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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국가범죄에 면죄부 주는 인권위 의견표명

대상범죄 축소, 소멸시효 소급 반대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공소시효와 소멸시효의 적용을 배제·정지하는 법안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가 그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법안의 내용보다 후퇴하는 의견을 내놨다.

14일 인권위는 이원영 의원이 지난 7월 발의한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안'(아래 법안)에 대한 의견표명을 통해, 국가권력 또는 국가권력의 용인 아래 저질러진 인권침해 범죄행위의 경우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호소할 곳을 찾을 수 없고 △국가기관에 의해 그 진실이 조작·은폐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는데, 이를 국제법상 반인도범죄만으로 모두 포섭하기 어려우며 △공권력을 이용한 중대한 인권침해범죄의 재발 방지 등을 위해 특례법안으로 공소시효를 배제 또는 정지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국회의장에게 의견을 전달하기로 했다.


조직적·계획적 범죄로 한정

하지만 법안이 공소시효 적용 배제 대상범죄를 공무원이 직무수행과 관련해 △형법 제24장(살인) △형법 제125조(폭행·가혹행위) △군형법 제62조(가혹행위)의 죄를 범하거나 이를 통해 사람을 살상한 경우로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인권위는 "범위가 광범위하므로 국가공권력에 의한 조직적 또는 계획적 범죄와 같이 중대한 인권침해범죄에 한정될 수 있도록 보다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박상기 교수(연세대 법학)는 "조직적이라는 말을 (조직의) 상하가 의사소통을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해당 부서에서 아래 직원들이 모의해서 반인권 범죄행위를 저질렀을 때 (처벌이 안되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또 "모든 범죄에는 계획이 있겠지만 법원의 판단으로 넘어가면 계획적임을 구체적으로 입증해야 시효배제가 가능해진다"며 "국가공권력을 이용해서 범죄행위를 했다면 그것이 조직적이든 아니든 시효와 상관없이 처벌할 수 있어야 (법안의 취지에) 맞다"고 지적했다.


법원·국가기간 판단 있어야 공소시효 정지

한편 인권위는 공소시효가 정지되는 기간의 종료시점에 대해 법안이 "그러한 조작 또는 은폐사실이 공연히 밝혀진 때"로 규정한 것에 대해 "이는 불명확하므로 예를 들어, 조작 또는 은폐사실이 법원의 판결이나 권한이 있는 국가기관(또는 관계 국가기관)에 의하여 인정된 때 등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할 것을 제안했다.

인권위 의견은 입법화할 때는 요건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취지지만 피해자가 공소시효 정지를 주장할 수 있는 문을 더욱 좁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조작·은폐사실이 언론의 추적보도 등을 통해 '공연히' 밝혀진다 하더라도 법원이나 국가기관에 의해 인정되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 박 교수는 "(조작·은폐 사건은) 법원의 재심이나 국가기관의 판단을 받아내는 것 자체가 힘들다"며 "법적인 판단의 전단계에도 시효정지가 가능하도록 구체적인 기준을 만드는 것이 현실에 더 부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소멸시효 배제 대신 연장, 소급적용은 안돼"

민사 소멸시효도 문제. 법안은 "(국가의 범죄로 인해) 생명, 신체, 재산상의 손해 또는 정신적 손해를 입은 피해자의 「민법」 또는 「국가배상법」에 의한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해서는 소멸시효의 적용을 배제·정지시킨다. 또 부칙에 "이 법 시행 이전에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된 경우에도 국가는 소멸시효완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못박아 과거 국가범죄로 피해를 입은 국민들이 배상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하지만 인권위는 △민사 소멸시효를 공소시효와 달리 취급하고 △국가를 상대로 한 국가배상청구권에 한하여 현행 단기 소멸시효기간보다 상당한 장기의 소멸시효를 두되 △아직 소멸시효 기간이 만료되지 않은 사건에 한하여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새사회연대 이창수 대표는 "소멸시효 배제·정지는 물론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된 사건에도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국가가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영원히 침묵하겠다는 것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지난 9월 국회 법제사법위 전문위원실도 법안 검토보고서를 통해 "국가기관이 개입하여 조작과 은폐가 이루어진 사건의 경우 국민의 생명과 기본권 보장을 책무로 하는 국가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칙에 반한다"고 밝혔다. 2003년 서울지법도 "국가로서는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까닭에 국민은 국가를 믿고 국가가 취한 조치가 적법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데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 일반적이고…위법행위를 한 국가가 그 위법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와서 그 위법을 몰랐던 피해자들에 대해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신의칙상 또는 형평의 원칙상 도저히 허용될 수 없다"고 판결하기도 했다.

박 교수는 "'법적 안정성'이 그렇게 걱정된다면 소멸시효 배제의 시점을 설정해 그 이후의 국가범죄에 대해서 적용하는 식으로 바꾸는 것도 합리적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법적 안정성보다 우선하는 정의의 실현

인권위의 이번 의견표명도 문제지만 애초 법안 자체도 과거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범죄를 처벌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있어 왔다. 현행 형법과 군형법에서 규정한 공소시효는 △살인 15년 △촉탁·승낙살인 7년 △폭행·가혹행위 5년 △불법체포·감금 5년 △범인은닉 3년 △증거인멸 5년 등으로 대부분의 국가범죄는 공소시효가 완성됐다. 하지만 법안은 부칙에 "(법 시행 시점에서) 공소시효가 완성되지 아니한 범죄행위에 대해서도 이 법을 적용한다"고 규정할 뿐 정작 공소시효가 완성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피해자들의 고통에는 침묵하고 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전 민청련 의장 김근태 씨 고문사건이 드러나면서 88년 12월 잠적했다. 11년만인 99년 자수한 이근안은 검찰수사에서 김근태·박충렬·함주명 씨에 대한 고문사실을 시인했지만 이 사건들의 공소시효는 이미 완성된 후였다. 그는 상관이었던 박처원 전 치안감에게서 도피를 지시받았고 도피자금도 지원받았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그가 저질렀던 수많은 범죄가 면죄부를 받았다. 그는 98년 법원이 재정신청을 받아들임에 따라 공소시효가 2013년으로 연장된 납북어부 김성학 씨 고문사건에 대해서만 징역 7년형을 받아 현재 복역중이다.

이근안에게 고문당해 간첩으로 조작됐다가 지난 7월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함주명 씨는 "나는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 증명돼 운좋게 무죄판결이 났지만 아직도 공소시효 만료를 이유로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다"며 "반민중적인 범죄행위를 하고도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해서 처벌못하는 것은 봐주는 것밖에 안된다"고 말했다. 또 "법적 안정성을 들먹이며 정치권 일부에서 시효배제입법을 반대하는 이유는 공안검사 출신 일부 의원들이 자기네가 저질러 놓은 일이 다 드러날까봐 걱정해서 반대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1984년 청송보호감호소의 열악한 처우에 항의하다 교도관들에게 집단 폭행당해 사망한 박영두 씨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 1988년 수용자 이 아무개 씨가 박 씨 사건을 대구지검 안동지청에 고발했으나 10명의 검사가 교체된 끝에 1990년 대구지검 의성지청이 무혐의 처리했다. 2001년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숨지기 직전 박 씨가 '비녀꽂기', '통닭구이' 등 가혹행위를 당한 후 방치된 사실을 밝혀내고 당시 폭행에 가담한 교도관 4명과 사건을 은폐한 교도소장·보안과장의 실명을 공개했다. 하지만 공소시효 만료로 고발을 포기해야 했다.

1987년 홍콩에서 남편 윤태식에 의해 살해당했으나 안기부의 조작으로 간첩이 된 '수지 김' 사건의 경우 2000년 언론보도로 의혹이 제기되자 경찰이 수사에 착수해 진상에 상당히 근접했다. 하지만 안기부의 후신 국정원은 경찰청장과의 모의 끝에 수사를 중단시켰다. 결국 같은해 유족들의 의뢰로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윤태식의 공소시효 만료 직전인 2001년 10월 살인 및 사기혐의로 그를 긴급체포하고 2000년 모의에 가담한 국정원 전 대공수사국장 김승일과 전 경찰청장 이무영을 범인도피와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하지만 1987년 당시 책임자들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을 받는 등 아무도 법의 심판대에 서지 않았다.