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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⑦] 청소년인권운동의 지평을 넓히다

새천년을 맞이할 즈음, 입시체제를 근간으로 학생들을 획일적으로 억압하려는 기제들은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당시 청소년들의 탈학교, 일탈, 수업거부는 뜬금없는 신세대의 문화가 아니라 1980년대부터 이어진 억압에 대한 분출이었고, 마침내 그들의 저항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학교현장의 모습은 ‘학교붕괴’라는 선정적인 타이틀로 미디어에 의해 보도되고 사회는 ‘갑작스레 변해버린 애들’이 문제인양 호들갑을 떨었다. 이내 이런저런 해법 등이 정부와 민간영역에서 쏟아져 나왔다. 현상에 대해 문화담론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 의해 하자센터(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와 미지센터가 만들어진 것도 이 때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모이던 청소년들에게 오프라인 소통공간이 마련되었다는 데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청소년들의 폭발적인 목소리는 역시 온라인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인터넷으로 모여!

컴퓨터(PC)통신에 이어 인터넷은 청소년들에게 숨 막히는 학교에서 해방될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었고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사회, 권력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청소년들 자신의 발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이었기 때문이다. 또 인터넷 상에서 비판의 성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청소년들은 사회, 학교 모든 통제와 억압에 대해 비판할 수 있었다. 채널 텐, 사이버유스(CyberYouth), 청소년인권동아리 타래 등이 당시 만들어진 공간이다. 사이버유스에서 청소년들은 성, 자퇴, 교실붕괴 등 다양한 섹션을 구성해 토론할 수 있었다. 또 조금씩 퍼져나가던 청소년인권도 이야기되었다. 만 18세 선거권, 청소년 아르바이트 노동인권 문제 등 현실과 결부된 이슈들이 오가며 청소년들은 점차 고양되어 갔다.

한편, 1990년대 PC통신에서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모았던 학복회도 2000년 들어 새로운 조직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최우주 씨 헌법소원과 관련해 학생인권 논의를 이끌어가던 학복회는 1998년, 1999년에 들어서며 침체기를 겪는다. 전반적인 침체기 속에서도 학복회의 방향을 바꾸는 흥미로운 논쟁이 나우누리 학복회에서 촉발된다. 그 논쟁은 학복회가 비판하던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소규모밖에 참여할 수 없는 동아리식의 활동을 벗어나는 대중적인 중고등학생조직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과 현재의 유료통신망을 벗어나 새로운 틀로 등장한 인터넷으로 기반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결국 ‘업그레이드(upgrade) 학복회’가 탄생하게 된다. 업그레이드 학복회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대중적 조직방향을 논의하던 활동가들은 2000년대 초 그 구체적인 조직인 ‘전국중고등학생연합(준)’을 탄생시킨다.

두발자유화 운동, 서막이 오르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활동한 청소년운동 단체들 홈페이지 첫화면

▲ 인터넷을 중심으로 활동한 청소년운동 단체들 홈페이지 첫화면

“한 고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을 데리고 세계 각지의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외국 청소년들은 다른 나라 아이들과 같이 앉아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물어보곤 했지만 유독 우리나라 학생들은 자기들끼리만 같이 앉아 이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고 합니다. 똑같은 교복, 똑같은 3cm 스포츠형 머리로 나온 학생은 창피하게도 대한민국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1999년 5월, 어느 현직 교사가 나우누리에 올린 글이 인터넷웹진에 실리면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이 글은 학기 초 학교의 두발단속 때문에 쌓여가던 학생들의 분노를 자극했고, 마침내 아이두, 채널 텐, 사이버유스가 모인 웹연대 ‘위드’에서 두발제한반대 서명게시판이 만들어지게 된다.

2000년 봄, 학생들의 폭발적인 호응과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 속에 두발제한반대 서명운동은 16만 명을 돌파한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진 운동은 오프라인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준)(아래 학생연합(준))을 중심으로 캠페인과 거리집회가 열리게 되었다. 두발제한반대 서명운동은 그동안 참아온 학생들의 분노를 연쇄적으로 자극했고, 구체적 청소년인권 사안에 학생들 스스로가 폭발적으로 집중한 사례였다. 당시 아이두에서 활동한 이준행 씨는 이러한 온라인 서명운동에 대해 “새로운 형태의 운동을 제시했다는 것이 그 의의”라며 “(아이두와 같은 공간이) 두발문제에 있어 투쟁의 장을 제공한 것”이라고 말한다.

두발자율? 두발자유!

2000년 두발제한반대운동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거대한 움직임 속에서 견해가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온라인 서명운동을 이끌었던 웹연대 위드의 입장은 ‘학생 인권을 침해하는 두발제한 제도에 대해 교육부가 직접 "자율화"를 지시하고 자유화의 기준(염색 금지, 완화 강도)에 대해 학생회 - 학교간의 민주적인 절차를 통한 합의를 지시하여 합리적인 학칙 제정을 도와주십시오’였다. 즉,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인권으로서의 두발 자유화가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규정을 결정하도록 하는 자율화를 요구했다. 이같은 요구 사항에 대해 당시 웹연대 위드의 대표였던 박준표 씨는 “(당시엔) 소통의 공간, 토론의 장을 중요시했다. 학교가 그렇게 비상식적일 수 있는 현실에 대한 원인으로 학내 소통이 없다는 데서 찾았기 때문에 서로 소통하고 토론하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두발제한반대운동이 단순히 두발제한만 없애고 끝날 일이냐……. 소통의 공간을 만들면 그 소통의 공간이 진화하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반면, 학생연합(준)의 경우에는 운동 초기부터 두발자유화로 입장을 강하게 밀고 나갔다. 학생연합의 공동대표를 맡았던 육이은 씨는 “토론을 통해서 '두발자유화'로 정리가 됐다. 학생연합 입장은 인권과 관계된 것은 설사 민주적인 합의를 거치더라도 제한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학생회 혹은 학생사회가 민주적이지 않은 가운데 그나마 두발자율화도 제대로 되겠냐는 생각이었다.”라고 당시 입장에 대해 말했다.

이런 논란 속에 실제로 교육당국이 택한 ‘자율화’의 실체는 민주주의를 가장한 인권침해였다. 서명을 모아 제출한 집단민원에 대해 교육인적자원부는 2000년 10월 4일, “각급 학교별로 교사·학부모·학생 대표가 참가하는 토론회를 열어 두발규정을 다시 정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학생, 학부모, 교사가 서로 상의하여 결정한다는 것은 일면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결정해야할 신체 즉, 사적인 문제를 소위 공적인 영역으로 옮겨 타인들과 함께 결정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는 인권의 기준과 어긋난 것이었고, 민주주의를 가장한 기만적 지침이었다. 뿐만 아니라 학교 안에서 학생의 불평등한 권력지위를 염두에 둔다면 토론의 결과는 두말 할 나위도 없었다. 교육당국의 책임회피용 지침을 기점으로 2000년 두발제한반대운동이 소강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중고생이 운동을?

비록 실질적으로 두발자유화를 이룬 학교 수는 적었지만, 청소년 스스로 ‘자유화-자율화’의 논쟁, 서명조직, 캠페인 등을 주도하면서 인권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과 운동의 확산을 모색했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또 두발제한반대운동은 학생연합(준)과 같은 청소년인권운동 조직을 성장케 했다. 초기 5~6명의 회원으로 시작했던 학생연합(준)은 두발자유화운동 속에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광주, 부산, 목포 등 각 지역에서 지부가 만들어졌고, 가장 활발하던 시기에는 오프라인 활동을 하는 회원이 200여 명에 육박할 정도였다. 학생연합(준)은 초기에 계획했던 학교 인권지표 개발, 미지센터 내 청소년 인권센터 운영 등의 사업을 지속해 나가면서 2000년 12월 22일, ‘학생인권과 교육개혁을 위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이하 학생연합)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출범을 하게 된다.

"교육개혁 우리 손으로"(문화일보), "막강파워 ‘운동권 중·고생’ 떴다"(주간동아) 등 학생연합의 출범에 언론들은 집중적인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런 관심 속에서도 교육당국은 학생들의 목소리를 막기 위해 학생연합 활동가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특히 학생연합의 광주지부의 경우 언론의 집중적인 보도를 받을 만큼 학교와 교육청의 탄압이 극심했는데 당시 지부 대표자였던 박고형준 씨는 “학교에서는 작게는 교내봉사, 크게는 퇴학, 자퇴종용을 했다”고 말한다. 박고형준 씨는 “장학사가 집전화로 동생에게도 피해를 주겠다는 전화를 한다든가, 0교시부터 8교시까지 수업은커녕 면담만 몇 달 동안 했던 것, 경찰서도 아닌데 수사를 하듯 사실확인서만 몇십 장을 쓴 것 등 청소년 인권을 본격적으로 얘기하기도 전에,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부터 제한을 받으며 인권침해를 받았다”며 “당시 청소년 인권의 현실이었다”고 전한다.

이런 탄압 속에서도 학생연합은 지회-지부-중앙으로 이루어지는 조직체계를 구성하고 그 체계의 가장 바탕이 되는 학교 속 지회 건설을 위해 역량을 쏟았다. 지회의 중요성은 학생연합이 두발자유운동 속에서 얻은 교훈이기도 했다. 인터넷과 언론을 통한 여론몰이로는 학교를 바꿀 수 없다는 것. 학생연합은 두발자유화운동 외에도 교육부문까지 의제를 설정해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체벌반대, 학교운영위원회의 학생참여 보장, 고교등급제반대, 자립형사립고반대 등이 그것이다. 또 학생연합은 학복회가 추진했던 회원들의 세미나, 간행물 발행을 일상적인 사업으로 추진하고, 기획 사업으로 교칙분석작업, 학생회운영 방안 연구 등을 진행했다.

사라지지 않는 운동

2002년 들어서면서 학생연합은 안정된 지지기반을 가지지 못하면서 활동가 부재라는 어려움에 봉착해 점차 활동력을 잃게 된다. 학생연합이 지속될 수 없었던 원인에 대해 육이은 씨는 “조직 운영에 대한 경험과 노하우가 축적되지 못했던 것이 주요한 문제였다”고 꼬집으면서 중고등학생 이외의 참여를 원천적으로 배제한 ‘피터팬주의’ 역시 학생연합의 생명력을 짧게 만드는데 일조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육이은 씨는 “90년대 들어서 가장 큰 활동력을 지녔던 자생적 청소년 조직이라는 것 외에도 학복회가 부각시킨 청소년 인권 문제를 사회쟁점화 시켰고, 청소년 운동에 대중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킨 점”을 학생연합의 의미로 꼽았다. 육이은 씨는 “학생연합의 활동이 거의 없던 2002년 이후의 일인데, 길을 지나가다 어느 여고생들이 청소년 인권 문제로 가판을 열고 서명을 받는 걸 봤다. 고등학생들이 프린트한 글 중에는 제 글도 있고 학연에서 쓰던 전단지도 있었는데 그것을 보면서, 모임이 없어진다고 활동했던 역사가 그냥 의미 없이 사라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2000년대 초반에 펼쳐진 두발제한반대 서명운동과 학생연합의 활동은 기성세대에 대한 강력한 경고였다. 더 이상 청소년들이 통제되어야하고 관리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권리의 주체라는 것을 다수의 행동 속에서 알린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 경험들은 이후 인권을 외치는 풀뿌리 모임으로 다시 태어나 2003년 네이스 투쟁, 2005년 두발자유화운동, 2006년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덧붙임

전누리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