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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청소년 인권운동, 길을 묻다 ④] 공안탄압 속에서 청소년 인권운동으로

공안탄압, 정점에서 맞이한 위기

거센 탄압 속에서

1980년대 중반부터 일어나기 시작해 1989년 정점을 이루었던 청소년들의 저항은 1990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부와 학교의 탄압은 끈질겼고, 청소년들의 징계철회 투쟁으로도 그것들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학생회와 동아리에 대한 일상적 탄압이 가해졌다. 학생회실이 없어지고 동아리가 해체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학생회와 동아리뿐 아니라 학교 안의 소모임들도 점점 위축되어 갔다. 박명희 씨(‘참배움일꾼청소년회’ 활동)는 1991년부터 1994년 사이 이루어진 청소년 활동에 대한 탄압을 이렇게 회상했다. “동아리든 소모임이든 이어나가려고 했지만 그 영향력이 해가 갈수록 줄어들게 됐다. 주도적인 학생들이 졸업하고 학교에서는 다시는 그런 학생들이 나오지 않도록 하려고 경계하며 학생들의 활동을 축소하고 규제했다. 학교의 규제는 강했고, 남아 있던 학생들로서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김수경 열사<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김수경 열사<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계속되는 탄압의 결과 1990년 당시 김수경 씨(대구 경화여고 3년)가 자살이라는 최후의 저항 방법을 택하는 가슴 아픈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김수경 씨는 전교조 교사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교사들에게 상습적으로 맞기도 하고 욕설을 듣기도 하다가 결국 유서를 남긴 채 투신했다.

새로운 길을 찾아

억압 속에서도 참교육 운동 등을 경험하면서 사회와 교육 문제에 눈뜨게 된 청소년들은 잘못된 현실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길을 모색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중고등학생 활동가들은 더 튼튼한 조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그 결과 탄압을 피한 비공개 조직들이나 네트워크가 구축된 곳도 있었다.

구로고등학교의 경우, 1990년에 동아리연합회를 만들려고 시도하기도 했고, 학생회 임원 성적 제한 규정에 불복하고 학생회를 건설, 학교의 불승인에도 불구하고 학생회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에 대해 당시 구로고에서 활동했던 고영국 씨(‘샘’ 활동)는 1989년의 운동 흐름이 1991년에는 제도적인 것을 세우려는 노력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구로고에서 활동하던 청소년들은 보충수업비를 선생님들이 부당하게 갈취하고 있음을 화장실에 크게 적어놓으며 보충수업 반대 운동을 벌이는 한편, 각 반을 돌면서 수입개방반대 운동을 벌이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93년 서울 강남 쪽의 여학교들에서는 시험일정 변경, 두발자율화, 강제 자율학습 폐지, 강제 보충수업 폐지 등을 요구하며 농성과 시위를 벌여 학교 측의 양보를 얻어내기도 했다.

중고등학생들의 활동은 학교 밖, 거리에서도 이루어졌다. 1991년 5월 강경대 열사 관련 시위 현장에도, 그리고 참교육과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한 김철수 열사 추모 시위에도 고등학생들은 각 단체 단위로, 그리고 학교 단위로 깃발을 들고 참가했다. 강경대 열사 시위 때는 1천 명 정도의 청소년들이 참여하여 정리집회를 따로 갖는 모습을 보였다. 1992년에는 18세 선거권을 주장한 ‘민중대통령과 함께 하는 고등학생 선거대책위원회 준비모임’이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 안 활동들이 1989년처럼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학교 안에서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고등학생운동을 하다가 졸업한 사람들은 학교 밖에 지역조직의 성격을 띤 청소년단체를 만들어 청소년활동가들을 계속 만들어내면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 했다. 서울 쪽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이 1991년 관악지역에 만들어진 ‘참배움일꾼청소년회(참일청)’였다. 참일청은 주로 1989년을 전후하여 참교육운동에 참여했던 청소년들이 모인 단체였다. 참일청에 이어 ‘푸른벗’, ‘청소년회 샘’, ‘희망’, ‘나눔터’와 같은 단체들이 생겨났다. 인천의 ‘내일’, 대전 ‘청춘’, 대구 ‘우리세상’ 등도 모두 1989년 ‘참교육세대’들이 만든 단체였다.

이런 지역 단체들은 주로 청소년들의 문화활동과 자치활동을 지원하고 육성하면서 청소년들을 모으고 활동을 벌였다. 참일청과 같은 경우도 그 모체는 1990년의 ‘청소년문화마당’이었으며, 주요 활동도 모꼬지나 풍물, 만화 등의 문화 분반 활동들로 채워졌다. 청소년회 샘도 그 출발은 ‘청소년 민족문화 연구회’였으며, 분반활동으로 택견, 탈․풍물, 농구, 연극, 노래, 영화감상 등을 운영했다. 청소년들은 그러한 문화활동이나 샘의 “얼다지기” 같은 수련회 등을 통해 청소년단체들에 모여들었고, 나아가 수입개방반대 거리집회나 통일 노래 한마당, 학생의 날 행사나 4.19 행사 등에도 함께하기도 했다.

이처럼 1990년대에 새로 생긴 문화 자치활동 중심의 지역 단체들은 과거 흥사단이나 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총연맹(KSCM) 같은 단체들이 맡았던 청소년들을 모으고 문제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 무렵 흥사단이나 KSCM 같은 단체들은 청소년들의 참여가 줄어들어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94년 흥사단에서 연 학생의 날 행사 때는 100명의 청소년이 모여서, 1980년대보다 축소된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권혜진 씨(흥사단에서 활동)는 이에 대해 “90년대 초반 생겨난 댄스나 락, 미디어 등에 대한 다양한 욕구들을 수용하는 조직이 되었어야 했는데 이론과 이념 중심의 단체 모습에서 헤어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무기가 없었던 것이다. 풍물이나 기타, 노래 등(에 눈을 돌려야 했다.)… 90년대 초반은 이런 혼란기에 있었던 것 같다.”라고 돌아봤다. 흥사단과 달리 참일청, 샘과 같은 지역 청소년단체들은 문화 활동을 통해 청소년들과 만날 수 있는 좀 더 폭넓은 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당시 샘에 참가했던 청소년들 가운데 일부가 탈과 풍물 등을 배우기 위해 처음에 단체에 들어왔다가, 쉬는 시간에 수입개방 문제 등 정치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새롭게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증언한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문화 활동 자체만으로는 학벌과 경쟁교육, 학교 안의 위계와 인권침해 등 당시 청소년들이 처한 교육적, 사회적 억압에 직접 다가서지 못한다는 한계도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일부 청소년들은 샘과 같은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학교 안에서 자신이 당하는 부당한 모습들에도 눈을 돌려 자생적으로 학교 안 활동을 시도하기도 했다. 고영국 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94년 초까지 세가 많이 늘어났다. 영등포 지역에 있으면서 일정한 성과를 올렸다. 한 200명 정도 되었던 거 같다, 왔다간 친구들이. … 우리 단체 안에서 자란 애들이 학교 안으로 눈을 돌렸다. 유인물 돌리고. 그래서 몇 개 학교에서 사건이 터지기 시작했다. 징계 받을 뻔해서 우리가 가서 학교랑 싸워서 없던 일로 한 적도 있다.”

고교에 주사파 침투?

1994년 9월 9일자 동아일보. “고교에 주사파침투”라는 큰 표제가 눈에 띈다.

▲ 1994년 9월 9일자 동아일보. “고교에 주사파침투”라는 큰 표제가 눈에 띈다.

학교나 정부가 이러한 활동들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 특히 1994년은 김일성 주석이 죽은 해로, 대대적인 공안정국이 조성된 때였다.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죽고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되자, 서강대 박홍 총장이 한국에 주체사상파(주사파)가 침투해있다는 색깔몰이에 나섰고, 그전까지 멀쩡하게 잘 팔리던 책인 대학교재 『한국사회의 이해』와 같은 책이 이적표현물로 기소되고 범민련, 한총련 등이 전면 수사를 받는 등, 이른바 마구잡이 ‘주사파 사냥’이 벌어졌다.

‘주사파 사냥’ 바람은 청소년들도 비켜가지 않았다. 1994년 8월, 고등학생들이 만드는 잡지 『새날열기』에 「올바른 통일운동의 방향과 목표」라는 글을 실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편집장 정동익 씨를 조사했고 그 글을 투고한 민중정치연합 이미연 씨를 연행했다.

동일여고 학생들이 찍은 신문 ‘감초들의 이야기’. 특히 “고발합니다” 코너가 학교의 심기를 거슬렀다고 한다. 샘 사건에 연루되어 ‘감초들의 이야기’를 만든 학생들이 징계를 받았다.

▲ 동일여고 학생들이 찍은 신문 ‘감초들의 이야기’. 특히 “고발합니다” 코너가 학교의 심기를 거슬렀다고 한다. 샘 사건에 연루되어 ‘감초들의 이야기’를 만든 학생들이 징계를 받았다.

본격적인 청소년 공안사건은 바로 1994년 9월의 ‘샘 사건’이었다. 경찰은 고등학생들에게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고등학생들을 불법시위에 동원한 “주사파 조직 ‘샘’”의 구성원들을 검거하여 기소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회장이었던 고영국 씨와 김용우 씨, 문영기 씨를 구속했고 추교준 씨 등 6명을 불구속 입건했으며, 부회장 최은철 씨 등 2명을 수배했다. 이 사건으로 동일여고, 영등포여상을 비롯하여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교육부는 9월 10일 “고교생에 대한 의식화 예방 특별지도대책”을 시도교육청에 시달하여 각 학교에서는 동아리 학생들에 대한 감시 강화, 유인물 살포에 대한 강력한 단속이 전개되었다.

샘 사건으로 조사 받은 청소년들은 수사관들에 의해 주체사상을 교육 받았다고 쓸 것을 강요당했고, 또 수사관이 지정하는 책을 읽었다고 받아 적으라고 요구받기도 했다. 그리고 샘에서 주최한 장기수 초청 강연에서 김일성이 나뭇잎을 타고 강을 건넜다는 교육을 받았다는 내용의 진술서를 작성하라고 하거나, 샘 안에 택견 분반을 체제 전복을 위한 무장조직으로 기록하는 등 코미디에 가까운 조작 수사가 벌어졌다. 샘 사건은 동일여고에서 학교비리를 담은 기사를 실은 신문 『감초들의 이야기』를 탄압하는 것으로 연결되는 등 계속 번져갔다. 그리고 인권침해 논란에도 불구하고 샘 구속자 3명은 공소 제기되어, ‘이적단체 구성’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적표현물 소지 및 탐독’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샘 사건을 터뜨린 것에는 분명 청소년단체들의 활동을 막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고영국 씨는 당시 뭔가 사건이 터질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 200명 정도 친구들이 왔다가고, 학교 안에서 사건도 나고 수입개방 반대 집회 참가했다가 잡혀가고…. 그래서 경찰에서 조사가 들어가고 있었다. 미행도 많이 붙어있었고.” 정부는 샘을 비롯한 지역 청소년단체 활동이 고등학생 운동을 계속 만들어내고 문제를 일으키자 이를 일소시키기 위해 공안정국을 이용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여기에는 공안정국을 더욱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도 숨어있었다. 당시 샘 사건은 “고교에 주사파 침투”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으며, ‘주사파 사냥’ 분위기를 강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청소년회 ‘샘’ 사건 대책위원회에서 나온 보고서. ‘샘’ 소개, ‘샘’ 사건 경위, 성명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 청소년회 ‘샘’ 사건 대책위원회에서 나온 보고서. ‘샘’ 소개, ‘샘’ 사건 경위, 성명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정부의 노림수는 적중하여 샘 사건은 다른 청소년단체들의 활동을 많이 위축시켰다. 박명희 씨는 “샘 사건이 터진 다음에 다른 단체에까지 불똥이 튈 소지가 정말 많았다. 연행되지 않기로 마음먹고 단체 문을 닫고 피했다. 1년 동안 단체 활동을 모두 최소화시켰었다. 민가협 같은 데 찾아다니면서 문의하며 대응했다.”고 말했다. 구정인 씨도 “샘사건으로 고등학생운동이 와장창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둔 친구들도 진짜 많았고 학교에서는 더 이상 ‘샘’이라는 이름을 언급할 수도 없을 정도였으니까. 이 때문에 개별학교 안에 운동도 소멸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이야기했다.

청소년인권운동으로

‘샘 사건’ 이후, 사실상 1980년대의 운동과 직접적 관련을 맺고 있는 고등학생운동의 조직적 흐름도 약화되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살아남은 단체들이 연대하여 2000년 ‘21세기청소년공동체 희망’을 출발시켰지만 이미 청소년 대중 내부에 있던 운동의 ‘흐름’들은 많이 사그라진 상태였다. 비록 1980년대부터 이어져온 흐름이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지만 샘 사건으로 대표되는 탄압은 결국 청소년운동을 위기로 몰아넣는 데는 성공했던 것이다.

이후 전개되는 청소년들의 운동은 최우주 씨 사건을 계기로 하여 ‘인권’이라는 새로운 운동프레임을 통해 분출된다. 1980년대나 샘 사건 때도 ‘인권’이 이야기되긴 했으나 이는 주로 청소년들의 운동에 대한 탄압을 막아낼 때 제한적으로 쓰이던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95년 이후 청소년인권운동에서는 인권이 광범위한 운동의 근거가 되어 유엔어린이/청소년권리조약(아동권리협약)이나 헌법, 세계인권선언 등이 인용되기 시작했다. 곧 과거 청소년들이 두발자유를 교육민주화와 군사문화 척결을 위한 과제로 삼았다면, 95년 이후 운동에서 두발자유는 청소년인권 그 자체를 요구하는 상징적 과제로 제기된다.

결국 94년까지의 운동이 청소년인권운동의 ‘단초’를 안고 있었다면 95년 이후 운동은 ‘본격적인’ 청소년인권운동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다. 이는 사회운동 전체에서도 민주화운동이라는 거대담론이 1990년대부터 여성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 등 다양한 운동으로 분화해갔던 것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준다. “95년 이전의 고등학생운동은 고등학생들이 했던 ‘변혁운동’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청소년운동’이라는 말은 95년 이후에나 쓰기 시작한 말이다. ‘청소년’을 주제로 청소년 사안을 가지고 한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라고 구정인 씨는 평가했다.
덧붙임

유윤종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