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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문헌읽기]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침해에 관한 마스트리히트 가이드라인

아주 오래전 영화 속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이루지 못할 꿈은 악몽이래요.” 몹쓸 꿈이 악몽이 아니라 이루지 못할 꿈이 악몽이라는 이 대사는 인생을 좀 안다고 하는 사람이 아닌 어린아이의 대사였다. 그런데 요즘 한국 사회에는 ‘악몽’을 꾸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어떤 악몽을 꾸고 있는가? 잘리지 않고 일하는 것, 일은 할대로 다하면서 반쪽 노동자로 취급받지 않는 것, 학교도 마치고 성인이 됐으니 취직해서 제 몸 건사하는 것, 장애를 가졌어도 학교 문턱 밟아보는 것, 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동단속의 사냥감이 될 것을 겁내지 않고 맘 놓고 일하는 것 등이다. 이런 기본적인 생존에 관계된 것들이 ‘이루지 못할 악몽’인 사회에서 어린아이가 꿈을 꿀 수 있을까?

인간답게 일하고, 인간답게 먹고 살고, 인간다운 교육을 받는 것에 해당하는 권리가 이루지 못할 꿈이라고 윽박지르는 사회에서 더 많이 파헤치고 더 많이 경쟁해서 더 잘살게 해주겠다는 미래의 청사진들만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그런 청사진을 내놓으며 살림을 책임져보겠다는 분들이 꼭 알아야할 의무의 목록이 있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인간답게 살 권리에 대해 국가가 어떤 의무를 지는가를 알려주는 지침이다.

인간답게 일하고, 일하지 못할 상황에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고, 인간다운 교육과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담은 국제인권조약이 있는데, 그 이름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사회권 규약)이다. 세계적으로 156개국이 이 규약을 지키겠다고 약속했고, 한국도 1990년에 이 규약을 비준하여 그런 약속에 동참했다.

그런데 많은 정부들이 그런 약속과 달리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의무를 피하려 했다. 먹고사는 문제에는 돈이 드니 어렵지 않느냐, 법원에서 재판을 통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인권 침해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지금 노력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잘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기다려보라는 식이다.

이렇게 사회권에 관련된 인권이 정부들로부터 외면받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국제인권법에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모였다. 이들은 국가의 어떤 행위가 사회권 침해이며, 사회권 보장을 위해 국가가 어떤 의무를 이행해야 하고, 침해 시에 어떤 구제를 제공해야 하는지 등을 상세히 정리했다. 그 결과가 1986년 ‘림버그 원칙’이고, 10년 후에 다시 점검한 결과가 오늘 읽어볼 ‘마스트리히트 가이드라인’이다. 두 원칙의 이름은 모인 곳의 이름을 땄다. 유엔은 이들 원칙을 수용하여 유엔 공식 문서로 채택했다.

마스트리히트 가이드라인은 모두 32개 지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핵심이 6번째 지침으로 사회권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존중, 보호, 실현’의 의무로 제시했다. 이를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존중의 의무(obligation to respect)
국가는 인권을 침해하지 않아야 하고, 인권을 누리는데 방해요소를 만들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의 확대를 꾀하는 법안을 만들고 통과시키는 일은 노동권과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침해하며 고의적으로 사회권을 후퇴시키는 조치에 해당한다. 국가소유시설이 환경오염물질을 함부로 배출하거나, 국가기관이 장애인 의무 고용을 지키지 않는다든가, 대안적 주거시설 없이 강제철거를 강행하는 일 등이 존중의 의무 위반에 해당한다.

· 보호의 의무(obligation to protect)
국가는 국민 개개인의 인권을 존중할 뿐 아니라 제3자(예를 들어 기업)에 의해서도 인권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보호할 의무가 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벌어지는 아동학대에 대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일, 고리대금업자가 폭력과 위협을 행사하도록 내버려두는 일, 기업이 산업안전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노동자를 함부로 해고하게 내버려두는 일 등은 보호의 의무 위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 실현할 의무(obligation to fulfil)
국가가 어떤 의무를 갖는지 그 내용을 구체화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 없는 의무라는 말만 남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인권의 충분한 실현과 향상을 위한 목표를 설정해야 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합리적으로 계획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여기에는 법률·행정·예산·사법조치가 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그 성취의 결과에 대해서도 따져봐야 한다. 의무가 이행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인지를 증명할 책임도 있다. 예를 들어 태풍 때문에 교육기관이 일시적으로 문을 닫았다면 그것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경우인 반면, 적절한 대책 없이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의료급여 체계를 축소했다면 의무이행의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지침 7의 ‘행위와 결과의 의무’이다. 행위의 의무는 권리실현을 위해 합리적으로 계획된 조치를 취할 의무이고, 결과의 의무는 국가가 세운 목표를 성취하는 것을 포함한다.

사회권만이 아니라 모든 인권이 당장 완전한 형태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완전한 실현이란 목표를 향해 항상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즉각’ 이뤄져야 할 조치를 외면해서도 안되고, 점진적으로 실현한다고 해서 마냥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측정 가능한 진보’를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상관없이 이행돼야 할 ‘최소핵심의무’란 것이 있다. 여기에는 필수적인 식량, 기초의료, 기본적인 쉼터와 살집, 초등교육 등이 해당한다.

이러한 국가의 의무가 실천되기 위해서는 민간단체, 언론, 전문기구 등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사회권의 침해에 대해 촉각을 세우는 것이 요구된다. 사회권의 침해를 기록하고 감시해야 한다. 이런 일의 기본중의 기본은 사회권 침해의 피해자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일일 것이다. 지침 21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들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 때문에 처벌받아선 안된다”고 했다. 그런데 사회권의 피해자들은 물리적 폭력과 벌금을 때려 맞고 있는데 침해자들은 사회봉사를 권고 받고 명예훼손에 대한 고발을 남발하고 있으니 사회권의 의무를 고의적으로 어기고 있는 증거가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다.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침해에 관한 마스트리히트 가이드라인(The Maastricht Guideline on Violations of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 1997)


존중, 보호, 실현의 의무
6. 시민‧정치적 권리와 마찬가지로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도 국가에 세가지 형태의 이행의무를 부과한다. 그것은 존중, 보호, 실현의 의무이다. 세가지 이행의무 중 어느 것이라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들 권리의 침해를 구성한다. 존중의 의무는 국가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향유하는데 저해하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호의 의무는 제3자가 인권침해를 하지 않도록 국가가 막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기업이 노동자의 기본적인 일할 권리와 공정하고 유리한 노동조건을 만드는데 실패한다면 노동권에 대한 인권침해이다. 실현의 의무는 국가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완전히 실현하기 위해 적절한 법률‧행정‧예산‧사법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한다. …

행위와 결과의 의무
7. 존중, 보호, 실현의 이행의무 각각은 행위의 의무와 결과의 의무의 요소를 포함한다. 행위의 의무는 개개의 권리향유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계획된 조치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건강권의 경우, 행위의 의무는 모성사망률을 줄이기 위한 행동강령의 채택과 이행을 수반한다. 결과의 의무는 국가가 세부적인 실체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목표를 성취할 것을 요구한다. …

재량의 여지
8.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완전한 실현은 오직 점진적으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시민‧정치적 권리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특정 조치는 즉각 이뤄져야 하고 다른 조치들은 가능한 한 발리 이뤄지도록 해야 하는 국가의 법적 의무의 성격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므로 해당 권리의 완전한 실현을 향해 측정 가능한 진보를 보여줘야 할 의무가 국가에 있다. 국가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핑계로 “점진적인 실현”(사회권규약 2조)을 이용해서는 안된다. …

최소핵심의무
9. 각 권리들의 최소한의 필수적인 수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위원회가 규정한 ‘최소 핵심 의무’를 국가가 충족시키지 못할 때 규약상의 권리는 침해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당한 숫자의 개인들이 필수적인 식량‧기초의료‧기본적인 쉼터와 살 집 혹은 초등교육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그 당사국은 규약상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최소 핵심의무는 해당국의 이용가능한 자원의 양 혹은 어떤 다른 요소와 어려움에 상관없이 적용돼야 한다.


이행불능
13. 국가의 작위 혹은 부작위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침해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할 때, 국가의 무능력과 규약의무를 이행할 의지가 없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통제 밖의 이유로 그 의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국가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인지를 증명해야할 책임이 있다. …

작위에 의한 침해
14.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침해는 국가의 직접적인 행동 혹은 국가의 불충분한 개입에 의해 일어난다. 침해의 예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a. 사람들이 현재 향유하고 있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지속적으로 보장하는데 필요한 법률의 공식적인 폐지 내지는 효력 정지.
b. 법률에 의한 차별 혹은 강제적 차별을 통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것.
c. 제3자가 취한 조치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부합할 수 없는 것임에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
d. 평등을 추구하고 소외집단의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실현을 더욱 증진할 목적 없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와 관련된 현행 법적 의무에 부합하지 않는 제도나 정책을 채택하는 것.
e. 경제‧사회‧문화적 권리가 보장되는 수준을 감소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퇴행적 조치를 채택하는 것.
f. 규약에 의해 보장되는 권리의 점진적 실현을 방해하거나 중단시키는 계산적 행위….
g. 공공재정의 축소 혹은 유용…

부작위를 통한 침해
15.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침해는 국가가 법적 의무로부터 비롯된 필수적 조치를 하지 않을 때도 일어난다. 다음의 것이 그 예다.

b. 규약상의 의무에 명백히 모순되는 법률을 개정하거나 폐지하지 않는 것.

f.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실현을 감독하지 않는 것. 이를테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실현 여부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과 지표를 개발하고 적용하지 않는 것.
g. 규약이 보장하는 권리의 즉각적인 실현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없애는 것이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신속히 그 일을 하지 않는 것.


형사처벌
21.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침해당한 피해자들은 순전히 피해자로서의 그들의 지위 때문에 형사적인 처벌을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홈리스가 되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과 같은 것이 그 중 한예가 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 때문에 처벌받아선 안된다.

구제가 가능케 하는 것
22. 어떤 개인이든 집단이든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침해당한 피해자들은 국내 및 국제적 차원 모두에서 효과적인 사법적 혹은 기타의 적절한 구제조치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권리침해를 공식적으로 용인해서는 안된다.
24. 자신들의 판결이 해당 국가가 국제적 의무를 위반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용인하는 결과를 낳지 않도록 국내 사법부 및 기타 기구들은 주의해야 한다. 최소한 국내 사법부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침해와 관련된 판결을 내릴 때 국제인권법이나 지역인권법의 관련 규정들을 해석의 길잡이로 고려해야 한다.
덧붙임

◎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