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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인권이 기후정치를 가능케 한다

‘정의로운 전환’은 정치적 권리 주체의 문제

이제 기후변화, 기후위기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시대다. ‘기상 관측 사상 최고’라는 수식어를 달고 매년 찾아오는 폭염, 한파, 태풍과 같은 이상기후를 정리해 기상청은 ‘이상기후 보고서’(2010~19)를 발간했다. 몇 해 전부터 알래스카와 시베리아에 산불이 빈발한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작년 9월부터 시작된 호주의 산불이 얼마 전에야 겨우 잡혔다. 이미 물에 잠기기 시작한 남태평양의 섬나라들은 연안 대도시들의 미래가 되고 있으며, 기후변화가 초래한 농작물 피해는 식량위기로 이어져 아프리카와 아랍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한국사회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는 ‘코로나 19’의 발생 원인으로 기후변화와 야생동물의 서식지 파괴를 꼽기도 한다.

 

이미 세상이 이 모양인데 앞으로 10년 안에 탄소배출을 절반 이하로 줄이지 못하면 더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된다고 한다. 당장 행동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대체 뭘 해야 하나? 방법이 있기는 한 건가? 게다가 각자 살아남기도 버거운 세상에서 지구를 구하자고? 기후운동이 종말론적 예언이 아닌 세상을 바꾸는 운동이라면 반드시 답해야 하는 질문들이다.

 

방법은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기후변화에 대응해 온 국제사회의 노력은 저탄소 녹색산업을 육성해, 화석연료 기반의 산업에서 벗어나 녹색성장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재생에너지 산업지원과 에너지 효율화, 탄소배출권 거래시장, 녹색 상품, 자본 시장이 그렇게 형성됐다. 기후위기에 맞서 뭐라도 하고 싶은 개인들에게 놓인 선택지는 녹색산업의 소비자가 되는 것뿐이었다. 친환경 제품을 구매하고 채식을 하고 전기차를 이용한다. 착한 소비니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랬더니 결과적으로 친환경 산업으로 자본만 배를 불리고 불평등은 심해졌다. 온실가스 배출량도 더 늘면서 시장이 해결할 거라던 기후변화는 이제 기후위기가 되었다.

 

기후위기를 막을 방법은 있다. 지난 해 유럽연합은 ‘유럽그린딜’을 발표했다. 미국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는 ‘그린뉴딜’을 전면에 내세운 샌더스가 유력 후보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정의당과 녹색당이 21대 총선 정책으로 ‘그린뉴딜’을 발표했다. 정책의 실제 집행가능성을 비롯해 여러 차이점들이 있으나, 대체로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경제사회적 전환을 추구한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2050년 탄소 순배출 제로 또는 탈탄소 사회를 목표로 에너지, 교통, 산업, 주택 분야에서 포괄적 전환을 시작하고 그 과정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정의로운 전환’을 하겠다는 것이다. 혼자서는 착한 소비자가 될 뿐이지만, 기후위기에 맞서 한국 사회를, 세계를 바꾸기 위한 집단적 정치적 실천으로서 ‘그린뉴딜’, 아니 ‘거대한 전환’이라는 기획과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물론 ‘그린뉴딜’에도 여러 한계들이 있고 더 토론될 여지가 많은 정책이다. 하지만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서는 더 이상 시장이 아닌, 정부의 전면적인 개입과 계획에 따른 포괄적인 경제사회 시스템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린뉴딜’은 소비자 실천이 아닌, 경제사회 시스템 자체를 재구성하자는 정치적 기획이다.

 

그 ‘전환’ 누가 할 것인가

 

한국에서 ‘그린뉴딜’은 이제 막 첫발을 떼기 시작했다. 다만 정의당과 녹색당의 총선 정책으로 등장한 그린뉴딜은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정책패키지’처럼 보인다. 특히 경제적 불평등과 부정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는 문제의식으로서 ‘정의로운 전환’이 아니라 산업구조 변화 과정에서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지원과 안전망 제공으로 협소하게 제안되거나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전환을 바란다면, ‘그린뉴딜’은 산업정책이 아닌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한 세력화 전략이자, 정치적 기획이어야 한다.

 

‘정의로운 전환’은 고용과 사회안전망 지원을 넘어, 이 ‘거대한 전환’의 정치적 주체를 세우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2월 18일 두산중공업이 1천여 명을 해고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최근 수 년 간의 심각한 경영난을 그 이유로 들었다. 매출의 대부분이 석탄발전과 핵발전 부문에서 나오는데 기후위기의 심화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전 세계적으로 에너지 발전 부문에서 석탄과 핵발전은 줄어들고 재생에너지 시장이 급속히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실직 위기에 처한 두산중공업 노동자들과 수많은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재생에너지 발전산업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투쟁을 시민들과 함께 벌일 수는 없을까? 핵폐기장, 송전탑, 석탄화력발전소 건설과 연장을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의 싸움은 언제나 지역이기주의 또는 지역경제를 어렵게 한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이 싸움이 지역이기주의가 아닌 기후위기 시대에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한 싸움임을, 자본의 이윤에만 목매 자연과 인간을 희생시켜 온 에너지 산업을 바꾸는 싸움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이런 문제는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고만 생각되었다. ‘정의로운 전환’은 오히려 경제적 이해관계야말로, ‘지구를 구하기는커녕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대다수 사람들이 기후위기에 맞서는 싸움과 공동체와 자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연결하는 강력한 고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후위기에 맞서기 위해 경제사회 시스템의 근본적인 전환을 호소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전환을 이뤄낼 권력도 힘도 없다. 일터에서, 거주지에서 자신과 공동체의 정치적 권리, 삶의 권리를 박탈당해 온 이들에게 기후위기에 맞서자는 호소가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서 ‘정의로운 전환’은 다시 ‘민주주의’와 ‘인권’의 문제가 된다. 전환 과정에서의 불평등과 배제 이전에 이러한 전환에 참여하고 결정할 권리, 정치적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는데 가장 중요한 주체인가? 아니면 정책적 배려, 고려 대상일 뿐인가? 즉 ‘거대한 전환’을 누가 할 것인지,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권리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그렇다면 차별과 배제, 불평등의 이 세계를 바꾸기 위한 정치경제적 권리 투쟁과 기후위기에 맞서 이 세계를 바꾸기 위한 싸움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 세계 기후운동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청소년/청년 세대의 활동은 이를 잘 보여준다. 평등한 시민으로서 권리를 보장 받지 못하고 배제되어 온 이들이 기후운동의 중심에 나서면서 ‘미래 세대’가 아닌 기후위기 시대 ‘현 세대’로서, 정치적 주체로 스스로를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기후운동의 주도 세력이 된다면? 자본이 모든 걸 틀어쥐고 있는 일터를 환경과 인간 중심의 일터로 재구성하기 위한 투쟁이 역으로 조직되고, 이는 개별 기업 수준을 넘어선 사회적 투쟁이 될 수 있다.

 

기후위기 시대, 국경을 넘어서는 정치적 권리의 쟁취

 

지난 1월 20일 유엔 자유권위원회는 ‘기후위기로 임박한 위험을 피해 온 사람들을 강제로 돌려보낼 경우 인권침해 상황에 노출’된다며 이들을 난민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을 냈다. 기후위기로 인한 환경난민의 ‘지위’를 유엔 차원에서 처음으로 공식화했다. 남태평양 섬나라 키리바시의 주민 이와네 테이티오타가 뉴질랜드에서 추방될 위기에 놓이자 유엔에 진정을 했고, 그 결과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임박한 위험’을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피할 수 있다고 판단해 난민 ‘자격’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유엔의 뒤늦은 기후난민 ‘지위’ 인정과는 별개로 키리바시는 국토의 대부분이 침수위협에 놓이자 정부차원에서 ‘존엄한 이주’ 정책을 추진해왔다. 국민들이 난민이 아닌 동등한 정치공동체의 성원으로 다른 국가로 이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기후위기로 국가가 사라지면 공동체 성원의 ‘정치적 권리’도 사라지는 현실 속에서 키리바시의 국민들은 기후위기의 책임을 다른 국가들에게 함께 질 것을 요구한 것이다. 기후위기에 맞서기 위해 우리가 조직해야 하는 ‘정치적 권리’는 국경을 넘어서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