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오름 >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의 의미 톺아보기

학교폭력과 학생인권 - 분노와 정의가 만난다면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의 의미 톺아보기 ⑥

동물사육장과 학교

보신탕이 되기 위해 사육되는 개들은 종종 서로 죽을 때까지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일이 있다. 자연적 생태계를 잃어버린 채 모피가 되기 위해 사육되는 밍크는 새끼 밍크를 잡아먹고, 여우농장의 여우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약한 동료를 공격하거나 자해하고 충족되지 않는 운동욕구로 인해 반복적인 이상 행동을 보인다. 대규모 공장식 양계장에서는 그런 이유로 서로 쪼아대는 닭들 때문에 병아리 때부터 부리를 자른다.

최근의 학교폭력사건들과 왕따, 자살 사건들에 대한 보도를 접할 때마다 내 머리 속에 연상되는 학교 교실의 모습에는 위의 동물사육장이 오버랩 된다. 오늘날 학교에 있는 학생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보신탕이 되기 위한 개나 모피가 되기 위한 밍크처럼, 보다 높은 등급의 상품이 되기 위해 교육이란 이름으로 사육당하고 있지 않는가? 인간으로서의 건강한 성장을 위한 자연적 생태계와 사회적 생태계를 잃어버린 채, 어찌할 수 없는 분노를 자신이 표할 수 있는 대상인 약한 교사와 약한 친구들을 향해 맹렬히 터뜨리고 있는 아이들, 그조차 가능하지 않으면 차라리 자기 자신을 분노의 대상으로 삼는 아이들, 만약 그것이 학교 폭력의 본질이라면 그것에 대한 해결은 어떻게 가능할까?

동물사육장에서 쓰는 방법은 가해 동물과 피해 동물을 사육장에서 솎아 내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들의 공격적 이상행동은 그치지 않는다. 문제의 원인이 동물들이 아니라 사육장에 있기 때문이다. 학교폭력도 마찬가지다. 단죄와 엄벌은 문제원인을 학생에게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농장에서 그러했듯 가해자와 피해자가 학교를 떠난다고 폭력과 죽음의 행렬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근본적인 해결은 사육장이 된 학교를 바꾸는 일에서만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밖 청소년, 사육장을 벗어난 아이들

내가 활동하는 학벌없는사회는 2010년부터 이 사육장을 벗어난 아이들, 학교밖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학교밖 청소년이란 일반적으로 학교에 다닐 나이에 정규학교를 다니지 않고 학교 밖에서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말한다. 학생이 아닌 신분으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비학생 청소년들의 인권 실태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내가 아닌 누군가, 학교밖 청소년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일이 더 나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이 아닌 청소년들의 기본적 생존권, 노동권, 학습권에 대한 내용을 함께 담보해내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학생인권조례의 한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상급식 뉴스를 보고 빡쳤다. 왜 걔네들만 밥 주냐고! 우리가 더 급한데! 우리 부모님도 세금 다 내고 있는데!” 서울의 한 쉼터에서 만났던 학교밖 청소년 K는 학교 안에 있는 학생들만 지원하는 정책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무상급식정책이 시행되지 않았다면 K는 국민의 세금으로 함께 밥을 먹이는 일에 학교를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제외되어야 하냐고 따질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오히려 학교 밖에 있는 청소년들이 그들이 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배움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정당한 공적 지원의 대상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 시기 먹고 입고 자고 배우는 일은 최소한의 기본권에 속하며 그것을 보장하는 일은 국가의 의무라고 요구하는 것은 학생인권이 개선될수록 더욱 힘을 얻게 된다. 따라서 학생인권조례는 당장은 학교 안과 학교 밖에 있는 청소년들의 인권을 구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비’학생 청소년의 인권 현실의 개선을 요구할 수 있는 기준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내가 학생인권조례운동에서 짚고 싶은 중요한 의미와 한계는 좀 다른 지점에 있다. 우선 중요한 의미는 이 운동이 교사와 학부모가 주도해온 기존의 교육운동과 달리 청소년들 자신이 대상화되지 않고 깊이 개입하여 주도하였다는 점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한계점은 여전히 학생 청소년들이 완전한 주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실천적 운동의 형태는 아니지만 도저히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나오는 ‘탈학교 현상’ 속에서 오히려 기존의 학교질서에 저항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낼 수 있는 중요한 힘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찌되었건, 사육장을 벗어나 이후의 삶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은 교사도 부모도 아닌, 청소년 자신이기 때문에.

학교를 거부하거나, 학교에서 거부당하거나

아이들은 왜 학교를 나오는 것일까? 한편에서는 학교를 거부한 아이들이 있고, 한편에서는 학교에서 거부당한 아이들이 있다. 전자가 ‘때려치운 아이들’이라면, 후자는 ‘잘리거나 밀려나온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때려치운 아이들’은 학교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거나 포기한 아이들이다. 이 친구들에게는 아직도 생생한 분노의 순간이 남아 있었다. 노예 공부에 대한 저항, 교사와의 마찰, 학교문화에 대한 부적응과 거부, 그 모든 억압되었던 것들이 발화된 시점에서는 심각한 갈등과 폭력 사태가 함께 따르곤 했다.

‘잘린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분노와 함께 억울함과 서러움이 묻어났다. 잘린 아이들은 학교 질서에 순응하지 않은 채로 학교 안에서 나름대로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아이들이었다. 관리와 통제라는 학교 측 입장에서 보면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면서도 학교를 그만 둘 생각은 없는, 가장 골치 아픈 존재들이기도 했다. 학교가 이들을 잘라내는 방식은 다양했다. 노골적인 종용부터 강제전학, 유도자퇴, 퇴학 등의 방식까지. 하지만 어떤 경우든 아이들은 자신이 거부당한 존재임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고 그렇게 학교를 나오는 과정은 그 자체가 커다란 상처로 남았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은 자신을 잘라낸 학교에 대해 분노할 줄 알았다. 가장 걱정스러운 유형은 나머지 아이들, ‘밀려 나온 아이들’ 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소리 소문 없이 어느 날부터인가 조용히 학교에서 사라져 영원히 나타나지 않는 아이들, 학교를 그만두고도 알바를 하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사고를 치는 대신, 자기만의 세계 속에 파묻혀 꼼짝도 않는 아이들의 분노도 슬픔도 없는 그 무거운 입이 내게는 가장 힘들었다. 이 아이들이 다시 새로운 배움터를 찾고 힘들지만 자기만의 세계에서 함께 사는 세계로 돌아오는 과정에는 종종 그동안 학교에서 표출되지 못했던 공격성, 폭력성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학교밖 배움터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긴 침묵을 깨트리는 폭력과 자신을 가두었던 세상을 향한 분노를 오히려 반가워했다. 그건 다시 살겠다는 의지, 변하고 싶고 변화시키고 싶다는 내적인 힘의 약동이었으니까.

분노의 힘

그런데 나는 바로 그 힘, 얌전히 학교질서에 순응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사육장 안에서 싸우고 문제를 일으키며 그 질서를 깨트리는 그 힘 속에 청소년들 자신이 학교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학교를 변화시킬 수 있는 마지막 힘은 교사도 학부모도 아닌 청소년 자신에게 있다. 오늘 학교에서 터져 나오는 여러 폭력들도 실은 그 힘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다. 분노의 힘, 거부의 힘,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들도 실은 그 속에 함께 있기 때문이다.

분노는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힘이다. 물론 분노는 때로 우리를 옳지 않은 방식으로 행동하게도 한다. 하지만 분노가 정의와 함께 할 때는 가장 위대한 것을 이룬다. 그러나 제대로 분노할 수 있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다. 부당한 명령에 대한 불복종, 불의 앞에 굴하지 않는 정의,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연민과 사랑, 비겁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들은 책을 읽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서 그러한 현실과 마주칠 때 직접 몸으로 행동하고 부딪쳐봄으로써 깨우치고 배워나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학생인권조례 역시 그것이 한낱 명문화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청년 학생들 자신이 자신의 삶터인 학교 현장에서 그 정신에 반하는 모든 반인권적 억압과 행위에 대해 저항하고 투쟁함으로써 실제적인 힘으로 쟁취해내야만 하는 과정이 남아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상의 뜻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것이 반민주적, 반공화적 정치에 대해 저항하는 시민의 행동에 있듯이 말이다. 분노와 정의의 결합, 즉 폭력성의 형태로 드러나는 내적인 분노의 에너지가 학생인권조례의 내용과 결합한다면, 이는 학교를 사육장에서 민주주의의 학습장으로 변화시키는 결정적 관건이 될 것이다.

청소년이 주체가 되는 운동으로

교사운동도 학부모운동도 그 어떤 사회운동도 오늘날 청소년 학생 자신이 처한 고통의 현실을 해결해줄 수는 없다. 아무리 학교가 지옥이라 해도 그 때문에 죽는 사람은 교사도 학부모도 아니다. 68년 유럽에서 상층 사회귀족들과 그 자녀들을 위한 지식권력의 독점기관인 대학을 개혁하여 노동자의 자녀들이 다닐 수 있도록 무상화 평준화를 이끌어낸 것은 바로 그 교육에 의해 가장 큰 고통과 피해를 경험한 당사자인 중고등학생들이었다. 2011년 칠레에서 시작되어 남미 전역으로 번진 무상교육과 교육공공성 강화를 요구한 교육투쟁의 주체 역시 중고등학생 청소년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학생인권조례의 남은 과제는 당사자인 청소년들이 학교 현장에서 그 조례를 무력화하려는 온갖 시도에 맞서 현실화시키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청소년들이 교육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나는 학생인권조례의 결실이 이렇게 맺어지게 되기를 바란다. 청소년들은 이제 자신이 괴물이 되는 대신 괴물과 싸우기를 선택할 것이다.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고 학교의 질서와 정의를 스스로 만드는 학교의 주인이 될 것이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고 쟁취하고 지켜내게 될 것이며 학생과 청소년을 대표하는 제대로 된 학생조직을 건설하고, 그런 활동들을 통해 민주주의와 정치 행위를 실제 삶 속에서 배우고 익힐 수 있을 것이다. 학교가 아직 사육장의 오명을 벗지 못한 곳에서 누군가 또다시 죽음에 이를 때, 학생들은 내 친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수업거부를 선언할 것이다. 입시철이면 교문 위에 자랑스럽게 내걸리는 명문대 합격자 축하 플래카드도 학생들 자신의 손으로 찢어버릴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학생인권조례를 부정하고 저지하려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가장 두려워할 일이며,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학생인권조례의 가장 큰 성취일 것이다.

덧붙임

채효정 님은 학벌없는사회 운영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