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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 약에 대한 또 다른 권리

한국 푸제온과 인도 글리벡 투쟁이 던지는 질문들

2009년 6월 19일 특허청은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Fuzeon)에 대한 환자 및 시민단체들의 강제실시 청구를 기각한다. 특허법 상의 통상실시권 재정 청구, 즉 강제실시 청구는 건국 이래 단 4차례 이뤄졌으나, 1978년 최초의 강제실시 청구만이 인정되었을 뿐이다. 이 중 두 건의 강제실시 청구가 환자·시민 단체들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하나는 국내에서 고가약 논란의 시발점이었던 글리벡(Gleevec)에 대한 청구(2002)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푸제온이다.

특허청의 기각 결정이 발표되기 불과 몇 시간 전, 오전 국가인권위원회(이하 국가인권위) 역시 환자·시민 단체들의 푸제온 강제실시 청구에 대한 의견서를 발표한다. 푸제온의 강제실시를 허용하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국민의 건강권과 생명권 보호를 위한 국가적 의무에도 부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날 발표는 국가인권위 설립 이후 8년 만에, 의약품뿐만 아니라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이슈에 대한 최초의 입장 표명이었다.

지적재산권에 대한 인권적 고찰

국가인권위의 발표는 뒤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2001년 카타르 도하 각료회의에서 『트립스(TRIPs)협정과 공중보건에 관한 선언』이 채택된 이후, 지적재산권과 인권은 서로에게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지적재산권에 대한 비판이 국제적 논의에서 공식화되었고, 이를 기초로 2005년 UN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지적재산권과 인권에 관한 매우 중요한 해석 기준을 발표하는데,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제15조 1항 (c)호에 관한 ‘일반논평(General Comment)’이다. 위원회가 발표한 『일반논평 17』은 지적재산권 제도에서 인정하는 법적권리는 ‘저자의 권리’를 비롯한 기타 인권과는 구별되는 것이며, 주로 기업의 이익과 투자를 보호하는 법적 권리는 일시적이며 철회될 수 있는 것임을 천명한다. 그리고 ‘저자의 권리’에 의하여 보호되는 물질적 이익이란 저자가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과 ‘저자의 권리’는 문화와 과학에 대한 권리 및 다른 인권에 의하여 제한될 수 있음을 언급한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발명의 상업화가 생명권, 건강권 및 사생활보호 등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의 완전한 실현을 위태롭게 할 경우 이러한 발명을 특허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에 반하는 과학적 및 기술적 진보의 이용을 방지하여야” 함을 밝힌다.

1995년 WTO체제 출범과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 발효 이후 누적되어 온, 지적재산권 강화 흐름에 대한 일련의 비판적 논의들 속에 인권은 가장 주목받는 대항 담론이 되었다. 그럼에도 국가인권위가 2009년에 이르러서야, 이런 논의를 공식 표명한 것은 지적재산권 제도에 대한 인권적 고찰이 우리 사회에서는 최근의 일임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초의 의약품 접근권 투쟁으로 기억되는 2002년 글리벡 투쟁과 강제실시 청구, 2006년 한미FTA 저지 투쟁과 2008년 백혈병 치료제인 스프라이셀(Sprycel) 약가 인하 투쟁은 주로 제도적으로 국가에 의한 의약품의 공공성 프로그램의 구축과 실현에 방점을 찍었다. 그러나 재산권이 아닌, 약에 대한 또 다른 권리를 만드는 흐름으로 옮겨가지 못했다.

이를테면, 저작권 강화 흐름에 반대하며 ‘정보문화향유권’과 같은 개념을 구성하는 것은, 이용자들의 권리가 저작권보다 우선하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권리임을 밝히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반면 ‘의약품 접근권’이라는 용어는 의약품 특허에 대한 특허권자의 권리가 법적으로 제한된 영역에서만 반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이익의 개념을 넘어서지 못한다. 하지만, 푸제온 강제실시 청구는 그간의 운동에서 중심이 된 논의와는 다른 내용, 즉 ‘인권’의 이야기를 도입하게 되었다.

공공성에 기반한 접근권 운동의 한계

단순히 접근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심지어 악랄한 자본도 보장해 줄 수 있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환자들은 몇몇 제약 회사들이 무상으로 공급해주는 약을 먹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두고 환자들의 의약품 접근권이 보장되었다고 하지 않는다.

보통 의약품에 대한 접근권 논의는 약의 공공적 성격을 밝혀내려는 노력이 중심이다. 국민건강보험으로 국가가 개인이 지불해야 하는 약값의 일정부분을 부담하거나 혹은 아예 무상으로 공급하는 것, 나아가 의약품의 연구·개발 과정에 대한 세금과 각종 공적 자금을 쏟아 붓는 것은 모두 약의 공공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이러한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특허를 통한 제약회사의 독점 공급과 독점 판매를 건드리지 않는다. 이처럼 제약회사의 이윤율을 적절히 보장해 주는 수준에서 용인되는 의약품의 공공성은 과연 유용한 개념인 것일까? 약의 공공적 성격을 밝히는 것이, “이윤보다 생명(People before Profit)”이라는 의약품 접근권 운동의 오랜 구호와 일맥상통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바로 푸제온이다.

공공성은 정부나 기업이 산간지역에 설치하는 인터넷·전화망처럼 그 효용성이 인정돼야만 보장되는 것이다. 즉, 재화 혹은 서비스는 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하는 유익한 것이어야만 한다. 또한, 공공성은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개인과 사회의 지급 능력에 따라, 수익과 비용의 차이에 따라 보장의 범위와 내용이 달라진다.

이에 따르면 푸제온은 공공성이 없는 약이다. 제한된 국가 재정을 고려하면 제약회사 로슈(Roche)가 원하는 가격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고, 그보다 더 비싼 비용을 치러가며 약을 직접 생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즉, 푸제온은 공공성을 실현하는 주체인 정부와 자본에 제 효용 가치를 밝히기 힘든 약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적재산권의 모순에 대해 저항하면서, 환자들의 생존과 건강을 위해 약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인권이었다. 공공성의 준거점으로 사회적 효용만이 남아버린다면, 오히려 생명과 건강의 권리가 외면될 수도 있다는 것을 푸제온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푸제온은 앞서 일어났던 글리벡, 스프라이셀 접근권 투쟁과는 달리 약가 협상이라는, 공공성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장(場)이 열리지 않아, 활동가들에게 깊은 고민을 주었다. 정부와 자본이 기대조차 하지 않은 푸제온의 사회적 효용이 무엇인지를 활동가들이 증명해야만 했다. 또한, 2008년 12월 23일 푸제온 강제실시 청구 이후, 반년동안 청구인과 피청구인이 주고받은 의견서에서, 국가의 사회 보장 프로그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 쪽은 환자·시민 단체가 아닌 제약회사 로슈였다. 이처럼, 푸제온은 4년이 넘는 공급 중단 사태와 강제실시 청구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약의 공공성이란 개념의 비어있는 부분,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하였다.

물론, 약의 공공적 성격을 밝히는 활동이 유효한 전략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인권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줄 매개 개념으로써 공공성은 필요하다. 비단 의약품 뿐만아니라, 지적재산권에 대한 비판 담론은 모두 지적재산이 사회적 산물임을 밝혀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운동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으며, 푸제온 사태에서 보듯이 국가와 시장을 매개로만 하는 요구와는 다른 ‘결’을 만들어내야 할 경우도 있다.

인도의 글리벡 특허 무효화 운동

2010년 1월 18일 Lawyer collective HIV/AIDS Unit 사무실에서 인도와 한국의 의약품 특허 제도 및 한국의 글리벡, 푸제온 활동에 대해 인도 활동가들과 한국 활동가들이 공유하고 있다. <br />

▲ 2010년 1월 18일 Lawyer collective HIV/AIDS Unit 사무실에서 인도와 한국의 의약품 특허 제도 및 한국의 글리벡, 푸제온 활동에 대해 인도 활동가들과 한국 활동가들이 공유하고 있다.



약의 연구·개발에 투여된 사회의 기여를 밝혀 약의 공공적 특성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공의 산물이 사유화 되는 것을 막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약이 그것을 구매할 능력에 따라 분배되는 것을 막는 것이 운동의 궁극적 목표라면, 약이 시장 메커니즘에 놓여있는 상태를 전복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의약품이라는 공공의 산물이 사유화 되는 과정, 약이 시장 메커니즘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독점 체제에 놓이게 되는 최초의 시발점은 바로 ‘특허화(化)’이다.

특허화에 대한 문제제기가 현재 ‘세계의 약국’이라 불리는 인도에서 진행되고 있다. 바로 글리벡 특허 무효화 운동이다. 2005년 인도의 암환자단체인 CPAA(Cancer Patients Aid Association)와 HIV/AIDS 법률가 단체(Lawyers Collective HIV/AIDS Unit)는 노바티스(Novartis)의 글리벡 독점판매권과 특허에 대한 이의 신청을 하였다. 인도 첸나이 특허청은 2006년 1월 “기존에 알려진 물질에 대해 효능을 개선시키지 않은 채, 단지 그 물질의 새로운 형태를 발견한 것은 발명으로 볼 수 없다”는 인도 특허법 ‘제3조 (d)항’을 근거로 노바티스의 글리벡 특허 출원을 기각하였다. ‘신규성(novelty)’이 없다면 특허를 부여받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 조항은 특허를 이용한 시장 독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특허 남용 행위인 ‘에버그리닝(ever-greening)’ 전략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기존 의약품의 사소한 변형물에 해당하는 의약품에 대해 특허를 인정할 경우, 질이 낮은 특허의 무분별한 양산과 이로 인한 ‘특허의 확장(patent extensions)’ 효과를 야기한다. 그 결과 한 사회의 보건 의료 영역은 공공의 통제에서 벗어나 기업의 이윤 축적 도구로 전락하게 되고, 그 폐단은 고스란히 그 사회의 구성원 특히 빈곤계층과 환자들의 삶을 위협하게 된다. 때문에 인도 특허청의 결정은 인도 내 환자들과 제약 업체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생산되는 약을 먹는 각국의 환자들과 NGO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인도와 한국의 특허 제도의 차이, 그리고 무엇보다 양국의 의약품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의 차이는 분명 무시 못 할 것이지만, 현재 인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글리벡 특허 무효화 소송이 가지는 의미는 분명 되새겨 볼 만하다.

특허화에 대한 문제제기는 약을 둘러싼 권력 관계의 재구성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약에 대해 부여된 유일한 권리인 특허, 즉 소유권을 대신하여 인도의 환자들과 활동가들이 새롭게 채워가려는 권리는 생명과 건강에 대한 권리이다. 기껏해야 유효기간이 20년일 뿐인 권리(특허)에게 눌리지 않고 허락받지 않겠다는, 그리하여 착취당하는 자로서의 정당함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그들의 당당한 외침! 그들과 함께 우리의 운동도 새롭게 구성해 보는 것은 어떨까?

덧붙임

홍지 님은 정보공유연대IPLeft 운영위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