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 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⑨-<1>] 학교 안과 밖, 그 경계에서

<편집인주>1990년대 청소년인권에 대한 문제제기는 2000년대 조직화된 청소년인권운동으로 자리를 잡았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과 같이 ‘인권’을 화두로 한 전국조직의 청소년인권단체가 생겨난 이후 청소년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닫힌 사회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네이스 반대, 종교의 자유, 청소년 노동권, 0교시자율학습 폐지, 18세 선거권, 성소수자 인권 문제 등.

이번 기획에서는 특히 청소년들의 조직적, 주체적 활동이 두드러졌던 네이스 반대 투쟁과 반대로 개인의 활동을 중심으로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 냈던 강의석 씨의 종교의 자유 투쟁을 중심으로 2000년대 초반의 청소년인권운동의 흐름을 짚는다. 더불어 주목할 만한 청소년인권운동의 이슈로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청소년노동인권의 상황도 인터뷰로 듣는다.


2003년과 2004년은 청소년인권운동이 다양한 의제를 제기한 해였다. 네이스 반대, 학교 내 종교의 자유, 강제야자·보충수업 반대, 18세 선거권 쟁취운동과 청소년 노동인권, 청소년 성소수자 문제는 이 시기에 와서 본격적인 문제로 부각된다. 이것은 청소년인권운동에 새로운 의미와 과제를 부여했다. 이 중 가장 큰 관심을 모은 것은 네이스 반대 투쟁과 학교 내 종교의 자유 투쟁이었다. 그것은 다른 투쟁이 아직 청소년 주체의 참여가 미비한 대리적 운동이었던 반면, 두 운동은 청소년 스스로의 자각을 바탕으로 한 주체적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네이스 반대!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인정!

2003년 교육부는 교육정보시스템인 네이스(NEIS)를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지금까지 학교별로 관리해온 학생·학부모의 개인정보를 교육부로 집중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겉으로는 행정의 효율과 사용의 편의를 내세웠지만, 이는 학생과 학부모의 동의절차 없이 정보를 수집·사용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을 침해하는 것이었다. 정부의 일방적 강행과 프라이버시권 침해에 맞서 인권단체들은 단식농성에 나섰고, 전교조는 연가투쟁을 비롯한 강경한 투쟁에 나섰다.

전교조와 교육부 간의 갈등, 정보인권 문제의 제기 등으로 큰 주목을 받은 사안이었는데, 투쟁의 과정에서 청소년들의 주체적 참여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아이두넷’과 ‘전국민주중고등학생연합’, ‘네이스를 반대하는 청소년모임’ 등에서는 네이스 반대 서명운동을 벌였고, ‘청소년의 힘으로’, ‘희망네트워크 작은숲’ 등은 거리캠페인, 연대 집회 등을 통해 네이스 반대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당시 투쟁의 거점이었던 ‘네이스 반대와 정보인권 수호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네이스반대공대위)에서도 앞서 말한 청소년단체들의 이름이 눈에 띈다.

청소년 스스로 반대 의사를 표시한다는 점에서 서명운동도 의의가 컸지만, 무엇보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거리캠페인, 연대 집회와 같은 청소년들의 직접행동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학생의 정치참여를 금지한 학칙 아래서 학생들은 전교조 집회에서 연대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퇴학 협박에 시달리거나, 야자·보충수업을 비롯한 입시지옥 속에서 대학이냐 운동이냐를 강요받아야 했다.

정치참여를 금지한 학칙과 정보제공자의 동의 없는 정보의 수집·이용을 허가한 네이스. 강제적인 야자·보충수업에서 드러나는 개인의 자기시간 통제권 상실과 네이스에서 나타나는 자기정보 통제권 침해. 묘하게 닮은 논리 속에서 네이스 반대 투쟁은 청소년의 권리 문제와 폭넓게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부산지역 동아리연합모임인 ‘희망네트워크 작은숲’ 활동을 했던 박정훈씨는 “네이스 강행의 문제는 청소년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는 어른들의 잘못된 시각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며 "(정보의 주체인) 학생들의 동의를 전혀 묻지 않고 네이스를 실시하는 것은 학교 안에서 학생들의 어떠한 정치적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 데 그 본질적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청소년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네이스를 둘러싼 논쟁구도에서 청소년 당사자의 의견은 배제되었다. 네이스를 찬성하는 단체든 반대하는 단체든 청소년들을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건 똑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스스로의 힘으로 (투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는 박씨의 말은 당시 네이스 투쟁을 바라보는 청소년들의 시각을 잘 드러내 준다. 이러한 생각으로 ‘희망네트워크 작은숲’, ‘청소년의 힘으로’ 등은 10월 경 교육청 앞 전국동시다발 1인 시위를 열기에 이른다.(강릉, 대전, 부산, 서울, 진주, 산청(산청은 도로변))

‘희망네트워크 작은숲’ 소속 활동가의 부산광역시시교육청앞 1인 시위<출처; 오마이뉴스>

▲ ‘희망네트워크 작은숲’ 소속 활동가의 부산광역시시교육청앞 1인 시위<출처; 오마이뉴스>


‘학교 밖에서의 투쟁’

네이스 반대 투쟁은 정보인권의 의제화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청소년들 스스로 자신의 문제임을 자각하고 움직임에 나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분명 자신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보장해‘주어야’ 한다’와 ‘행정의 편이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논쟁구도에서 ‘당사자’의 ‘보장하라’는 주체적 선언은 그 울림이 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자칫 학교 외적 사안으로만 볼 수 있는 문제를 청소년 스스로의 문제와 관련지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네이스의 근본적 문제는 청소년을 하나의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도 인간이다. 우리의 권리를 찾자. 현재 학교와 사회에서 청소년 학생들은 미성숙한 인간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시각 때문에 정치적 권리가 박탈당하는 것은 물론 하나의 인간으로 대접받기도 힘든 상황이다’는 교육청 앞 1인 시위 당시 피켓의 문구는 이러한 네이스 투쟁의 성격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네이스 반대 투쟁은 학교 밖 활동의 활발함을 학교 내의 활동으로 이어가지는 못했다. “네이스 투쟁의 과정에서 학교 내 불복종 운동이 기획되기는 했지만 (학교 내의) 실질적인 흐름으로 이어가지는 못했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정보접근권 등 (학교 내에서) 문제제기할 지점이 많았지만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다”는 당시 ‘청소년의 힘으로’ 활동가 꿈틀이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해체 이후의 모색

네이스 반대 투쟁의 끝은 2000년 이후 산발적으로 생겨났던 자생적 청소년 인권 모임들의 해체와 맞닿아 있다. 네이스 반대 투쟁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청소년의 힘으로’, ‘희망네트워크 작은숲’ 등은 기존 활동가들의 대학입학, 활동가 재생산의 실패, 학교 측의 탄압 등을 이유로 해체되거나 활동이 위축되었다. 몇몇 단체들은 활동을 지속하고 있지만 2000년대 초반과 같은 활력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2004년은 여러모로 새로운 조직의 정비가 모색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 모색의 계기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자생적으로 움터왔다.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2004년 6월 16일 아침 8시 30분경,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기독교계열 사립학교 대광고등학교에서는 ‘낯선’ 목소리가 교내 방송을 타고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시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강의석씨. 그는 종교의 자유가 지켜지지 않는 학교현실을 비판하며, 자신은 강제로 부과되는 예배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다소 격앙된 이 목소리는 100일이 넘게 이어질 학교 내 종교자유를 위한 투쟁의 시작이었다. 동시에 지금껏 ‘예배 때 잠깐 졸고 말면 될 것’, ‘종교계 학교에 왔으니 어쩔 수 없지’라는 순종과 체념 속에 은밀히 내재되어 있던 종교계 사립학교에 대한 불만이 분명한 요구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순간이기도 했다.

당시 대광고는 매주 한 시간씩 예배를 보고, 이 시간에 학생들이 자신의 종교에 상관없이 모두 참석하도록 했다. 또한 매일 아침마다 10분씩 있는 학급별 예배시간에는 ‘기도순서’를 번호순으로 부여해 비기독교 학생들까지도 기독교식으로 기도하도록 했다. 학생회장·부회장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 출석 확인서를 제출해야 하는가 하면 음악 수행평가 과제로 ‘주기도송’이 제시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비단 대광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 236개 종교계 사립학교 가운데 예배 등 종교의식을 가지는 학교가 157개교, 종교의식에 학생을 강제적으로 참여시키는 학교가 30개교로 파악되었다. 학교 측에 전적으로 의존해 제시한 자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비율은 더욱 늘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종교의 자유와 종교교육의 자유는 분명히 분리되는 것이며, 종교교육의 자유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일반적 시선’을 무시한 채 대한민국 종교계 사립학교는 개개인의 종교선택권를 비롯한 종교의 자유를 일방적으로 침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학교 혹은 ‘교육’ 이라는 ‘성역’을 방패삼아. 대광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의석씨의 교내 방송에 대해 학교 측은 ‘건학이념을 훼손하는 행위’라며 전학을 종용했다. 인권보다는 자신들이 말하는 ‘교육’이 우선이라는 논리였다.

이에 맞서 강의석씨는 교육청 앞 1인 시위를 진행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학교 내 종교자유를 지지하는 사람들 또한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해 ‘미션스쿨종교자유 다음카페’, ‘청소년 모임 ROY(Right of Youth)’, ‘강의석군 부당징계 저지와 학내 종교자유를 위한 연대회의’가 꾸려진다. 그러나 연이은 1인 시위와 항의 기자회견에도 학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투쟁이 시작된지 20여일 만에 학교 측이 내놓은 것은 강의석씨가 제적 처리되었다는 통보였다. 이때부터 대광고 사태는 특정 종교의식 강요에 대한 국가인권위 진정, 퇴학처분효력정지 및 지위보전 가처분신청 등 법정 싸움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무려 45일에 걸친 강의석씨의 단식이 시작되었다. 단식 이후 여론의 주목을 받으며 상황은 급반전되었고, 결국 단식 46일째 학교 측은 ‘강제적으로 실시되는 예배를 중단하고 학생들에게 예배 참석의 자율권을 준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여전히 ‘예배선택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교목실장, 담임교사와의 상담 및 학부모 동의를 얻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부분적인 승리인 것은 확실했다. 연이어 법원에서도 퇴학처분무효를 받아냈다.

종교자유를 위한 학생모임 주최 학교 내 종교자유를 위한 선언식<출처; 1318바이러스>

▲ 종교자유를 위한 학생모임 주최 학교 내 종교자유를 위한 선언식<출처; 1318바이러스>


‘학교에서의 저항’

종교의 자유 투쟁은 지금껏 단순한 ‘불만’ 정도로 인식되었던 특정 사학의 부당한 종교의 자유 침해를 ‘언어화’시키고 그것을 정치 의제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동시에 강의석씨의 “(종교의 자유 투쟁의) 성과는 잘못된 것이 있다면 학생들도 사회를 향해 말할 수 있다는 이미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라는 말이 의미하듯, 청소년들의 자발적 저항을 다시 환기시켰다는 데에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기존 조직들이 여건상 놓치고 있었던 ‘학교 내 저항’의 단서를 제공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기존의 교육청 혹은 교육부에 서명을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불복종을 통한 학교와의 끈질긴 싸움은 청소년인권운동의 새로운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강하게 각인시켰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 투쟁은 ‘강의석’ 이라는 1인에 강하게 의존함으로써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진다. 미리 준비된 계획이나 조직의 부재는 대광고는 변화시킬 수 있었지만 전국에 산재해 있는 여러 종교계 사립학교들의 변화까지 이끌어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투쟁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려는 국토대장정이 시도되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여기에는 네이스 반대 투쟁 이후 여러 청소년인권운동단체들의 활동이 위축되었던 것도 큰 몫을 했다.

남겨진 과제

네이스 반대 투쟁과 종교의 자유 투쟁은 청소년인권운동이 가지고 있던 한계를 강하게 부각시키며, 이후 새로운 모색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억될 수 있다. 네이스 반대 투쟁이 그 조직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학교’와의 직접적 싸움을 벌이지 못하며 학교 내 변화를 담보해내지 못했다면, 종교의 자유 투쟁은 ‘학교’와의 직접적 싸움을 통해 실질적 변화를 얻어냈지만 운동의 자생성을 이을 수 있는 조직적 기반이 취약했다. 결국 ‘학교’와의 직접적 싸움을 조직적 차원에서 어떻게 벌여낼 것인가가 이후 운동의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덧붙임

므스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