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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⑧] ‘재량권 춤추는 사립학교’, 이제 그만!

사학 비리에 저항한 학생과 교사들

불의와 억압의 공간

2007년 1월, 포항의 대동중학교(동인교육재단)에서 한 교사가 해임 당했다. 학교 측이 내세운 해임 사유는 그 교사가 △방과 후 특기적성교육을 학생들에게 강제로 시키지 않았고 △두발 등의 교칙을 거부하라고 했으며 △강제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민주적 인사위원회 구성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해임 당한 손규한 교사는 지금 학교와 재단을 상대로 복직을 요구하며 천막 농성 중이다. 학생인권과 자치를 옹호하고 민주적인 학교 운영을 요구한 교사가 쫓겨나는 곳이 바로 사립학교이다.

사립학교(사학)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공립학교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사학은 공립학교에 비해 더 폐쇄적이며, 담당 교육청을 비롯한 정부의 관리감독과도 거리가 멀다. 학생·교사에게 가하는 사학의 억압은 때론 ‘횡포’라 불러야 할 정도다. 실제로 대동중 사건에 대해서도 경북도교육청은 사학의 재량이므로 간섭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비민주적인 학교 운영뿐만 아니라 비리 또한 끊이지 않는 사학의 문제이다. 수학여행, 졸업앨범, 보충수업비, 방송교재 등등으로 수십 수백억을 횡령하는 사학부터 최근에는 ‘유령직원’을 명단을 올려 월급을 착복하는 사학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사돈의 팔촌까지 이사부터 경비를 맡는 가내 사업이 되어도 당당한 게 사학이다. 이런 사학의 문제에 귀를 기울이도록 했던 것은 무엇보다 사회를 향한 학생과 교사의 외침이었다.

뜨거운 저항, 인천외고

교감과 교장의 자진사퇴를 요구하는 것이나, “학생인권 존중이 교사인권 존중” 등의 글씨들이 창문과 벽에 써있는 당시 인천외고의 모습.

▲ 교감과 교장의 자진사퇴를 요구하는 것이나, “학생인권 존중이 교사인권 존중” 등의 글씨들이 창문과 벽에 써있는 당시 인천외고의 모습.

2004년 인천외고 사건 역시 사학의 막무가내 횡포가 기세를 떨친 기록적인 사건 중 하나다. 발단은 2003년 새로운 교장이 부임하면서부터였다. 교장은 직원회의를 직원조회로 바꾸면서 교사들의 발언권을 제한하고, ‘경고장’을 남발하는 등 학교 운영에서 독단을 일삼았다. 학생들에 대한 억압도 강화돼 수업시작 시간 앞당기기, 전원강제야자 실시, 두발규제 강화, 외출제한, 벌점제와 유급제 등이 도입되었다. 학생들에게는 숨 막히는 학교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2004년 4월 24일, 교장과 학교 운영이나 학생 지도 등의 문제를 두고 마찰을 빚어왔던 전교조 박춘배 교사와 이주용 교사가 파면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학생들의 불만은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노현성 씨(2005년 당시 인천외고 2학년. 공동대책위원회 대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이 교장에게 불만이 있었는데, 인권탄압 쪽으로 점점 터져 나온 거다. 한마디로 학교에서는 아무 것도 못했다. 기계처럼 공부하고 수업 듣고 수업 듣고 또 수업 듣고…학생들이 막 미치려고 그랬다. … 선생님이 파면당한 게 4월 24일인데 그 전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 선생님들이 바로 월요일 교장실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아이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인천외고의 “생활지도 점수제에 의한 벌점 기준”. 누적되어 100점이 되면 퇴학이다. 용의복장 규제와 같은 것에서부터 동성애를 비롯한 연애에 대한 규제까지 각양각색의 인권침해 조항들이 눈에 띈다.

▲ 인천외고의 “생활지도 점수제에 의한 벌점 기준”. 누적되어 100점이 되면 퇴학이다. 용의복장 규제와 같은 것에서부터 동성애를 비롯한 연애에 대한 규제까지 각양각색의 인권침해 조항들이 눈에 띈다.



학생들은 교복을 찢어 쓴 혈서를 교장실 앞에 걸어놓기도 하고, 교사들의 복도수업에 참가하거나 교장실 앞에서 집회를 하는 등 농성에 지지를 보냈다. 그러다가 결국 6월 4일부터는 600여 명의 학생들이 수업거부를 시작했다. 수업거부를 시작한 정황에 대해 노현성 씨는 “40일 동안 계속 점심시간마다 집회하고 촛불집회도 했는데 들은 척도 안하고, 학생들의 의견을 모아서 3~4번 갔었는데 다 무시했다. 안 되겠다, 학생들도 힘들어하고…이건 아니다 싶었고,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업거부를 6월 7일부터 했다.”라고 설명한다.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 방문했을 때 피켓을 들고 집회를 하고 있는 학생들. “학생은 쓰레기가 아니라 학교의 주인이다” “교사와는 대화 거절 학생에겐 인권무시 학교측은 각성하라” “인권 없는 인천외고 우리들이 바로잡자” 등의 구호가 눈에 띈다.

▲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 방문했을 때 피켓을 들고 집회를 하고 있는 학생들. “학생은 쓰레기가 아니라 학교의 주인이다” “교사와는 대화 거절 학생에겐 인권무시 학교측은 각성하라” “인권 없는 인천외고 우리들이 바로잡자” 등의 구호가 눈에 띈다.

업무방해 소송, 전교조 사주라는 매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한 100일에 가까운 기간 동안 교육청, 교육부, 학교, 서울에 있는 이사장의 집까지 찾아가 항의집회를 열었다. 교장해임과 교사 파면 철회를 요구하는 삭발과 단식이 이어지고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사학 측에서 ‘교장 해임과 파면철회’ 불가를 고집하면서 상황은 장기화조짐을 보였다. 교육청에서 교장해임을 사학 측에 요구했지만, 사학에서는 교장을 같은 재단의 다른 고등학교로 전근시켜 일단락지었다. 인천외고 사태의 주범인 교장이 바로 옆 학교인 명신여고로 전근가면서 마무리된 것이다. 감독기관인 교육청도 손 쓸 수 없는 사학의 높고 높은 벽을 확인케 한다.

사학 투쟁, 그 긴 역사

사학을 상대로 한 학생들의 투쟁 역사는 인천외고 이전에도 꽤 오래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003년, 용화여고 사건이나 94,99년 상문고 사건도 그중 하나이다. 특히 상문고 사건은 당시 단군 이래 최대 사학비리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였다. 상문고 사건은 학교 교사들이 친인척들로 구성된 이사회의 각종 비리들을 폭로하면서 시작되었다. 찬조금 착복, 과학 기자재 및 도서 위장 구입, 수학여행 여행사·졸업앨범·체육복 업체와 결탁하여 뇌물 수수, 없는 교내 행사를 있는 것처럼 위장하여 행사비 착복 등, 수백 억 횡령 혐의로 상춘식 교장이 구속되면서 마무리됐다. 하지만 2000년, 이우자(상춘식의 처) 씨가 현행법 상 하자가 없다며 다시 학교 복귀를 시도하여 2차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들과 교사들의 끈질긴 싸움 끝에 관선이사파견으로 매듭지어졌지만, 2년여의 지리한 싸움 끝에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기도 했다.

파주여종고 사건 당시 규탄대회 장면.

▲ 파주여종고 사건 당시 규탄대회 장면.

사학투쟁이 90년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록으로 보면 1987년 파주여자종합고등학교에서는 사학비리와 사학재단의 횡포에 교사·학생이 7월 1일부터 학교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시위는 3일까지 이어졌다. 당시 학교 측에서는 시위를 진압하면서 각목과 가죽혁대를 휘둘렀다. 특히 시위가 진행되면서 일부 여학생들이 교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곧 ‘폭력교사, 성폭행 교사의 처벌과 비리 이사진 퇴진’ 등을 요구하는 농성이 50여 일 동안 계속되었다. 파주여종고 농성은 최초로 학교 내 성폭력에 대항한 싸움으로 기록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2005년 사학법 개정은 사학의 비리와 비민주적 운영으로 인한 인권침해에 저항하는 학생·교사들의 끈질긴 투쟁이 만들어 낸 성과이기도 하다. 미흡하지만 개방형 이사제와 친인척 이사 선임 제한, 비리 당사자 학교복귀 금지 등의 내용을 담은 개정 법안은 그동안 폭로된 사립학교의 횡포를 거울삼은 것이다. 긴 세월에 걸친 싸움이 진일보를 일궈낸 셈이다.

권리와 정의를 위한 저항

사립학교는 무엇보다 통제 불가능한 ‘성격’상 학생의 인권침해나 억압이 더 수월하게 작동할 수 있다. 비민주적 학교 운영과 비리 역시 학교의 ‘재량’이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고질적 사립학교의 문제를 제기한 것도 바로 개별 학교의 사례들이고, 학생과 교사들의 끈질긴 투쟁이 사립학교의 장벽을 직시하도록 만들었다. ‘옳은 것’을 가르쳐야 할 교육 현장이 비리와 불의로 얼룩진 공간이 되는 현실에 대한 학생들의 정의로움이 사립학교투쟁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1990년대 초 고등학교에서 학교 비리를 언급한 학생소식지인 <감초들의 이야기>를 만들었던 김진숙 씨는 학생들이 사학투쟁에 나서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청소년 시절은 정서적으로 예민하기도 하고 정의롭고 순수한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나 같은 경우에도 잘못된 학교의 모습을 보며 많이 갈등했던 것 같다. 꾹 참고 모른 척하며 버티고 졸업하려는 생각도 있었고 학교와 선생님이 너무나 크고 거대하게 느껴져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불의를 보고 지금 참는다면 어른이 돼서도 힘없이 순응하며 살아갈 것만 같아서 나서게 되었다. … 흔히 나이가 어려서 사리판단을 감정에 치우쳐서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옳고 그른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 청소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 물론 학교 측에서는 학생들이 나서는 것을 제일로 두려워한다. … 어른들의 더러운 모습과 이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너무 일찍 목격하게 되는 것 같아서 마음 아픈 점도 없지 않았지만 내가 학창시절 불의와 맞서서 싸웠던 것이 인생의 힘이 되는 것처럼 다른 친구들에게도 그러리라 생각된다.”
덧붙임

유윤종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