경우 정작 권리침해를 받은 사람들이나 그들이 속한 나라의 법과는 관계없는 데서 심판이 이뤄진다. 이는 선언 8조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제가 있으려면 적어도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청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설명 또는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처벌부터 하고 쫓아내고 외면하는 사건이 많이 벌어진다. 학생의 소명권 같은 건 없이 징계부터 한다든가 자기 인권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고 단속‧추방해버리는 이주노동자 정책 등을 떠올려보자.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http://khrrc.org)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